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16화
70. 씨앗의 변화(4)
위니와 엘프들의 등장하자 아이스크림 가게 안은 환한 조명을 들인 것처럼 화사한 분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인사를 했던 직원뿐만 아니라, 먼저 들어와 있던 손님들까지 멍한 눈으로 우리 쪽을 바라봤다.
귀여움이 철철 흐르는 아기 요정은
말할 것도 없었고. 이국적인 외모에 신비한 분위기까지 흐르는 엘프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외국인? 어디 사람이지?"
“저 귀여운 요정은 뭐지? 정령인가?"
“해외에서 온 모델처럼 보이는데.”
“저 평범하게 생긴 남자는 매니저인가 봐."
하지만 시르엘과 피렌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보다는, 신기한 가게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위니는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유리 판매대에 딱 달라붙어, 거의 유리를 뚫고 들어갈 기세로 눈을 반짝였다.
엘디르만 평소와 비슷한 차가운 얼굴로 주변을 경계했다.
물론 그 모습마저도 가게 안 여성들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어놨다.
우리가 앞에 서자 직원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떤 거로 드릴까요?”
남자 직원의 질문에 내 뒤쪽에 있던 피렌느가 불쑥 튀어나와 말했다.
“세진 님. 제가 주문해 봐도 될까요?"
"피렌느가요?”
“네. 지금까지 한국어 연습 많이 했으니까. 한번 실제로 써보고 싶은데.”
"뭐, 그렇게 하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피렌느는 신난 표정으로 직원에게 시선을 돌렸다. 내가 아니라 피렌느가 나서자 남자 직원은 더 긴장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주, 주문하시겠어요?"
“으음.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이 가게는 어떤 아이스크림이 가장 맛있나요?"
“어…… 그러니까."
남자 직원은 처음에는 긴장한 탓인지 말을 더듬다가, 뒤로 갈수록 능숙하게 가게의 아이스크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잘 모르는 단어나 말들을 물어보는 질문에도 직원은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덕분에 피렌느는 쉽게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고른 뒤, 시르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르엘 님. 뭐 드실래요?"
"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시르엘은 갑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몰리자 얼굴을 붉히며 살짝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저는 아무거나 괜찮아요. 피렌느가 알아서 골라주세요."
"으음. 시르엘 님도 참. 엘디르 님은요?"
“저는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에에, 여기 계신 분이 이렇게 친절하게 설명해 주셨는데 그럼 안 되죠. 그럼 두 분 아이스크림은 제가 골라드릴게요.”
피렌느는 두 명의 엘프 몫까지 직접 아이스크림을 골랐고, 나는 평소에 이 가게에 오면 먹던 대로 주문했다.
이제 남은 것은 위니.
위니는 많은 종류의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진열된 많은 아이스크림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아기 요정.
그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주변에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당장에라도 매장의 모든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게 만들었다.
나는 부드럽게 위니를 달랬다.
“위니. 너무 고민하지 않아도 돼․ 나랑 다른 사람들 아이스크림도 맛볼 수 있게 조금씩 나눠 줄 테니까.”
-······!
그제야 위니는 안타까운 표정을 거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각자 주문한 몫의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일행에게 각자의 아이스크림을 나눠 주고 계산을 끝냈다.
"감사합니다."
“설명 고마워요. 또 올게요!"
시르엘은 살짝 부끄러워하며 직원 에게 한국어로 감사 인사를 전했고, 피렌느는 역시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
위니는 앙증맞은 손을 열심히 흔들어 주고는 내 주머니 속으로 쏙 돌아왔다.
우리의 인사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직원들을 뒤로하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차 안에 도착한 우리는 출발하기 전에 각자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피렌느가 골라준 아이스크림이 마음에 들었는지, 시르엘과 엘디르도 괜찮은 듯 보였다.
-뽀로로롱!
위니는 차 안에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여러가지 맛의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얻어먹었다.
스푼에 작게 떠주면 휙 날아와 입 안 가득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었다.
-......!
아이스크림 하나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는 위니의 모습에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
"자. 위니야. 다시 출발하자."
-끄덕끄덕.
마음껏 아이스크림을 섭취한 위니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한번 위니가 가리킨 방향으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제는 '생명의 문양'이 있는 곳으로 바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위니의 호기심을 너무 얕잡아 본 듯했다.
“저기에 가고 싶다고?"
-끄덕끄덕.
처음 바깥세상에 나와본 위니에게 도시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금방 이 아기 요정의 관심을 빼앗아 버렸다.
"위니야. 생명의 문양이 있는 곳부터 먼저 가면 안 될까?"
-......
완곡하게 안된다는 말을 꺼내니, 위니는 표정을 흐렸다.
눈물까지 글썽이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내 마음이 약해졌다.
뒤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피렌느가 입을 열었다.
“세진 님. 조금만 둘러보는 게 어떨까요? 절대 제가 구경하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하아…….”
옆에서 부추기는 피렌느가 얄밉기는 했지만. 나는 여유를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 위니야. 잠시만 들렸다 가는 거야. 알았지?"
-끄덕끄덕.
위니는 다시 환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 어깨 위로 날아올라 내 볼에 뽀뽀를 해줬다.
아기 요정의 애교에 살짝 기분이 좋아진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차를 멈춰세웠다.
****
위니가 가보고 싶다고 한 곳은 인형뽑기가게였다.
작고 귀여운 인형들이 위니 뿐만 아니라 엘프들의 시선도 끌었다.
나는 왕년에 한창 뽑기를 해봤던 솜씨로, 금방 기계에서 귀여운 인형 하나를 뽑아 위니에게 선물했다.
-......!
위니는 자신의 몸집만한 인형을 꼭 끌어안으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특이하게 엘디르가 인형뽑기기계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10번 정도 시도했지만 아쉽게도
인형을 뽑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세진 님. 한 번만 더 해보면 안
되겠습니까?"
"죄송한데. 진짜 가야 할 것 같아요. 사람이 점점 몰려들어서."
엘디르는 분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형뽑기가게를 빠져나간 뒤로 이곳저곳을 많이 돌아다녔다.
길거리에서 파는 떡볶이를 사 먹기도 하고, 가판대에서 판매하는 선글라스를 구매하기도 했다.
떡볶이 가게 아주머니가 엘프들을 보며 관광하러 온 외국인인 줄 알고 굉장히 듬뿍 떡볶이를 주셨는데, 엘프 일행들이 매운 음식을 잘 못 먹어서 내가 다 먹어야 했다.
가판대에서 산 선글라스는 누가 봐도 비싸지 않은 싸구려였는데, 엘프가 사용하니 명품 선글라스처럼 보여 내심 감탄하게 했다.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도시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끝에 위니의 흥미를 끌 만한 곳을 전부 둘러볼 수 있었다.
위니도 어느 정도 만족을 했는지, 더는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고 똑바로 방향을 알려주었다.
****
위니가 알려준 방향을 따라 이동한 지 벌써 2시간이나 지났다. )
고속도로까지 이용했는데도 아직 위니가 가리키는 방향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엘디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흐음. 생명의 문양은 생각보다 굉장히 먼 곳에 있나 보군요."
“그러게요. 저도 가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다시 한번 위니를 바라보며 물었다.
"위니야. 이쪽이 맞아?"
-끄덕끄덕.
위니는 내 물음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씩 드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애써 짓누르며, 계속 위니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차를 운전했다.
그러기를 30분.
-......!
위니가 가리키는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빠르게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대충 짐작으로 위치를 추측하기 시작했다.
지역은 경상북도.
내비게이션에는 온통 산악 지형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기다림에 지쳤던 엘프들도 목적지에 가까워져 가는 분위기에 창밖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주변의 풍경은 점점 산이 많아졌고, 차량은 어느새 거친 길을 달리고 있었다.
-......!!
상의 주머니를 빠져나온 위니는 흥분한 표정으로 내 옷을 잡아당겼다. 아마 생명의 문양이 있다는 곳 바로 코앞에 도착한 듯했다.
고대하던 생명의 문양이 있을지 모르는 곳에 도착했지만, 내 얼굴에서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긴장과 난감한 기색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일단은 최대한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곳까지 차를 움직였다.
근처에 보이는 오래된 표지판에는 태백산 국립공원을 안내하는 글귀들이 적혀 있었다.
인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길을 따르다가, 눈앞에 군복을 입은 몇몇 사람들이 나타나 차를 막아섰다.
그리 유쾌하지 못한 분위기에 위니는 다시 내 주머니 속으로 숨어들었고, 엘프들 역시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간부로 보이는 군인 한 명이 운전석으로 다가와 손짓으로 창문을 내릴 것을 요구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자 소위 계급장을 단 남자 군인이 차량 내부를 슬쩍 둘러봤다.
“이 앞은 통제구역인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통제구역인 줄 모르고 찾아왔습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길을 잘못 드신 겁니까?"
"아뇨. 그건 아닌데…..."
내가 어정쩡하게 대답을 하자 군인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죄송한데 운전자분 잠시 하차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옆좌석과 뒷좌석의 엘프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내고, 천천히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려섰다.
"신분증 좀 제시해 주시죠. 간단한 확인 절차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지갑에서 신분증을 건넸다.
그리고 각성자임을 나타내는 신분증도 추가로 건넸다.
군인은 내가 각성자라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은 듯 대꾸했다.
"각성자셨군요. 혹시 길드에서 나오셨습니까? 가끔 허가를 받지 않고 무작정 찾아오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소속이 있으시면 알려주시겠습니까?"
군인의 요청에 나는 추가로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들었다.
길드에서 만든 내 길드장 명함이었다.
명함을 받아든 군인은 눈동자를 크게 뜨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길드장님이십니까?"
“네. 생긴 지 얼마 안 된 길드기는
하지만.…..”
명함을 살피던 군인은 뒤쪽에 대기하던 병사 한 명을 불렀다.
“박 상병! 잠깐 이리 와봐."
“부르셨습니까. 소대장님.”
소위는 불러온 상병에게 명함을 보여주면서, 속삭이듯 대화를 주고받더니 다시 상병을 물리고 내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세진 길드장님. 제가 견식이 짧아 몰라봤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모르실 수도 있죠.”
그는 처음보다 훨씬 정해진 어투로 변해 있었다.
“그런데 길드장님이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사전 답사라도 오신 것인지."
"죄송한데. 이곳 통제구역에는 뭐가 있는 겁니까?"
“네?! 그것도 모르고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
소위의 믿을 수 없다는 반응에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제야 내 말이 진실임을 깨달은 그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쪽 경계 구역에는 태백산 미궁이 있습니다. 상부의 허가 없이는 민간인은 물론 각성자도 출입이 불가합니다."
"아…… 태백산 미궁…...”
나는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산 쪽을 바라보며 표정을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