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7화
68. 세계수의 씨앗(1)
루나르엘의 집에 몰려왔던 엘프 장로들은 한동안 세계수 씨앗을 살피다 다시 돌아갔다.
그들은 집 문을 나서면서도 마지막까지 내 손에 들려 있는 씨앗에 눈을 떼지 못했다.
루나르엘을 제외한 몰려왔던 나머지 엘프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집 안에는 다시 평온한 분위기가 찾아 왔다.
오연우는 살 것 같다는 표정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아아. 겨우 다 나갔네. 도대체 저 씨앗이 뭐라고……”
"그러게 말이다."
임진혁도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큼 몰려왔던 엘프들의 분위기가 숨 막힐 정도로 광적이었다.
이엘이나 티아도 한결 편안해진 모습으로 변했다.
한편, 남아 있는 엘프 셋은 쉽사리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특히 루나르엘은 아직도 심각한 표정으로 씨앗을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의 여유롭게 친절한 모습과 전혀 달라서,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 하고 있는데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세진 님, 언제 이곳을 떠나실 생각이신가요?"
"어...…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은 안 해뒀는데, 이곳에서 제 볼일은 끝나서 언제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일행분들에게도 그렇게 전해주시고요."
루나르엘은 내 대답은 듣지도 않고 급히 시르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시르엘."
“네. 어머니.”
“너는 세진 님 일행을 따라가거라.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는 인원들과 함께 세진 님을 도와 세계수의 씨앗을 돌봐줘."
“..….알겠습니다."
살짝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임진혁과 오연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세진아. 조금 심각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야?"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루나르엘 님이 최대한 빨리 이곳에서 떠나 달래요."
"흐음. 돌아갈 때는 네 능력으로 돌아갈 생각이지?"
“네.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어요."
이곳에 균열을 창조한 뒤, 그 균열을 타면 손쉽게 엘프 마을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오연우가 슬쩍 말을 꺼냈다.
"형님들? 그…… 오늘 저녁에는 피렌느 님 집으로 초대를 받았는데. 그냥 가실 거에요?"
나와 임진혁의 시선이 동시에 오연우 쪽으로 향하자, 그는 움찔하면서 변명하듯 말을 늘어놨다.
"아니. 초대받아서 꼭 가야 한다는 건 아닌데. 한번 물어본 거예요."
말을 끝낸 오연우는 눈치를 보며 구석에 찌그러졌다.
임진혁은 아무 말 없이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아무래도 나에게 결정을 맡기려 하는 것 같았다.
“그럼 오늘까지는 엘프 마을에서 보내고, 내일 일찍 떠나는 거로 하죠. 괜찮겠죠?"
내 결정에 둘 다 불만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루나르엘 쪽으로 다가가서 방금 결정된 내용을 전해줬다.
내일 일찍 떠나겠다는 말에 루나르엘 역시 크게 반대를 표하지 않았다.
떠날 계획을 세운 일행은 빠르게 짐을 정리했다.
올 때는 간편하게 왔지만, 워낙 선물로 받은 물건들이 많아서 정리가 좀 필요했다.
오래 보관할 수 없는 음식들은 아까워도 두고 가기로 했다.
보관 기간이 길고 귀한 선물들 위주로 짐을 챙겼다.
루나르엘은 금방 또 집을 나섰고, 시르엘과 피렌느만 남아 짐 정리를 도왔다.
일행이 짐을 정리하고 있는 동안. 나와 임진혁은 조심스럽게 집 밖으로 나가, 새롭게 균열을 창조할 장소를 찾아 헤맸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마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우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안내해 주겠다고 친절을 베푸는 엘프들 때문에 몇 번이나 곤란했다.
우리는 적당한 장소를 발견하고. 임진혁이 주변을 경계하는 사이, 나는 곧바로 새롭게 균열을 창조했다.
"끝났어?"
“네. 이제 이곳으로 오면 금방 집으로 귀환할 수 있어요."
"좋아. 다시 돌아가자."
균열 창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나머지 일행들은 이미 짐정리를 깔끔하게 끝내놓고, 피렌느의 집으로 향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으으. 세진, 나 배불러서 못 걷겠어."
"그러게 적당히 먹지 그랬어."
"우우.……”
티아는 너무 과식을 한 바람에 고통을 호소했고,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품에 안아 들었다.
이엘은 안겨 있는 티아가 살짝 부러운지 반대편 쪽으로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이엘의 손을 잡아줬다.
피렌느가 준비한 저녁 식사는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화려하고 대단했다.
맛은 물론이고 여러 가지 생소한 엘프 음식들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었다.
식사를 함께했던 시르엘도 이렇게 준비하기는 힘들다고 인정했으니.
피렌느가 얼마나 정성으로 준비했 는지 알만했다.
나는 역시 포만감으로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시르엘에게 물었다.
“피렌느 님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아마도 그럴 것 같아요. 저는 남아 있어도 괜찮다고 했는데. 본인이 강경하게 같이 떠나겠다고 주장해서……”
방금 식사 자리에서.
내일 우리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피렌느는 자신도 함께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원래는 시르엘만 데리고 갈 생각이었는데, 피렌느의 간절한 부탁에 살짝 고민이 됐다.
하지만 거창한 저녁 식사를 대접받은 자리에서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고.
그녀 역시 내일 귀환하는 일행에
합류하게 되었다.
“어쩌면 피렌느는 처음부터 이러려고 식사에 초대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쩝..….”
함께해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신나게 떠날 준비를 하던 피렌느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약간 귀찮게 할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였기에 그냥 모른 척 넘어 가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루나르엘의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누군가 우리의 앞길을 막아섰다.
빽빽한 숲 사이로 비치는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엘프들.
그들의 얼굴을 확인한 일행은 자연스럽게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긴장감이 흐르고.
시르엘이 나서 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존재에게 말했다.
“칼도르 장로님, 이 밤에 무슨 일이십니까?"
“시르엘,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나?"
칼도르는 시르엘의 말을 무시하며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봤다.
하지만 시르엘은 지지 않고 목소리에 더 힘을 담았다.
"죄송하지만, 이분들은 제가 모시고 온 손님들입니다. 하실 이야기가 있으면 내일 날이 밝으면 찾아와 주세요. 이런 늦은 밤에 일방적인 행동은 예의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르엘, 정말로 저들을 감쌀 생각이냐?"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시르엘이 일행을 이끌고 떠나려는 모습을 보이자, 칼도르를 위시한 엘프들이 우리를 포위하듯 감쌌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적대적인 그들의 행동에 시르엘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그녀의 외침을 들은 엘프 중, 카셀르가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시르엘 님, 죄송합니다. 세계수의 씨앗을 저 인간에게 넘겨줄 수는 없습니다."
“이건 세계수가 세진 님께 전한 씨앗이에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계수가 점점 힘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저 인간이 가진 씨앗만이 우리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시르엘의 마지막 물음에 대한 대답은 칼도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원래의 세계수가 힘을 다한다면, 새로운 세계수를 만들면 되는 법."
“장로님…… 설마 세계수를 버리시겠다는 말이에요?"
“이건 일족의 미래가 달린 문제야. 세계수도 아마 우릴 이해해 줄거 다.”
“장로님!!"
칼도르 장로는 시르엘의 외침을 외면한 채, 이제는 노골적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인간. 어서 세계수의 씨앗을 넘겨라. 씨앗만 넘겨준다면 조용히 이곳에서 떠날 수 있도록 해주겠다."
".......”
“저항하겠다면 억지로라도 뺏어야 겠다. 지켜보는 아이들도 있는데 굳이 험한 꼴을 보여줄 필요 있겠느냐? 어서 씨앗을 넘겨라!"
그의 협박에 시르엘은 다급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세진 님. 여긴 어떻게든 제가 막아볼 테니, 어서 일행들과 함께 도망치세요. 그 능력을 사용하시면 바로......"
"죄송합니다. 시르엘 님. 그건 어렵겠네요."
"......?"
나는 그녀의 말을 끊으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세진아."
“네.”
“2번 참았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 지금도 말리지는 않을 거지?"
“...... 아이들이 견딜 수 있을 만큼만 해주세요."
"큭. 걱정하지 마라. 아이들 눈에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테니."
임진혁은 천천히 우리를 포위한 엘프들을 향해 걸어갔다.
"엘프들은 마음씨도 좋아. 안 그래도 약간 과식한 것 같아서 속이 불편했는데, 이렇게 몸을 움직일 기회도 만들어주고.”
-파아아아앗!!
그의 몸을 중심으로 엄청난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위협용으로 내뿜던 때와는 차원이 다른 위압감이었다.
"으읏!"
“크흑……!”
임진혁이 내뿜는 기운에 휘말린 몇몇 엘프들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이를 악물고 버티던 카셀르는 무기를 꺼내 들고, 힘찬 기합과 함께 임진혁에게 달려들었다.
"하아앗!"
"......"
-팟!!
붉은 기운이 마치 빛처럼 쏘아지더니, 임진혁의 신형이 흐릿해짐과 동시에 카셀르는 볼품없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한방에 나가떨어진 카셀르는 땅바닥에 몸을 눕히고 부들부들 떨었다. 다급해진 칼도르 장로는 인상을 쓰며 소리 질렀다.
"뭣들 하느냐! 어서 놈을 잡아라!"
그의 호통에 정신을 차린 엘프들이 각자의 무기를 가지고 임진혁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프들은 임진혁의 옷깃조차 건들 수 없었다.
붉은 섬광이 터질 때마다 엘프들은 낙엽처럼 휘날리며 떨어져나갔다.
“이익! 저 뒤에 있는 인간을 노려라. 녀석이 세계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임진혁을 둘러싼 엘프들이 그를 붙들고 있는 사이, 나머지 엘프들이 내가 있는 쪽으로 접근해 왔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것을 꺼내놨다.
“쿠모!!!"
순식간에 등장한 모렛 병사들이 나와 일행을 보호하듯 모습을 드러냈다.
모렛 병사들은 등장하자마자 접근한 엘프들을 빠르게 제압해 나갔다.
그리고.
-쿠우웅!!
- 기이이익!
거대한 골렘도 약간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진심을 담아 우리를 노리는
엘프들에게 외쳤다.
“제발 이쪽으로 오지 마세요. 여기는 힘 조절 안 돼서 진짜 큰일 나거든요? 차라리 저기 힘 조절 잘하는 진혁이 형한테 가서 맞으세요."
내 경고가 효과가 있었던지, 아니면 골렘의 위압감에 짓눌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나를 노리던 엘프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전황이 기울기 시작하자 칼도르 장로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때.
“모두 그만! 지금 당장 전투 행위를 멈춰라!"
경비대장의 경고 외침과 함께 경비
대원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경비대원들은 순식간에 우리와 칼도르 장로를 포위하고 전투를 중지시켰다.
하지만 경비대원들 역시 아직까지 험악한 기운을 내뿜는 임진혁이나, 골렘의 거대한 위압감에 많이 긴장한 표정이었다.
경비대장은 곧바로 칼도르 장로를 향해 다가갔다.
칼도르 장로는 다가오는 경비대장을 바라보며 구겨져 있던 표정을 폈다.
“칼도르 장로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오오. 경비대장. 잘 와줬네. 지금 당장 마을에서 소란을 피우는 저자들을 응징해 주게."
경비대장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더니 냉정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칼도르 장로님. 아니…… 칼도르. 마지막으로 묻겠다. 이게 무슨 일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