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18화 (218/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18화

71. 태백산 미궁(2)

위니의 안내로 태백산 미궁을 다녀온 날.

나는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많은 길드가 도전해 실패했다는 태백산 미궁에 생명의 문양이 존재할 지도 모르는 상황.

지금껏 생명의 문양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해 왔고, 그걸 찾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생각이었지만. 태백산 미궁은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아르킨 길드의 힘이 필요했다.

많은 길드원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

당연히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런 고민에 빠져있을 때, 시르엘과 엘디르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진 님."

"아…… 시르엘? 엘디르까지. 무슨 일이에요?"

“오늘 저희와 다녀온 불길한 기운이 흐르는 곳 때문에 걱정하고 계시는 건가요?"

“.......”

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위니가 안내해 준 그곳은 태백산 미궁이라는 곳이에요. 굉장히 위험한 곳인데, 생명의 문양은 그 미궁 내부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럼 당연히 들어가 생명의 문양을 되찾아오면 되지 않습니까? 위험하다면 제가 함께하겠습니다."

"엘디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에요."

엘디르에게 미궁이 어떤 곳이고, 많은 희생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라는 걸 알려줬다.

그럼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위험하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경비대원 모두 그 미궁에 세진 님과 함께하겠습니다."

“경비대원들은 다른 엘프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여기에 왔는데, 그렇게 마음대로 미궁에 따라와도 되나요?"

“세계수의 씨앗을 지키고 나아가 세계수의 힘을 되찾는 일을 돕기 위해 이곳에 온 겁니다. 오히려 지금껏 너무 할 일이 없었는데, 드디어 활약할 기회가 생긴 것 같습니다."

“세진 님, 생명의 문양을 찾는 일은 저희에게도 중요한 사안이에요. 어려운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 테니까."

“시르엘...… 엘디르……”

그들의 진심이 담긴 말에 나는 고민으로 찡그려졌던 얼굴이 감동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

태백산 미궁을 다녀온 지 이틀이 지났다.

아침부터 통나무집에는 반가운 손님들이 찾아왔다.

정씨 아저씨 부부와 서율희, 윤동현까지 일찍 이곳을 방문했다.

평소라면 길드에 출근하거나 각자의 일상을 보낼 시간이었겠지만, 미궁에 관한 문제로 급하게 이곳으로 소집된 상황이었다.

정씨 남매는 다른 일이 있어 오지 못했고, 김유미는 서율희를 대신해 길드에서 다른 업무를 대신 떠맡는 중이었다.

오랜만에 통나무집을 찾아온 반가운 사람들에 아이들이 떠들썩하게 달라붙었다.

아저씨는 점점 커지는 새끼 드레이크, 세이를 보고 깜짝 놀라 내게 물었다.

"세진아. 이 녀석 점점 커지는데, 나중에 어미처럼 난폭해지는 거 아니야?"

"괜찮아요. 우리 세이는 착해서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렇지?”

-그르르릉.

내가 쓰다듬으며 말하자 세이는 대답하듯 그르렁거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허허. 고 녀석 말도 알아듣나 보네.”

아저씨는 그 모습이 신기한지 감탄이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티아와 이엘 그리고 이는 서율희와 아주머니에게 달라붙어,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풀어놨다.

이엘은 엘프 마을에 방문해 루나르엘의 집에서 머물렀던 이야기와 사진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엘프 마을에 대한 이야기와 사진을 처음 접한 서율희는 부럽다는 표정을 하다가, 내 쪽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길드장님은 저에게 바쁘다고 일을 몰아주고서는, 이렇게 좋은 곳에 다녀오셨군요."

“그…… 중요한 일 때문에 엘프 마을에 방문한 거지, 절대 놀러 갔다 온 게 아닙니다.”

“그래요? 근데 사진은 정말 즐거운 표정을 짓고 계시네요."

“.......”

확실히 이엘이 보여주는 사진 속에는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들뿐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인정해야만 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번에 선물을 보내주신 건 정말 고마웠으니까, 한 번 봐드리는 거예요."

엘프 마을에서 가져왔던 많은 선물을 길드 사람들에게도 나눠줬었는데, 다행히 그게 서율희의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녀는 더 나를 추궁하지 않고 다시 아이들에게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 손님들의 시선을 끄는 존재가 있었는데.

-......

-뽀로로롱!

낯선 사람들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날아다니고 있는 위니였다.

처음에는 내 곁에 딱 달라붙어  구경만 하더니, 어느새 익숙해져서 사람들 사이를 거리낌 없이 날아다녔다.

또 귀여운 것은 사족을 못 쓰는 서율희는 작은 아기 요정에 금방 마음을 빼앗겨 버리기도 했다.

“후모. 후모.”

“오. 엘프주 만드는 방법을 배웠다고?"

“후모!"

모렛은 오랜만에 만난 윤동현에게 달라붙어, 엘디르에게 엘프주 만드는 방법을 배운 사실을 자랑했다.

그 옆에 임진혁도 붙어 앉아 조금씩 말을 보탰다.

“맛은 어땠습니까?"

“흐음. 포도주와 비슷한 느낌인데. 훨씬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맛이 강한 느낌?"

“오오. 저도 한번 맛보고 싶네요.”

“지금 맥주 창고에서 숙성 중이니까, 조만간 우리가 만든 엘프주를 맛볼 수 있을 거야. 완성되면 연락 할게.”

“그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후모, 후모.”

셋이서 정답게 엘프주에 관한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을 때.

"무슨 이야기야? 엘프주? 엘프주를 직접 만든 거야?"

아저씨는 귀신같이 술 이야기를 알아듣고 대화에 난입했다.

"후모! 후모!"

이 술 귀신 때문에 여러 번 맥주 창고를 털렸던 경험이 있기에, 아저씨가 창고에 숙성 중인 엘프주에 관심을 보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허, 모렛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이러기야?"

“후모! 후모!”

“흐흐. 아무리 그래도 나를 막을 순 없을걸? 벌써 모렛의 엘프주 맛이 기대되는군.”

아저씨는 마치 악당 같은 표정으로

음흉한 미소를 흘렸고, 모렛은 온몸을 부르르 떨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 모습에 윤동현은 웃음을 터뜨렸고, 임진혁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이 작은 털북숭이는 이미 아저씨의 약점을 파악하고 있었으니.

"후모! 후모!”

"응? 왜 그러니?"

곧바로 아주머니에게 쪼르르 달려간 모렛은 음흉한 계획을 꾸미는 아저씨를 그대로 일러바쳤다.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저씨의 횡포를 고자질하는 모렛.

"아앗! 이 녀석, 치사하게……”

아저씨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지만, 이미 아주머니의 두 눈에는 불똥이 튀어 올랐다.

“당신. 이리 와봐요."

"......"

“아니, 왜 애가 만든 걸 뺏어 먹으려 해요. 술이라면 정신을 못 차려서. 또 금주령 한번 당해볼래요?"

아주머니가 엄한 표정으로 금주령 카드를 꺼내 들자, 아저씨는 화들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아,아니야. 여보. 장난친 거야. 장난.…”

“후모, 후모……”

“모렛은 장난이 아니었다는데? 빨리 모렛한테 사과해요. 내가 정말 부끄러워서."

“미안해…...”

아주머니는 자상한 표정으로 모렛의 풍성한 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음에 또 아저씨가 술을 빼앗아 먹으려고 그러면 이 아줌마한테 말하렴. 알았지?"

“후모, 후모.”

모렛은 언제 눈물을 글썽였는지 모르게, 아주 환하게 웃으며 아주머니에게 애교를 부렸다.

그리고 슬쩍슬쩍 아저씨를 바라보며 승자의 기쁨을 만끽했다.

"으으, 두고 보자."

아저씨는 분한 표정으로 모렛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맥주 창고 주인과 술 귀신의 싸움은 계속될 것 같았다.

***

잠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통나무집으로 찾아온 두 사람으로 인해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안녕하세요. 피렌느라고 해요.”

"엘디르입니다.”

피렌느는 한국어로 말했지만, 엘디르는 엘프어로 자신을 소개했다.

물론 중간에 내가 통역을 해줬기에 자기소개는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얘들아, 잠시 언니랑 밖에 나가서 놀까?"

피렌느는 내가 부탁한 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섰고, 거실에는 길드 사람들 그리고 나와 엘디르만 남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는 아이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넘쳤지만, 거실에는 금방 무거운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저는 차라도 내올 테니. 천천히

이야기하고 계세요."

"죄송해요. 아주머니."

“괜찮아. 세진아."

아주머니는 마치 집 주인인 것처럼 부엌으로 가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평소 같았으면 따라가 도와드렸겠지만, 지금은 엘디르 때문에 그러기도 힘들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처음으로 미궁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들은 서율희였다.

“그러니까, 엘디르 님이라고 하셨죠? 엘프 마을 경비대의 대장을 맡고 계시는."

"맞습니다."

둘은 중간의 내 통역을 통해 대화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미궁에 대해서는 알고 계시는 거죠?"

“세진 님께 전해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고 싶다고 하신 건 감사한 일이지만, 꽤 위험한 일이에요. 실력과 경험도 충분해야 하고요.”

"그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던 엘디르는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 모인 분들 만큼은 충분히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꽤 도발적인 대답에 중간에 통역하는 내가 난감할 정도였다.

최대한 완곡한 표현으로 고쳐 통역했지만, 엘디르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 뜻을 이해한 길드 사람들은 제각각 반응을 보였다.

서율희는 살짝 눈썹을 찌푸렸고, 아저씨는 허허로운 웃음을, 윤동현은 더욱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이 상황에서 조용히 침묵을 지키던 임진혁이 한마디 툭 던졌다.

"엘디르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실력이나 경험으로는 충분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시죠?"

“직접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대련도 꽤 자주 해본 사이입니다. 물론 대련에서 진짜 서로의 실력을 내보이지는 않았겠지만, 최소 저와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실력임은 분명합니다."

"......!!"

"......!!"

"......!!"

임진혁의 증언에 나머지 길드 사람들은 매우 놀랍다는 반응을 내보였다.

길드원들의 다양한 능력에 순위를 매기기는 힘들지만, 단순한 전투력만 놓고 따진다면 임진혁은 길드 내에서 최강이라 할 수 있었다.

뛰어난 전투 능력의 각성자들을 직접 봤던 서율희가 그의 능력과 전투 센스를 극찬할 정도였으니……

그런데 그런 임진혁이 최소 자신의 실력과 비슷하다고 선언한 상황.

어쩌면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몰랐다.

가장 먼저 표정을 회복한 서율희는 다시 질문을 이어나갔다.

"엘디르 님의 실력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당신을 따르는 대원들의 실력도 그 정도인가요?"

“물론 경비대원들 중에서는 제가 제일 강합니다. 하지만 나머지 대원들도 오랜 세월 각자의 실력을 갈고 닦은 정예 중의 정예입니다."

"흐음…… 그럼 몇 명의 경비대원을 동원하실 생각이신가요?"

“저를 포함한 지금 이곳에 와있는 15명 모두 참여할 겁니다. 그리고 추가로 더 많은 지원 병력이 올 수도 있습니다."

15명이라는 말에 약간 실망했던 서율희는 추가로 더 많은 지원 병력이 올 수 있다는 말에 살짝 눈을 반짝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뭔가를 생각하던 서율희는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서율희의 계획이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나머지 길드 사람들은 고민 끝에 그 계획에 찬성한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내 통역을 통해 그녀의 계획을 전해 들은 엘디르도 잠시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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