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8화
68. 세계수의 씨앗(2)
전혀 뜻밖의 경비대장의 행동에 칼도르는 물론 그를 따르는 엘프들까지 모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경비대장. 이게 무슨 짓인가?"
“내 임무는 마을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를 처리하는 것이다. 당연히 장로의 신분이라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이익! 내가 한 말을 못 들었는가? 마을에서 소란을 피운 자들은 저 외부인들이라니까!"
악을 쓰는 칼도르의 행동에도 경비 대장의 냉정한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경비대원들은 점점 칼도르와 그 일당들을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경비대가 나타난 뒤쪽에서 루나르엘과 엘프 장로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포기하세요. 칼도르 장로. 이미 당신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이게 도대체……”
“칼도르 장로. 실수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결국에는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지르고 말았군요. 당신이 마을에서 벌인 행동은 경비대는 물론 장로회의 모든 일원이 지켜봤습니다.”
"으으...... "
칼도르는 루나르엘과 엘프 장로들을 바라보며, 그의 일그러진 얼굴은 치욕과 분노로 물들었다.
“경비대장, 칼도르 장로의 계획에 가담한 모든 엘프를 잡아들이세요. 그리고 칼도르 장로는 다음 장로회의가 있을 때까지 자택에 구금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루나르엘 님.”
그녀의 명령대로 경비대장은 칼도르 장로와 일당들을 구속하기 시작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들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경비대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애초에 이미 꽤 많은 숫자가 임진혁의 손에 의해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였으니, 반항할 여력이 없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내가 아까 말한 대로, 임진혁의 절묘한 힘 조절 때문에 큰 부상자는 없다는 점이었다.
경비대원들이 일당들을 잡아들이는 사이.
루나르엘과 엘프 장로들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그녀는 면목이 없다는 듯 내게 고개를 숙였다.
뒤에 엘프 장로들도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죄의 뜻을 밝히는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뭐. 딱히 피해당한 것도 없고, 다친 건 오히려 저쪽이라 상관없긴 한데. 루나르엘 님은 혹시 미리 알고 계셨나요?"
"알고 있었다기보다는 칼도르 장로의 행동을 예상했어요. 평소 그의 생각과 행동이라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뻔했으니까요."
먼저 예상하였다는 그녀의 말에 나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마치 우리 일행을 미끼로 사용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루나르엘은 내 표정에서 그 사실을 바로 인지했는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해서 장로의 신분인 칼도르를 미리 막을 수는 없었어요.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미리 경비대장에게 귀띔을 해주는 것 정도였으니까요.”
"흐음."
“저로서는 세진 님 일행이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최대한 마을을 빨리 떠나게 해드리는 것이 최선이었어요. 하지만 그것 때문에 오히려 칼도르 장로가 성급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네요."
약간 구차한 변명같이 들렸지만.
딱히 그녀의 말에 트집을 잡지는 않았다.
나쁜 짓을 한 것은 칼도르 장로였고, 루나르엘은 그녀 나름대로 우리의 안전을 생각했던 것 같으니까.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와중에,
경비대원들이 칼도르 장로와 그 일당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반 이상은 임진혁에 의해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세진, 나 피곤해. 자고 싶어."
"으응. 알았어.”
나는 피곤해하는 티아와 이엘을 잠시 달래줬다.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풀어서 그런지 후련한 표정의 임진혁과 아직 불안한 표정의 오연우가 슬쩍 내게 눈치를 보냈다.
아마 둘은 이대로 마을을 떠나고 싶은 것 같았다.
시르엘과 루나르엘은 내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였다.
"하아..…. 일단 집으로 돌아가죠. 아이들도 피곤한 것 같으니."
내가 말하는 집은 루나르엘의 집을 뜻했고, 내 말을 들은 일행은 제각각의 감정을 드러냈다.
루나르엘과 시르엘은 안도했고.
임진혁과 오연우는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딱히 다른 말은 꺼내지 않고 묵묵히 나를 따랐다.
그렇게 큰 사건과 함께 엘프 마을 에서 두 번째 밤이 지나갔다.
***
다음 날 아침.
원래는 일찍 마을에서 떠날 생각이었는데, 루나르엘과 시르엘이 조금만 더 마을에 머물러 달라 부탁했다.
“세진 님. 곧 장로회에서 결정이 내려질 거에요.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근데 장로회에서 무슨 결정이 내려지든, 저랑은 별로 상관이 없지 않나요?"
"아뇨. 세진 님에게도 절대 나쁜 일은 아닐 거예요."
"으음. 알겠습니다."
간절한 그들의 부탁에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일은 잠시 미뤄 뒀다.
아이들과 나머지 일행도 조금 더 머무르는 것에 대해서는 딱히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아침부터 점심시간이 지날 때까지, 우리는 조용히 루나르엘의 집에서 기다렸다. 어제의 사건으로 마을을 돌아다닌 것은 되도록 자제했다.
약간은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고.
드디어 기다리던 장로회의 결정이 내려졌다.
먼저 어제의 소동을 일으킨 칼도르는 장로의 직위를 박탈당했으며, 마을의 대소사에 영원히 관여할 수 없다는 처벌이 내려졌다.
그리고 칼도르를 따른 카셀르를 포함한 엘프들은 강제 노역형을 선고 받았다.
우리로서는 굉장히 솜방망이 처벌처럼 느껴졌는데 시르엘의 설명을 들으니 생각이 달라졌다.
“엘프 마을에서는 범죄가 잘 일어나지 않아요. 그래서 처벌로 인한 고통보다, 범죄로 처벌받았다는 낙인이 더 큰 고통이거든요. 저들은 평생 마을 사람들에게 범죄자라며 손가락질당할 거예요. 어쩌면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그녀의 설명을 들은 일행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 크지 않은 마을에서 범죄자로 낙인이 찍힌다면, 제대로 생활하기도 힘들겠지.'
그렇게 어제의 문제에 대해 잘 넘어가나 싶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어...... 그러니까. 저들의 강제 노역에 대한 권한을 저에게 맡기신다고요?"
“네. 저들이 세진 님에게 폐를 끼쳤으니, 당연히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죠."
내가 당황하며 질문을 하자, 루나르엘은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러려고 나를 남으라고 한 건가?'
내가 난처해하는 표정을 짓자 루나르엘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세진 님은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이미 죄인들을 관리할 경비대원들과 장로 1명을 정해놨어요. 관리는 모두 그들이 할 테니, 세진 님은 편하 게 그들을 사용하시면 된답니다.”
"으음. 그럼 얼마나 제가 저들을 데리고 있어야 하죠?"
“아직 기간은 정확히 정해지지는 않았는데. 최소 30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더 늘어날 수도 있고요.”
“30년……”
30년이라는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강제 노역이라길래 한 1, 2년 정도를 생각했는데, 내 예상보다 터무니 없이 길었다.
어제 우리를 공격했던 엘프들에게 살짝 동정심이 생겨날 정도였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일행들 역시 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나쁜 짓을 하기는 했는데. 세진이 형, 30년은 너무 긴 것 같지 않아요?"
“……”
오연우도 살짝 우려를 표했고, 임진혁 역시 찜찜한 표정으로 침묵을 유지했다.
강제노역형에 처해진 엘프는 총 15명.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기 위한 경비 대원이 10명.
경비대원들 사이에는 무려 어제 봤던 경비대장도 포함돼 있었고, 넬모란 장로가 주기적으로 방문해 그들을 관리할 계획이라고 한다.
내 처지로는 조금 과해 보이는 계획이었다.
“겨우 15명 관리하는데 경비대원이 10명이나 필요하나요? 거기다 경비대장님도 따라오신다니……”
“세진 님, 그건 단순히 죄인들의 관리를 위한 건 아니에요.”
"......?"
“가지고 계신 세계수의 씨앗, 저 경비대원들은 세진 님이 그 씨앗을
잘 관리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거에요."
"아……”
“그 세계수의 씨앗은 저희에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루나르엘의 말은 이해가 되지만, 부담이 안 될 수 없는 상황이긴 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대신 문제가 생기면 저들은 곧바로 돌려보낼 겁니다.”
"물론이죠. 혹시 마음에 안 드는 점이 있으면 경비대장에게 말씀하세요. 바로 처리해 줄 거예요."
"......"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나에게는 굉장히 섬뜩하게 들렸다.
혼란스러웠던 상황이 정리되고.
이제는 정말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같이 돌아가기로 했던 시르엘과 피렌느는 물론이고, 강제노역을 위한 15명의 죄인과 10명의 경비대원도 각자의 짐을 가지고 합류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하게 늘어난 일행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떠난다는 소식에 마을의 모든 엘프가 배웅을 나왔다.
첫 만남과는 다르게 또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모두 환한 미소를 지었다.
몇몇 엘프들은 굉장히 슬픈 얼굴을 했는데, 알고 보니 나를 따라가는 죄인들의 가족들이었다.
눈물로 가족과 이별하는 모습에 왠지 내가 나쁜 놈이 된 것 같아 애써 외면했다.
루나르엘이 다가와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세진 님. 또 마을에 방문해 주세요. 그때는 더 환영해 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조만간 또 오겠습니다.”
그녀는 다른 일행들과도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마지막으로 이엘에게 다가갔다.
“이엘, 또 놀러 오려무나. 그리고 아르엘에게 내 안부와 마을의 이야기도 전해주고.”
“네. 그렇게 할게요."
“그래, 고맙구나. 세진 님 말씀 잘 듣고, 항상 건강해야 한다."
루나르엘은 물기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마지막으로 이엘을 꼭 끌어안았다.
이엘도 눈을 감고 그녀의 품에 편안히 안겨들었다.
이엘과 루나르엘의 작별 인사를 끝으로, 우리는 정말로 떠나기 위해 미리 만들어 두었던 균열의 입구를 생성했다.
“조심히 가세요."
"안녕! 또 놀러와!"
우리는 엘프들의 배웅을 받으며 차례로 균열 입구를 통과했다.
***
입구를 통과하자 금방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숲 사이로 평화로운 통나무 집의 모습 보이자 자연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나와 일행들이 마당으로 들어서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 덜컥!
"퓨이!!!"
가장 먼저 퓨이가 달려나와 내 품에 안겼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게 서러웠는지 계속 울음소리를 냈다.
"하하. 퓨이야. 잘 지냈어?"
"퓨이! 퓨이!"
퓨이의 평소와 다름없어 보이는 모습에 웃음 짓고 있을 때.
현관문으로 아저씨, 아주머니와 모렛, 세이가 뒤따라 나왔다.
아저씨는 반갑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해 줬다.
“오오. 왔네. 왔어. 갑자기 퓨이가 현관문으로 달려나가길래 깜짝 놀랐어. 여행은 재미있었고?"
"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는데, 꽤 재미있었어요. 나중에 사진 보여 드릴게요."
“근데 엘프가 더 늘었는데? 저 엘프들은 전부 뭐냐?"
"으음. 그것도 나중에 설명해 드릴게요. 좀 복잡한 문제가 있어서…….”
나는 엘프들에 관한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모렛과 세이와도 인사를 나눴다.
“너희들도 잘 있었어? 사고는 안 쳤겠지? 나중에 아저씨, 아주머니한테 다 물어볼 거야."
“후모! 후모!"
-......
모렛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지만, 세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내 눈을 피했다.
뻔히 드러나 보이는 녀석의 행동이 귀여워 살짝 쓰다듬어줬다.
“세진아, 피곤하겠다. 어서 들어가자.”
“네. 확실히 집에 도착하니까 피곤한 것 같네요.”
나는 아주머니의 손에 이끌려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엘프 마을에 있을 때와는 다른 편안함을 느끼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집이 최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