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205화 (205/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5화

67. 엘프 마을 그리고 세계수(4)

엘프 마을에서의 하룻밤이 지났다. 손님을 위한 방과 침대가 따로 준비되어 있지 않아 땅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지만.

호의적으로 변한 마을 사람들이 포근한 담요를 넉넉하게 가져다줬고, 꽤 편안한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침잠이 없는 임진혁이 가장 먼저

일어났고, 다음으로 나와 오연우가 차례로 몸을 일으켰다.

"으으음. 조금만 더 잘래…….”

눈을 비비며 잠투정을 부리는 티아 때문에, 나는 조금 더 자리에 머물러야 했다.

제대로 눈을 뜨지 못하는 티아를 반쯤 끌어안다시피 해 자리를 정리 하고 있을 때쯤.

안쪽 방에서 이엘과 시르엘 그리고

루나르엘이 등장했다.

이엘은 나를 보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남은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빠, 잘 주무셨어요?"

“그래. 이엘도 잘 잤어?"

어젯밤 이엘은 시르엘, 루나르엘이 데리고 한방에서 잠을 잤다.

겉으로 보기에는 3자매처럼 보이지만, 촌수로 따지면 3대가 모여 같이 잠을 잔 셈.

“아빠도 같이 잤으면 좋았을 텐데……”

"으, 응.”

함께 잠을 자지 못해 아쉬워하는 이엘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엘과 루나르엘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일행과 간단하게 눈인사를 나눴다.

“잠자리는 괜찮으셨나요?"

“네. 포근한 담요를 많이 받아서 편하게 잘 수 있었습니다."

"다행이네요. 금방 아침을 준비할 건데, 잠시 마을 주변을 산책하고 오시는 게 어때요?"

루나르엘은 우리에게 아침 산책을

권유했고 임진혁과 오연우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산책하러 나가기로 했고, 길 안내를 위해 시르엘도 함께 나섰다.

루나르엘은 아직 내 품에 안겨있는 이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엘은 나랑 같이 아침 준비하는 걸 좀 도와주지 않겠니?"

"으응......"

그녀의 권유에 이엘은 고민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나는 슬쩍 루나르엘의 눈치를 살피고 이엘에게 말했다.

“이엘, 루나르엘님이랑 아침 준비하는 것 좀 도와줄래? 아빠는 이엘이 준비한 아침 먹어보고 싶은데."

"알았어요. 그럼 저는 아침 준비하고 있을게요."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내가 기특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이엘은 볼을 씰룩거리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루나르엘도 이엘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기쁜 듯 입꼬리를 올리고, 내 배려에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

시르엘과 함께 집을 나선 일행은 느긋한 걸음으로 길을 나섰다.

잠이 덜 깬 티아는 내 팔에 안겨 있었고, 임진혁과 오연우는 편안한 표정으로 마을의 아침 풍경을 감상했다.

울창한 숲 사이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숲 곳곳에서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음악처럼 들려 왔다.

거기다 마을 건물 멀지 않은 곳에서 작은 동물들의 모습도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었다.

호숫가의 아침 풍경이 좀 더 화사하고 평온한 느낌이라면, 엘프 마을 아침은 신비하고 고요했다.

우리가 천천히 엘프 마을의 걷고 있을 때.

일찍 일상을 시작한 엘프들이 각자의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몇몇은 우리를 발견하고 친근하게 인사를 보내기도 했다.

임진혁은 달라진 엘프들의 태도를 보며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반응이 많이 변했네. 어제만 해도 엄청나게 경계했었는데.”

"에헴! 다 저의 노력 덕분 아니겠습니까? 어제 혼신의 힘을 다해 사진을 찍어줬다고요."

"확실히 연우의 역할이 크긴 컸지."

오연우가 어제의 활약을 자랑하자 임진혁은 인정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이야기를 나를 통해서 전해 들은 시르엘도 인정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확실히 오연우 님의 활약도 컸지만, 세진 님의 활약도 한몫한 것 같아요."

“제가요?"

“물론이죠. 장로회를 통해 세계수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요. 벌써 마을에 소문이 다 퍼졌거든요.”

“…...”

어제 영혼의 눈을 통해 내 기억과 감정들을 공유했던 엘프 장로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쑥스러운 경험이었다.

시르엘은 내 마음을 읽었는지 살포시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영혼의 눈이라는 건 대상자의 기억과 감정을 좀 더 긴밀하게 느끼는 것일 뿐이에요. 장로님들이 인정 했다는 건 그만큼 세진 님이 진실하게 이야기를 했다는 거죠."

"쩝.‥…”

“저는 아직 영혼의 눈을 사용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만 들어도 세진 님의 순수한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부끄러우니까 그 이야기는 그만하죠.”

그녀는 칭찬하는 의도로 꺼낸 이야기였겠지만,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을 느끼며 강제로 대화를 종료시켰다.

느긋하게 마을을 둘러보던 일행은 중간에 피렌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특유의 활기찬 모습으로, 시간이 되면 자신의 집에도 방문해 달라며 우리를 초대했다.

나는 오늘의 일정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에, 나머지 일행만 나중에 그녀의 집을 방문하기로 약속했다.

피렌느와의 만남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침 산책을 종료하고 다시 루나르엘의 집으로 되돌아갔다.

루나르엘과 이엘이 준비한 아침 식사는 꽤 만족스러웠다.

버섯이 들어간 걸쭉한 수프는 구수하고, 담백한 맛이 났다.

마치 뜨끈한 누룽지를 먹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감자와 비슷하게 생긴 야채가 구워져 나왔는데 쫄깃한 식감에 고소한 맛이 굉장히 특이했다.

두 가지 음식만으로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어서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단출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어제 선물을 받은 과일과 엘프 차를 맛보고 있을 때.

집 앞으로 숲에서 만났던 경비 대장이 찾아왔다.

“루나르엘 님. 그분과 함께 세계수로 모시겠습니다.”

나는 직감적으로 경비 대장이 지칭하는 '그분'이 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루나르엘은 간단히 나갈 준비를 마치고 나와 함께 집을 나섰다.

나머지 일행도 함께 가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으나 이번만큼은 루나르엘도 진지한 표정으로 일행의 요청을 거절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장로회의 허락이 떨어진 세진 님 외에는 함께할 수 없습니다."

지금껏 한결같이 우리를 배려한 루나르엘이었기에.

더는 무리한 요청을 하지 않고, 나만 세계수로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아이들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임진혁과 오연우에게 뒤를 부탁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경비 대장과 열명 남짓한 경배 대원들이 나와 루나르엘을 호위하듯 둘러싼 채 길을 나섰다.

엘프 마을을 빠져나와 세계수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굉장히 멀었다. 또 숲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빼 곡해져서 하늘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능숙하게 길을 안내하는 경비 대장이 없었다면 딱 길을 잃기 좋은 환경이었다.

험한 길에도 경비대원들은 물론 루나르엘은 굉장히 먼 길을 걸었음에도 흔들림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살짝 피로감을 느낀 나는 슬쩍 루나르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얼마나 더 가야 하죠?"

“이제 거의 다 왔어요."

"......"

얼마나 더 걸었을까?

시간 감각이 살짝 무뎌졌을 때쯤.

거침없이 나아가던 경비 대장이 돌연 멈춰섰다.

그러고는 뒤쪽에 있던 루나르엘이 일행의 앞으로 나서서, 양손을 앞에 모으고 눈을 감고 집중했다.

“……”

“……”

그녀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모두 숨죽인 상황이 이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눈을 뜬 그녀는 내 쪽으로 다가와 말했다.

“세진 님. 아무래도 여기부터는 세진님 혼자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네? 저 혼자요?"

“네. 경비대원과 저도 이 앞으로는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어서..….”

“저는 길도 모르는데.”

"괜찮아요. 이 앞으로는 세계수가 세진 님을 직접 인도할 거예요."

“…...."

루나르엘의 말이 약간 무책임하게 느껴졌지만, 여기까지 와서 혼자서 못 가겠다고 거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경비대원들과 루나르엘의 배웅을 받으며 어두컴컴한 숲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맞는 길로 가는 것인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는데,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길을 찾아 걷기 시작했다.

정말 루나르엘의 말대로 누군가가 나를 이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세계수 쪽으로 다가갈수록 더욱 빽빽해진 숲은 완전히 햇빛을 가려 길을 어두컴컴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신비한 기운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길을 걸었다.

한동안 어두운 숲길을 걷다, 밝은 빛으로 가득한 공터에 도착했다.

“……”

그곳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기분이

들었는데, 금방 어디서 이 느낌을 받았는지 생각해냈다.

'나무 정령님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야.'

내가 나무 정령을 떠올리고 있을 때, 작은 공터에는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드그그그그극.

-뿌드드드득!

땅이 갈라지고 거대한 나무뿌리가

움직이더니.

나무 정령이 생명의 샘으로 향하는

통로를 만드는 것과 비슷하게 거대한 통로가 생겨났다.

통로를 통해서는 생명의 샘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한 생명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본능적으로 이 통로가 세계수로 향하는 길임을 알아채고 천천히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따라 걷다 잠시 몽롱한 기분에 정신을 차리자, 주변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공간.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 드디어 찾아왔구나!

소년 같기도 하면서 소녀 같은 중성적인 모습의 엘프가 반갑게 내 앞 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가워!

그 엘프는 대뜸 내 양손을 붙잡고 기쁜 듯 미소를 지었다.

“너는...…?"

-아. 미안. 너무 반가워서 내 소개를 깜빡했네. 으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냥 세계수의 정령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거랑 비슷하게 생각하면 돼."

“…...”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대충 설명한 어린 엘프는 다시 환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 궁금한 게 많지?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지만 내가 대답해줄수 있는 건 전부 대답해 줄게.

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경황이 없어 허둥지둥하다가, 급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를 떠올렸다.

“네가 엘프들을 통해서 나를 부른 거지?"

- 맞아.

“너는 무슨 이유로 나를 찾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알고 싶은 건 단 한 가지야."

엘프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에게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내가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려고 할 때 어린 엘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엘!

"......?!”

-이엘을 살리고 싶은 거지? 그래서 나를 찾아왔잖아.

내 마음을 읽은듯한 어린 엘프의 행동에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그는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 내가 원하는 것도 그거야. 네가 이엘을 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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