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09화 (209/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9화

68. 세계수의 씨앗(3)

엘프 마을의 방문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떠나 있는 동안 신경 써주지 못했던 퓨이나 세이와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길드에 출근해 밀려 있던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특별한 일을 생각하기 힘든, 평범한 일상의 연속․

그렇다고 해서 변화된 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르신은 나무 그늘 밑 평상에 앉아, 살랑살랑 부채질하며 약초밭을 지켜봤다. 정확히는 약초밭에서 일하고 있는 엘프들을 살피는 중이었다.

“허허. 저 귀가 큰 사람들이 밭일 하나는 기가 막히네. 아주 완벽히 타고난 모양이야."

어르신의 감탄에 옆에 있던 아저씨도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확실히 저 엘프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은 중간에 농땡이도 안 부리고 정말 열심히 일하네요.”

신기하게 엘프를 바라보던 아저씨는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진아. 그러니까 저 엘프들이 너한테 실수를 저질러서 이렇게 일을 도와주는 거라고 했지?"

“네. 일종의 형벌이라고 할 수 있죠. 강제노역이나 다름없으니.”

“그럼 얼마나 네 밑에서 일해야 하는 거냐?"

"으음…… 아직 확실히 정해진 건 아닌데. 30년 정도라고……”

"30년?!"

"허허. 그것참."

내 대답에 아저씨는 깜짝 놀라  리를 질렀고, 어르신은 허허로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아저씨는 살짝 부러운 눈초리로 말했다.

"와아. 세진아. 너는 이제 약초밭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저렇게 일 잘하는 사람들을 30년 동안이나 부릴 수 있다니."

아저씨가 부러움을 표하자 나는 애매하게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15명의 엘프가 온 뒤로 편해진 일들이 대단히 많았다.

약초밭을 관리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수확한 약초들을 손질하는 일, 숲을 뒤져 약초를 찾아오는 일, 심지어 낚시도 잘해서 호수에서 물고 기도 곧잘 잡아왔다.

그들은 나에게 큰 반감을 품고 있을 줄 알았는데, 대부분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잘 수행해냈다.

아니, 오히려 내 말을 더 성실하게 수행하려 노력했다.

이런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시르엘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줬다.

- 이미 죄를 지은 상황에서 더 소란을 부리게 되면 마을에 있는 자신의 가족들이 곤란해져요. 저들의 처지에서는 최대한 세진 님의 말을 잘 따르는 수밖에 없죠.

한마디로 강제노역 엘프들은 마을에서 헤어진 가족이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이었다.

'보면 볼수록 정말 잔인한 형벌이네...'

물론 나와 가족들에게 해를 끼치려 한 녀석들이지만, 약간의 동정심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르신 그리고 아저씨와 평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강제노역 엘프들을 지켜보고 있던 남자 경비대원 중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세진 님, 지시하셨던 약초밭 일을 다 끝냈습니다.”

"아. 수고하셨어요. 이제 좀 쉬세요.”

“더 시키실 일은 없으십니까?"

“정말 없어요. 경비대분들도 수고하셨으니 잠시 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그는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약초밭 쪽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하고 있던 엘프들을 통제해, 우리와 멀리 떨어진 나무 그늘로 데려가 휴식을 취했다.

"쩝......"

경비대원들이 강제노역하는 엘프들을 통제해 주는 건 굉장히 좋았는데. 너무 딱딱하게 그들을 통제시키는 바람에, 마치 내가 진짜 노예를 부리고 있는 듯한 찝찝함이 들었다.

'사실 노예나 다름없나?'

이런 마음의 거부감 때문인지, 최대한 그들을 부리는데 선을 지키려 노력했다. 예를 들면 하루 노동 시간을 정해 놓는다든지, 일주일에 하루 휴일을 제공해 준다든지.

현대인의 생각에서는 당연한 것들이지만, 엘프들은 아니었다.

경비대원들은 죄인들의 편의를 봐 줄 필요가 없다며, 더 빡빡하게 그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완고한 경비대원들을 달래며, 권한은 내게 있으니 내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부탁했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내 말을 따라야 했다.

나중에 피렌느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조치들 때문에 엘프들 사이에서 내 모습은, 죄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푸는 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보였다고 했다.

뭐…….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악덕 노예 주인보다는 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보이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엘프들이 휴식을 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주머니와 피렌느가 새참을 가지고 올라왔다.

아주머니는 일을 끝내고 쉬는 엘프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어머! 벌써 일 다 끝난 거예요? 새참 가지고 올라왔는데."

“네, 방금 끝났어요. 짐 주세요."

나는 무거운 짐을 받아들며 대답했다.

아주머니는 짐이 아주 무거웠는지, 나무 평상에 걸터앉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에구구. 입이 많다 보니까 새참 준비하는 것도 힘드네. 옆에서 피렌느가 안 도와줬으면 큰일 날 뻔했어, 피렌느 고마워!"

"헤헤.”

피렌느는 한국어지만, 자신의 이름과 짧은 '고마워'를 알아듣고 쑥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피렌느와 함께 가져온 새참을 엘프들에게 나눠줬다.

오늘의 메뉴는 샌드위치와 시원한 레모네이드였 다.

약초밭에서 일한 엘프들과 경비대원들은 익숙하게 새참을 받아들었다.

처음 아주머니가 새참을 가져왔을 때, 충격을 받았던 엘프들의 모습이 벌써 옛날 일이 돼버렸다.

"감사합니다. 세진 님."

"잘 먹겠습니다. 저분에게도 대신 인사 전해주십시오."

나는 아주머니의 감사 인사까지 대신 들으면서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다.

아저씨는 벌써 샌드위치 하나를 다 드셨는지 빈손으로 내게 물었다.

“샌드위치 엄청 맛있네. 세진아. 남는 거 하나 더 없냐?"

“당신은 그만 먹어요. 평상에서 빈둥빈둥 놀고선, 새참을 얼마나 더 먹으려고 그래요."

“허허. 맞는 말이구나."

아저씨는 괜히 말을 꺼냈다가 아주머니에게 구박을 받았고, 어르신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남은 샌드위치와 레모네이드를 꺼내 피렌느에게 전해주려는데.

갑자기 그녀가 뭔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세진 님, 까먹고 있었는데. 시르엘 님이 바쁘지 않으시면 먼저 내려와 달라고 하셨어요."

"지금요?"

“네. 세계수의 씨앗에 관련된 이야기라고 하시던데.”

"드디어 준비가 끝났나 보네요.”

나는 내 몫의 샌드위치를 아저씨에게 전해주고, 뒤를 부탁한다는 인사를 남긴 채 먼저 약초밭을 떠났다.

등 뒤로 '나를 생각해 주는 건 세진이밖에 없다'는 아저씨의 넋두리와 '왜 세진이 것을 뺏어 먹냐’는 아주머니의 구박이 들려왔다.

통나무 집으로 내려오니 시르엘과 7명의 경비대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헉. 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뇨. 저희도 금방 나왔어요.”

시르엘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가지고 있던 묵직한 주머니를 내게 건넸다.

받아든 주머니 열자 기분좋은 흙 냄새가 올라왔다. 주머니 안에는 촉촉한 흙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 주머니에 담긴 것은 평범한 흙이 아니었다.

세계수의 씨앗을 심기 위해, 나무 정령이 며칠 동안 준비한 아주 특별한 흙이었다.

“세진 님. 바로 씨앗을 심으실 생각이시죠?"

“네. 지금 당장 가죠."

내가 씨앗을 심는다는 말에 경비대장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저희도 함께하겠습니다."

"엘디르 님도 가시게요? 별일 아닌데…"

“세계수의 씨앗을 지키는 것도 저희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입니다.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경비대장 엘디르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의 임무를 주장했다. 이 앞뒤 꽉 막힌 엘프를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에, 나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그럼 따라오세요."

경비대장 엘디르를 포함한 7명의 엘프가 우르르 나와 시르엘을 호위하듯 몰려들었다.

나는 뭔가를 말하려다 포기하고, 세계수의 씨앗을 심으러 가기 위해 균열 입구를 열었다.

엘프들과 함께 균열 입구를 통과해 앞마당

도착한 곳은 현실 세계의 집이었다.

'생명의 문양'을 찾기 위해 이곳에

씨앗을 심을 생각이었다.

한편, 처음으로 이쪽 세상을 구경한 엘프들은 잔뜩 경계하며 주변을 살폈다.

엘디르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세진 님. 공기가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누군가 근처에 독을 뿌린 것 같습니다."

"여긴 원래 이래요. 오늘은 공기가

좀 많이 안 좋기는 하네요."

"......?!"

도심의 텁텁한 공기를 처음 맛본 엘프들은 원래 이렇다는 말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런 환경 속에 산다는 이야기를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항상 맑은 공기의 숲속에서 지내면 그럴 만도 하지.'

나는 충격에 빠진 엘프들을 내버려 두고 마당 구석으로 향했다.

미리 생각해뒀던 자리에 땅을 파내고, 나무 정령에게 받았던 촉촉한 흙을 채웠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세계수의 씨앗을 집어넣었다.

조심스럽게 흙을 덮은 뒤, 호수에서 가져온 맑은 물을 흙 위에 골고루 뿌려주었다.

“시르엘 님. 이렇게 하면 되는 거죠?"

“잠시만 물러서 주세요."

시르엘은 나를 물러서게 한 뒤.

씨앗이 심어진 곳 앞에 무릎을 꿇고 흙 위에 두 손을 올렸다. 그녀는 두 눈을 감고 차분한 표정으로 손끝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의 품안처럼 포근하고 따스한 기운이 점점 흙 쪽으로 스며들어 갔다.

더는 그 편안한 기운을 느낄 수 없어 아쉬워지려 할 때, 시르엘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 짧은 사이에 피로가 깃들어 있었다.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하아, 씨앗은 괜찮은 것 같아요. 제가 앞으로 매일 한 번씩 들러서 상태를 확인해 볼게요."

“아…… 저는 시르엘 님이 괜찮은 지 물어본 건데……”

그녀는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다시 대답했다.

“저도 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이만 돌아가죠."

약간 어색해진 분위기에 나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시르엘도 아직 얼굴이 붉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뒤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엘디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제는 경비대가 이곳을 지키고 있을 테니, 두 분은 돌아가셔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네? 경비대분들도 같이 돌아갈 건데요?"

"그럼 세계수의 씨앗은 누가 지킵니까?"

“그냥 두는 거죠."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씨앗을 그냥 둔다는 이야기에 엘디르는 강력히 반발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누가 씨앗을 훔쳐서 달아나면 어쩌려고."

“.......”

'대문 앞에 택배가 놓여 있어도 안 훔쳐 가는 곳인데, 마당 구석에 심어진 씨앗을 훔치는 사람이 있을 리가……'

나는 경비대장에게 이곳의 상황을 설명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그에게는 하나도 먹히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 이러고 계시면 더 주의를 끌게 된다니까요."

“그래도 절대 씨앗을 남겨두고 떠날 수는 없습니다.”

"하아… 계속 이러시면 엘프 마을에 연락해서 다 돌려보내 버릴 거예요."

“.......”

내가 돌려보낸다고 협박을 하자, 그제야 움찔하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잠시 고민을 하던 경비대장은 갑자기 칼을 꺼내더니 자신의 목에 가져갔다.

"그럼 제가 죽어 영혼이 돼서라도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으아악!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세진 님께서 이곳에 있는 걸 허락해 주시지 않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하아아……. 알았으니까. 일단 칼 내려놓으세요."

나는 경비대장과 입씨름 끝에 경비 대원 3명씩, 마당이 잘 보이는 집 안에서 매일 씨앗을 지키는 것을 허락했다.

경비대장은 이것도 불만인 듯한 표정이었지만, 다행히 다시 칼을 꺼내

드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