나 혼자 균열에 산다 219화
72. 미궁을 위한 준비(1)
"오랜만이야. 세진 오빠. 그동안 잘
지냈어?"
“나는 잘 지냈지."
오랜만에 만난 이혜린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녀는 나를 강유환 회장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이혜린이 열어주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느긋한 표정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강유환 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전에 티머시 증후군을 앓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하기 힘들 정도로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는 들어오자 입꼬리를 올리며 나의 방문을 환영했다.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늙은이에게 뭐 특별한 일이 있겠어? 그냥 죽지 않고 살아있으면 잘 지내는 거지. 허허."
건강하다 못해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이는 모습을 하면서도, 강유환 회장은 노인 특유의 죽는 소리를 했다.
“저는 차를 준비해 오겠습니다.”
“그래. 부탁한다.”
이혜린은 강유환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나에게는 살짝 눈짓을 보낸 뒤에 다시 방을 나갔다.
“그래, 무슨 일이냐? 네 쪽에서 나에게 먼저 연락을 다 하고. 요즘에 너튜브를 보니 엘프들과 재미있게 지내는 것 같던데.”
“저희 채널을 보고 계시는 건가요?"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균숙자네 퓨이' 채널에 올라오는 영상은 하나도 빼지 않고 다 챙겨봤어."
미래 그룹의 회장님이 우리 채널의 영상을 다 챙겨봤다는 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최근에는 라이브 방송도 챙겨봤었지. 그 엘프들이 나오던 방송 말이야.”
"보고 계셨어요? 왜 후원도 좀 해 주지 그러셨어요."
"흐음. 정말 제대로 후원 한번 해 주랴?"
“..…… 죄송합니다."
“흘흘. 연우 PD에게 영상이나 빨리 올리라고 대신 전해주거라.”
너튜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방을 나갔던 이혜린이 차와 간식을 내왔다.
나와 강유환 회장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은 예상외로 강유환 회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태백산 미궁 때문에 나를 찾아온 것이냐?"
"으음.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소문이란 게 소리 없이 퍼지는 법이란다."
"......"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강유환 회장의 태도에 나는 약간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태백산 미궁을 공략한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으면 몰라도, 아직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길드 내에서도 굉장히 소수였다.
강유환 회장은 이런 내 표정이 오히려 재미있는지. 얼굴에 미소를 그득 담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네가 길드장으로 있는, 아르킨 길드에서 태백산 미궁에 관련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미궁에 관한 정보가 워낙 없어서 접촉할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없지."
"......"
“다른 길드였다면 그 정보수집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겠지만, 아르킨 길드는 다르지. 네가 길드장으로 있으니까."
그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 또 그곳을 공략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생겼겠지? 저번에 나에게 주었던 치료제를 구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내가 틀렸느냐?"
회장의 결론에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네 녀석도 평범하게 살기는 이미 그른 모양이야."
약간 기분은 찝찝했지만.
강유환 회장이 이미 모든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예상하신 대로 아르킨 길드에서는 태백산 미궁을 공략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흐음, 내가 알기로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한 거로 아는데. 거기다 다른 길드와 협력을 구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인원은 어떻게든 채울 생각입니다.”
“호오? 꽤 많은 인원, 그것도 미궁에 들어갈 정도의 실력자를 벌써 구했다고?"
강유환 회장은 인원을 채울 수 있다는 내 말에 독특한 반응을 보였다.
아마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느끼는듯했다.
“부족한 인원은 해결했다고 치고.
부길드장으로 있는 그 아가씨 성격에 어중이떠중이를 데려오지도 않았을 테니 실력도 충분하겠구먼.”
하지만 그는 그 방법에 대해서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문제에 관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럼 남은 문제는 길드의 조직력 문제와 장비 문제인가?"
"......"
“조직력 문제로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테고……”
강유환 회장은 일부러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뒤를 끌었다.
네 입으로 직접 말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졌다.
"회장님의 예상이 맞아요. 미궁을 공략하기 위한 장비 문제 때문에 찾아온 겁니다."
그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표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금방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미궁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최소 50명 내외의 인원이 필요하니까 장비 숫자도 그만큼은 있어야 할 것이고, 어쭙잖은 장비로는 버티지도 못 할 테니 꽤 수준 높은 장비가 필요 하겠구먼."
"맞습니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강유환 회장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아마 급하게 미궁을 공략하려는 걸 보니, 꽤 급한 사정이 있는 건가?"
나는 이엘과 생명의 샘, 그리고 세계수에 관해 주절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저 강유환 회장의 질문에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흐음. 일단 확실히 하고 넘어가지. 만약 네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이 일을 부탁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네. 아직 갚아야 할 빚 이 많다고 생각하니까."
약간 식은 차로 목을 축인 회장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부탁은 내 개인적인 힘으로는 들어주기 힘들어. 그 많은 인원의 장비를, 그것도 최상급으로 준비하는 일은 금액적인 문제를 떠 나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미궁을 공략하기 위한 성능의 장비를 구하려면 당연히 상대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 개인이 아닌, 미래 그룹의 회장으로서 부탁을 받는다면 일의 가능성은 커지지. 회사의 총력을 다한다면 어떻게 준비해 볼 수도 있는 일이야. 하지만……"
강유환 회장은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나를 강하게 응시했다.
“이익이 추구하는 회사의 입장에서는 아르킨 길드에게 그런 무리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어. 더 솔직히 말하자면 투자가 아니라 도박에 가까운 일이야."
그의 냉정한 평가에 나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그 말대로 확실히 위험한 투자임은 틀림없었으니까.
“이제야 본론에 도착했구먼. 자! 그럼 이제 말해봐. 왜 우리 그룹이 아르킨 길드에 그런 무리한 투자를 해야 하는지."
강유환 회장은 처음에 봤던 장난스럽고, 여유로운 모습이 아니라, 냉정하고 위압감 넘치는 모습으로 나를 압박했다.
조금이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허튼
짓을 부리면 곧바로 불호령이 떨어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도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었기에 몰아붙이는 기세에 당당히 맞서며 입을 열었다.
"만약 티머시 증후군을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는 실마리를 위해서라면, 그 조건이라면 투자할 만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
강유환 회장은 내가 이 방에 들어 온 뒤로 처음으로 자신의 표정을 깨뜨렸다.
"저번에 나에게 전해준 그 치료약을 말하는 것이냐?"
"아뇨. 그거랑은 좀 달라요. 애초에 그 치료약은 들어가는 재료를 구할 방법이 없어서 더는 만들 수 없어요."
"......?"
“대신 그 약을 전해주신 분이 알려준 다른 치료법이 있어요. 그 치료법을 위해서는 태백산 미궁을 꼭 공략해야 해요."
“허허…….”
내 말을 끝까지 들은 뒤, 그는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손익을 계산하는 듯했다.
나는 그가 계산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좋다. 우리가 아르킨 길드를 지원해 준다면, 너는 정확히 어떤 대가를 내놓겠다는 거냐? 치료법을 우리에게 통째로 넘기지는 않을 테고……”
"죄송하지만 치료법은 저만 사용할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생명의 문양을 구해 치료법을 완전히 알아내도 문양의 힘을 사용해야 하기에, 나만 그 치료법을 사용할 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대신 그 치료법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꽤 준비 과정이 많이 필요할 거예요. 그 부분을 미래 그룹 쪽에 맡길게요."
"흐음......."
내가 내건 조건은 얼핏 듣기에는 그리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룹 전체가 흔들릴지 모르는 투자를 하는 대가로 치료법을 통째로 얻어오는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그 치료법이 티머시 증후군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어쩌면 세상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르는 치료법.
금액적인 이익은 접어두고서라도, 그 상징적인 의미와 가치는 단순히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내 말대로 성공만 할 수 있다면, 미래 그룹에서도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투자였다.
강유환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이어나가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확히 뭐가 필요한 것이냐?”
필요한 것을 묻는 강유환 회장의 말에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품속에서 서율희가 미리 준비해 준 종이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
강유환 회장과 만남이 끝난 뒤.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니, 엘프 마을에 갔던 시르엘과 넬모란 장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장로님. 혹시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닐세. 나도 시르엘과 조금 전에
도착했다네.”
슬쩍 시르엘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녀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시르엘을 통해 엘프 마을에 부탁한 일에 대해 결과가 나왔네.”
넬모란 장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내자, 나는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마을에서는 자네를 믿고,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마을에서 지원 가능한 엘프들을 모두 보내기로 했네.”
"정말입니까?"
“그렇다네. 아직 이곳으로 지원 보낼 엘프를 정하지는 못했지만, 장로들의 결정이 내려졌으니 금방 선별 작업이 시작될걸세."
태백산 미궁을 공략하는 데 필요했던 가장 중요한 일이 해결되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과 동시에 기쁜 감정을 마음껏 드러냈다.
“이곳에 지원 나온 경비대원을 포함해 추가로 15명을 더 지원할걸세. 아마 마을에서 총력을 다해 지원하기로 했으니 실력은 걱정하지 말게.”
“정말 감사합니다. 넬모란 장로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감사 인사는 시르엘에게 전하도록 하게. 마을 사람들과 장로들에게 자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이고, 대단한 인물인지 입이 닳도록 설명했으니.”
넬모란 장로가 시르엘의 활약상을 이야기하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했다.
“장로님......”
“시르엘, 고마워요. 덕분에 큰 문제 하나가 해결됐어요."
"아니에요. 세계수를 지키는 일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문제니까요. 그리고 세진 님에게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저도 기뻐요.”
그녀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면서도 나에게 활짝 웃어 보였다.
넬모랏 장로도 그런 우리를 보며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계속되는 중에.
엘디르가 불쑥 나타나 내게 말을 걸었다.
"세진 님. 이야기하시는 도중에 죄송한데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엘디르? 무슨 일이에요?"
“강제노역을 위해 이곳에 온 엘프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러니까…… 직접 가보시죠.”
나와 시르엘, 넬모란 장로까지.
황급히 엘디르를 따라 엘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