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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06화 (206/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6화

67. 엘프 마을 그리고 세계수(5)

내 생각을 전부 읽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세계수 정령의 모습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떻게 이엘의 일을 알고 있는 거지?"

- 나에게는 쉬운 일이야. 여기 세계수에 있으면 뿌리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타고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거든. 네가 지내고 있는 호숫가에도 가봤어.

그는 빙글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네가 지내는 곳은 정말 재미있어 보이더라고. 티아도 엄청 즐거워 보였고, 나도 몇 번이나 그곳에서 함께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몰라. 세계수의 힘이 조금만 더 강했더라도.......

아쉬운 표정을 짓는 모습이 살짝 안타까웠지만, 나는 이곳에 온 목적을 다시 상기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떻게 이엘을 살릴 수 있는 거지? 그것부터 말해봐."

-간단해. '생명의 문양'을 찾으면 돼. 그럼 네가 가진 아르키트 왕국의 지식으로 이엘을 살릴 수 있어.

“생명의 문양? 그건 어디서 찾을 수 있는데?"

-나도 몰라.

"뭐?"

-세계수의 힘을 되돌리기 위해 세상 이곳저곳을 뒤져봤는데,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어. 괜히 없는 힘만 낭비하고 말았지.

"......"

가벼운 태도로 대답하는 세계수의 정령이 살짝 얄밉게 느껴졌다.

그래도 내 질문에 거짓으로 대답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세계수의 정령은 이런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 너무 짜증 내지 마.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

-내가 뒤져본 세상은 이쪽 세상을 말한 거야. 하지만 다른 세상에도 꼭 없으리란 보장은 없잖아?

“아…….”

나는 드디어 어렴풋이 세계수 정령이 원하는 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세진. 내가 원하는 바는 간단해. 네가 '생명의 문양'을 찾아 세계수가 가진 힘을 원래대로 돌려줬으면 좋겠어. 물론 공짜로 부탁하지는 않아. 네가 '생명의 문양'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

세계수 정령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두 손에서 푸른 빛이 쏟아져 나왔다.

잠시 후, 신비한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작은 열매 같은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 이건 내 힘을 담은 씨앗이야. 만약에 네가 이 씨앗을 그쪽 세계에 심어준다면, 나도 그쪽에서 생명의 문양을 찾아볼 수 있을 거야.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씨앗을 받아들었다.

굉장히 평범해 보이는데 세계수의 씨앗이라니.

나는 잠시 씨앗을 바라보며 도시 한복판에 빌딩만큼 높게 자라나는 세계수의 모습을 상상했다.

세계수의 정령은 또 내 생각을 읽었는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그렇게까지 안 자랄 거야. 겨우 싹을 틔우기도 벅찰걸? 그쪽은 공기도 별로 안 좋다며.

"어……. 알았어."

- 씨앗은 아무 곳에 심어도 상관없지만, 한동안은 잘 보살펴줘야 할 거야. 많은 힘을 담지 못했거든. 되도록 이엘이나, 시르엘이 살피도록 해줘.

그 뒤로도 나는 세계수 정령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세계수 정령이 질문을 던졌는데, 저쪽 현대 세계에 대한 질문과 통나무집에서의 생활을 굉장히 궁금해 했다.

정말로 어린 엘프처럼 호기심으로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내 대답에 웃음을 짓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했다.

- 아아. 좀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

그는 정말로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발로 땅을 툭툭 찼다.

“잠깐. 마지막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

"혹시 이엘이 원래대로 건강해지면, 예전에 아르엘 님이 그랬던 것처럼, 이곳에 억지로 묶어두려고 하는 건 아니지?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도와줄 수 없어."

경고의 의미를 담은 내 질문에, 세계수 정령은 예상외로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 이엘이 건강해져서 어디서 지낼지는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야. 루나르엘 때도 그랬고, 아르엘 때도 그랬지.

".......”

- 정말이야. 아르엘이 임신한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을 때도, 가장 먼저 도망치라고 한 게 나야. 세계수 걱정은 하지 말고 남편이랑 아이를 데리고 멀리 떠나라고 했었어.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에 살짝 민망해졌다.

-그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 내 실수로 크게 고통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꼭 약속할게. 이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유롭게 살 수 있도록 해줄 테니까, 너도 최선을 다해 생명의 문양을 찾아와.

세계수 정령의 진지한 표정에 나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의식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세진. 꼭 생명의 문양을 찾아서 돌아와야 해. 나중에 봐! 그리고 티아한테 안부 인사 전해줘!

세계수 정령의 작별인사를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완벽하게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

"......"

"......진 ......님?"

"세..... 진님?"

"으으윽!"

나는 귓가에서 들리는 목소리와 얼굴에서 전해지는 편안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처음 눈을 뜨면서 보인 건 빽빽한 나무들이었다.

내가 누워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시선을 돌렸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루나르엘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세진 님. 괜찮으세요?"

"어…… 헉!"

나는 얼굴과 상체에서 느껴지던 편안한 기분의 원인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루나르엘에게 거의 안겨 있다시피 하다가 탈출한 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주변을 살폈다.

주위에는 나와 루나르엘을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안내했던 경비대장과 대원들이 호위하듯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내가 완전히 몸을 일으키자. 다시 한번 루나르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괜찮습니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것뿐이라. 근데 저는 어떻게 발견하신 거죠?"

“세진 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앞쪽에서 환한 빛과 함께 쓰러진 세진 님이 나타났어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겼나 하고 얼마나 걱정했 다고요."

"아……”

잠시 세계수 정령과 만남을 떠올렸다.

잠시 의식을 잃었던 탓인지 그와 만남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별문제는 없었…… 앗!"

"......?"

뭔가를 말하려다가 세계수 정령이 건네줬던 씨앗을 떠올리고 온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의식이 없는 사이 잃어버렸나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씨앗은 주머니 속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어휴. 다행이다.”

“세진 님? 그건 뭐죠?"

“이거요? 세계수 정령이 씨앗이라고 저한테 전해줬습니다."

“세계수의 씨앗?!"

"헉!!"

루나르엘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굉장히 격한 감정의 표현을 하며 놀라워했다.

한결같이 냉담한 표정의 경비대장도 내 이야기를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른 경비대원들도 주변 경계는 까맣게 잊은 채, 나와 세계수 씨앗만 번갈아 쳐다봤다.

'어…… 내가 실수한 건가?'

나는 주변의 너무 격한 반응에 당황스러워하며, 다시 씨앗을 슬쩍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다른 엘프들의 시선은 아주 한참 동안 내 주머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

나와 루나르엘은 엘프 경비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시 엘프 마을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처음보다 훨씬 수월했는데, 왠지 경비대원들은 더욱 삼엄하게 내 주변을 경계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정확히는 내가 아닌 세계수의 씨앗을 지키기 위해서였겠지만.

마을에 도착한 나는 루나르엘의 집으로 향했고, 루나르엘은 잠시 일이 있다며 경비대장과 떠나갔다.

루나르엘의 말한 일이.

나에게 굉장히 귀찮은 일로 변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만.

딱히 내색은 하지 않고 그녀와 헤어져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아빠! 오셨어요?"

"세진! 어서 와!"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엘과 티아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었고.

그 뒤로 임진혁, 오연우, 시르엘 그리고 피렌느까지 나와 내 안부를 물었다.

"괜찮아?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괜찮아요. 형. 그냥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다녀왔을 뿐이에요."

“세진이 형, 세계수는 어땠어요? 자연의 위대함이 느껴졌어요? 으으. 나도 직접 가까이서 보고 싶었는데.”

"어. 대단하더라고."

실제로는 빽빽한 숲에 가려져 거대한 세계수의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오연우의 기대감 가득한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어 대충 둘러댔다.

시르엘은 내 몸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주 조심스럽게 세계수에 관해서 물었다.

“세진 님, 직접 세계수를 만나신 건가요? 혹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 있을까요?"

"으으음.......”

잠시 고민을 하던 나는 주머니 속에 세계수 씨앗을 꺼내 들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일행에게는 빨리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쩌다 보니 세계수의 씨앗을 받아왔거든. 대충 이거랑 연관돼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

시르엘과 피렌느는 처음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점점 입을 벌리다 거친 숨소리를 냈다.

"헉……!"

"어엇!"

루나르엘 그리고 경비대장과 똑같은 반응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반면 심드렁하게 씨앗을 바라보던

오연우는 아무 생각 없이 씨앗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게 뭔데 그래요...… 아얏!"

“어딜 함부로 손대려고요!"

“그냥 한번 만져보려고……”

“꿈도 꾸지 마세요!"

평소와는 다른 피렌느의 앙칼진 반응에 오연우는 겁을 먹고 황급히 물러섰다.

놀라운 점은 피렌느의 이런 격한 반응에도, 시르엘은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비슷한 눈초리를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오연우는 두 엘프의 사나운 눈총을 피해 내 등 뒤로 숨어들었다.

시르엘과 피렌느의 격한 반응에 방 안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돌고 있는 그 순간.

-쾅. 쾅. 쾅.

누군가 격하게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문 너머에는 많은 사람의 인기척으로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피렌느가 문 앞으로 가 뭔가 대화를

나누더니, 문이 열리고 수많은 엘프가 우르르 집 안으로 몰려들었다.

그 엘프들의 얼굴을 살펴보니.

이전에 나에게 영혼의 눈을 사용했던, 모두 장로회에 속한 엘프들이었다.

집 안에 있던 모두가 당황스러워하던 중, 시르엘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장로님들이 이곳에는 무슨 일로……”

하지만 엘프 장로들은 시르엘의 말에 일말의 관심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눈빛으로 내 손에 들려 있는 세계수 씨앗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중 내가 장로 회의에 참석했을 때, 가장 상석에서 나에게 질문을 던지던 엘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세진. 정말…… 정말 이것이 세계수의 씨앗인가?"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순간 내 입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이게 세계수를 통해 받아온 씨앗입니다.”

"오오오!!"

“이럴 수가 정말로 세계수의 씨앗이라니!"

“이렇게 귀한 것을 어째서 인간이……”

내 대답과 동시에 엘프들 사이에서는 수많은 반응이 튀어나왔다.

단순히 감탄하며 경이로운 시선으로 씨앗을 바라보기도 했고, 이 씨앗을 가지고 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엘프도 있었다.

하지만 모둔 엘프들이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씨앗이 정말로 세계수의 씨앗이라고 인정하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엘프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이거 엄청 귀찮아지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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