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13화
70. 씨앗의 변화(1)
엘프들이 찾아오고 꽤 많은 시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던 엘프들과의 일상도, 이제는 아주 익숙해졌다.
엘프들 사이에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뭐니 뭐니 해도.…..
“이제 일을 하는 엘프들에게 약간의 월급을 지급할 거야."
"월급…… 말입니까?"
“그래. 많은 금액은 아니더라도. 각자의 월급으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도록 해줄 생각이야. 물론 경비대 일을 맡은 엘프들도 모두 포함이야.”
내 의견을 들은 엘프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피렌느는 뭔가 흥미를 느꼈는지 빙긋 미소를 지었고, 시르엘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엘디르는.
"안 됩니다."
당연하게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이미 어느 정도 그의 성향을 경험해 봤기에 충분히 예상 가능한 반대였다.
“그들은 죄를 짓고 노동을 하는 겁니다. 저 엘프들이 세진 님께 무슨 짓을 했는지 잊으셨습니까?"
“그렇긴 한데. 이미 지난 일이고. 솔직히 내 생각에는 벌이 너무 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별로 과하지 않습니다.”
'40년 동안 억지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게 별로 과하지 않다니.'
엘프들의 확정된 처벌 기간은 40년.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 처벌이 끝나는 것을 못 볼지도 몰랐다.
거기다 그들이 나와 일행에게 안 좋은 일을 하려고 했던 것은 맞지만, 지금은 경비대원과 더불어 내게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약간의 월급을 지급해 보답하고 싶었다.
월급을 지급하더라도, 그들이 만들어주는 경제적 이득에 비하면 그리 큰 금액도 아니었다.
엘디르의 반대가 좀 심했지만, 결국에는 강제 노역 중인 엘프들과 경비대원에게 월급이 지급되기 시작했다.
내가 만든 가짜 화폐로 엘프들에게 월급을 지급하고. 엘프들이 받은 월급으로 물건을 요청하면, 중간에 피렌느가 정리해서 대신 주문해 주는 시스템.
처음에는 나에게서 받은 월급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사용에 소극적이었는데.
이쪽 일에 가장 관심이 많던 피렌느의 활약으로, 엘프들은 점점 월급 사용에 익숙해졌다. 초창기에는 과자나 음료, 간단한 즉석 음식같이 먹는 것에
집중됐었는데.
시간이 지나자 의류나 취미 쪽 상품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엘프들의 의상이 아닌 현대인의 옷차림을 한 엘프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피렌느는 이런 변화에 맞춰 빠르게 한국어와 현대 지식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연우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배워 모아둔 월급으로 오연우에게 중고 노트북을 하나 구매 하더니, 지금은 나에게 엘프들의 주문 내역을 컴퓨터 문서로 보내는 경지에 도달했다.
시르엘은 나에게 받은 월급을 대부분 이엘과 아이들에게 사용했다. 맛있는 간식을 사거나, 장난감을 선물했고, 때때로 아주머니에게 음식을 배워, 직접 요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가장 독특한 행동을 보인 것은 누가 뭐래도 엘디르였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배운 엘프주 만드는 비법으로 엘프주를 만들더니, 엘프들에게 그 엘프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디르는 대가로 내가 월급으로 준 돈을 회수해서 나에게 다시 전달했다.
엘프들에게 월급을 나눠준 것에 대한 그 나름대로 반항이었다.
내가 필요 없다고 끝까지 거절하자 결국에는 엘디르가 그 모든 돈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이렇게 이곳에서 최초로 행해진 상행위로 엘디르는 엘프 중에 가장 부자가 되었다.
***
"하아…… 오늘도 수확은 없는 건가.”
나는 생명의 샘을 살피다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내 나름대로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 꽤 오랫동안 애를 쓰고 있지만, 아직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
'방법은 역시 세계수의 정령이 말했던 생명의 문양밖에 없는 건가?'
나는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생명의 샘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곳을 빠져 나왔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무 정령님."
-아직 해결책은 찾지 못한 것이냐?
“네. 부끄럽게도……”
-흐음. 저번에 묻어둔 세계수의 씨앗에서는 아무런 소식도 없느냐?
“일단 시르엘 님과 제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데. 아직 눈에 띌만한 변화는 없습니다.”
-알겠다. 오늘도 수고했다.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나무 정령에게 인사를 하고 숲을 빠져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호숫가에서 낚시하는 엘프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엘프들도 나를 발견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세진 님."
"안녕하세요.”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엘프들. 나도 웃으며 그 인사에 답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쉬시는 날인가 봐요?"
“네. 모두 세진 님 덕분에 이렇게 쉴 수 있는 거죠."
"감사합니다. 세진 님."
“아뇨. 제가 뭘… 그럼 휴일 잘 보내세요."
내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찬양하는 엘프들의 모습에, 나는 인사를 남기고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엘프들은 떠나가는 나를 향해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월급을 주고, 각자에게 휴일을 준 일 때문에 엘프들 사이에서의 내 위상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강제 노역하는 엘프들은 물론이고,
경비대원들 사이에서도 나에 대해 엄청나게 긍정적으로 평가를 했다.
심지어 몇몇 엘프는 나를 엘프 마을의 장로로 임명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였다.
물론 나를 좋게 평가해 주는 것은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큰일을 한 것도 아니라서 부담스러운 마음이 더 컸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주변에 있던 경비대원이 내게 말을 걸었다.
"아! 세진 님. 이제 오시는 건가요?"
“네. 나무 정령님에게 잠시 다녀왔습니다. 시계 새로 사셨나 보네요. 멋있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모두 세진 님 덕분이죠."
내가 경비대원의 새로 산 시계를 칭찬하자 기분 좋은 듯 웃었다.
요즘 엘프 경비대 사이에서는 저렇게 시계를 구매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집에서 시르엘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마 세계수의 씨앗과 관련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요? 알겠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경비대원은 초창기 때와는 다르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떠나갔다.
나는 씨앗의 소식에 설렘을 가지고 집 안으로 향했다.
-덜컥!
현관문을 열었는데도 집 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보통 같았으면 아이들이 반갑게 마중을 나와야 하는데.
이상함을 느끼며 안쪽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 노트북에 집중한 피렌느의 모습이 보였다.
“피렌느?"
"아! 세진 님 오셨어요?"
“아이들이랑 시르엘은 어디 갔어요?"
“아마 2층에 있을 거예요. 근데 아까부터 아주 조용하네요."
이제 나는 이곳에 있는 엘프들에게
존칭을 붙이지 않았다.
나는 상관없었는데 엘프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그냥 이름만 부르게 되었다.
“피렌느는 뭐 하고 있었어요?”
"아. 문서 작성하는 걸 연습하고 있었는데, 잘 안 되네요."
그녀는 내가 봐도 복잡한 문서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날이 갈수록 현대인과 비슷해지는 피렌느의 모습에 약간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복잡한 문제로 끙끙 앓고 있는 그녀를 응원해 준 뒤, 2층으로 올라갔다.
-똑, 똑, 똑.
-스으윽.
나는 내 방에 노크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방 안 침대에는 낮잠을 자는 아이들과 그 곁을 지키는 시르엘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이 깨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말했다.
"오셨어요?"
“네. 아이들은.….."
“이제 방금 잠들었어요."
나는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깨어 있을 때도 귀엽고 예쁜 아이들이지만, 자고 있을 때는 정말 아기 천사처럼 사랑스러웠다.
시르엘도 비슷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염없이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던 우리는 잠시 후,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왔다.
“시르엘, 세계수의 씨앗 때문에 저를 찾았다고.”
"맞아요. 오늘 제가 확인했는데 금방 꽃이 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꽃이요?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켜보던 경비대원들 말로는 하룻밤 사이에 생겨났다고 했어요."
"흐음. 그럼 지금 당장 가보죠.”
“아! 그러고 보니 씨앗을 보러갈 때, 엘디르 경비대장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했어요.”
"엘디르 경비대장은 지금 어디에?"
“아까 진혁 님이랑 같이 나갔었어요.”
"아……”
시르엘의 말에 나는 엘디르가 있는 곳을 대충 짐작했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곧장 모렛의 맥주 창고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임진혁, 엘디르, 모렛.
이렇게 셋이 모여서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후모! 후모!"
"오. 왔냐?"
가장 먼저 나를 발견한 모렛이 반갑게 나를 향해 뛰어왔고, 뒤이어 임진혁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모렛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을 때, 엘디르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오셨습니까? 세진 님."
"또 셋이서 술 만들고 있었어요?"
“네. 엘프주 만드는 법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있었습니다."
무뚝뚝하고 항상 냉정한 표정의 엘디르는 의외로 임진혁, 모렛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엘디르가 엘프주를 만들기 시작하고.
임진혁과 모렛이 그 엘프에 관심을 가지더니, 어느새 셋이 붙어 다니기 시작했다.
특히 임진혁과 엘디르는 서로 말도 통하지 않는데도 꽤 서로를 친근하게 대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가끔 조용한 곳에서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도 한다고 하니. 생각한 것 이상으로 친분을 쌓은 것 같았다.
"엘디르, 지금 시르엘과 씨앗을 살펴보러 갈 건데. 같이 가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엘디르는 씨앗 이야기에 눈동자를 빛내더니 내게 잠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암진혁과 모렛에게 뭔가를
알려준 뒤 우리에게 합류했다.
세계수의 씨앗이 묻혀 있는 집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이곳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원과 마주했다.
"오셨습니까? 세진 님."
“수고가 많으시네요.”
우리는 경비대원 인사를 받으며, 그들과 함께 씨앗이 묻혀 있는 마당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아까 시르엘이 설명했던 대로, 아직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은 꽃 하나가 피어 있었다.
외관은 평범한 꽃들과 다름없었지만, 쉽게 다가설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주변에 흘렀다.
"시르엘?"
"......"
내 부름에 시르엘이 조심스럽게 꽃을 향해 다가섰다.
무릎을 굽혀 꽃에 최대한 가까이 다가간 그녀는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꽃을 감쌌다.
한동안 꽃과 교감을 하던 시르엘은 다시 기운을 거두고 천천히 눈을 떴다.
“다행히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안심한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응?"
"왜 그러십니까? 세진 님."
“엘디르, 방금 무슨 소리 안 들렸어요?"
“저는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내 물음에 다른 경비대원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
다시 한번 귓가를 간질이는 속삭임.
나는 마당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꽃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확신을 얻은 나는 성큼성큼 꽃을 향해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엘프들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누구도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나는 천천히 꽃망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 손끝에 여린 꽃망울이 닿자 뭔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르르륵!
닫혀 있던 꽃망울이 점점 꽃잎을 피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꽃 한송이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움찔 움찔.
-쏙!
그 꽃잎들 사이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