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4화
67. 엘프 마을 그리고 세계수(3)
어수선했던 회의장 내의 분위기는 나의 등장과 함께 차갑게 가라앉았다.
루나르엘이나 넬모란 장로, 시르엘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봤지만.
나머지 자리에 앉아 있는 대부분의
엘프는 무표정하게 나를 훑어봤다.
그중 가장 상석인 자리에 앉은 엘프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넬모란 장로보다도 훨씬 연배가 높아 보이는 엘프였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하군. 자네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네. 우리에게는 꽤 중요한 이야기라서 말이지."
"아. 네……”
“시르엘이 자네가 사는 곳에 찾아가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들어봤네. 혹시 가능하다면 처음 아르엘과 만났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나?"
엘프는 정중하면서도 약간의 압박이 느껴지도록 질문을 던졌다.
나는 볼을 긁적거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으음. 그러니까 처음 아르엘 님을 만난건……."
가장 처음 이쪽 세계로 넘어와 숲에 도착하고, 이엘과 처음 마주하고, 아르엘을 만났던 지난 일들.
가감 없이 생각나는 그대로 쭉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약간 긴장했는지 기억을
더듬으며 떠듬떠듬 이야기를 이어나갔지만, 말을 계속할수록 점점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도 이야기를 꺼내며 지난 향수에 빠져, 긴장감 따위는 잊어버리고 아련한 표정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그렇게 이엘과 함께 지내게 되었고, 지금까지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
짧지도, 그렇게 길지도 않았던 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방 안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아까와 같이 차가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무표정하고 차가웠던 엘프들의 얼굴에는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럼 자네는 아르엘에게 받은 은혜를 이유로 이엘을 보호하고 있다는 건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
“저도 부모 없이 자라봐서, 아르엘 님을 떠나보냈던 이엘이 느꼈을 절망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엘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주기 위해 보호자를 자처했던 것이죠.”
말을 마치며 약간 쑥스러운 기분이 들어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당당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엘의 보호자가 되고 싶었던 내 마음이 떳떳했다는 사실을 보이고 싶었다.
이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회의석에 앉아 있던 대부분 엘프가 은은한 미소를 짓기 시작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엘프 역시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이야기는 잘 들었네. 어려운 부탁이었는데 있는 그대로 잘 이야기해
줘서 고맙네."
“도움이 됐다면 다행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겠나? 이제는 금방 끝날 것 같으니.”
그는 내게 잠시 양해를 구한 뒤, 회의석에 앉아 있는 엘프들을 둘러 보며 말을 이었다.
“세계수의 부름을 받은 인간의 이야기도 직접 들어봤습니다. 이제 장로회의 뜻을 결정하겠습니다. 인간 전세진의 세계수 출입을 반대하는 자는 손을 드십시오."
회의장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몇몇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으나, 손을 들어 올리는 엘프는 한 명도 없었다.
"이걸로 장로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인간 전세진의 세계수 출입을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생각보다 쉽게 결정이 이루어지는 광경을 보며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멀뚱멀뚱 서 있는 나를 향해서 루나르엘과 시르엘, 넬모란 장로가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세진 님."
“네. 제가 잘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결과는 좋게 나온 것 같네요."
"아뇨. 정말 잘하셨어요. 저는 중간에 눈물이 나올뻔했어요."
"......?"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는 루나르엘. 그녀가 너무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넬모란 장로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루나르엘 님의 말에 동의하네. 정말 좋은 이야기였어."
"......??"
넬모란 장로도 감명을 받았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를 두드렸다.
'뭐지? 그렇게 내 이야기가 진실성 있었나?'
루나르엘, 넬모란 장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엘프가 회의실에 있었던 나에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처음 방안에 들어왔을 때 싸늘했던 분위기와는 전혀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급변한 분위기에 내가 적응하지 못 하고 있자, 시르엘이 슬쩍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 당연한 결과니까."
“저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여기 계셨던 모든 장로님은 세진 님이 이야기하는 동안 '영혼의 눈'을 사용하고 계셨거든요."
"영혼의 눈?"
그녀는 웃는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영혼의 눈은 오랜 세월을 겪은 엘프만이 가지는 능력이에요. 쉽게 말해서 상대방의 감정과 기억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어요."
"예? 그럼 설마……”
"맞아요. 여기 계신 장로님들은 세진 님이 이야기를 이어가는 동안 세진 님의 감정과 기억을 일부분 공유한 거예요."
"아...…”
이제야 엘프들이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이해가 갔다.
이엘과 아르엘의 이야기를 하면서. 내 가슴 속에 생겨났던 애틋하고 아련한 기억과 감정들을 그들이 함께 느끼고 있었던 것.
'어쩐지 쉽게 결정을 내리는 것 같더라니.'
내 진심이 전해졌다는 생각에 약간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발가벗겨진 기분에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다른 엘프들이 먼저 회의장을 빠져 나가고.
나는 루나르엘, 시르엘과 함께 조금 뒤늦게 건물을 빠져나왔다.
"응?"
그런데 기다리고 있어야 할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일행의 모습이 안 보이네요. 여기까지 다 같이 왔는데.”
나는 살짝 당황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계속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경비대원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아까 여기 있던 제 일행들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보셨나요?"
경비대원은 내 예상과는 다르게 활짝 웃더니, 친절하게 일행이 어디로 갔는지 알려줬다.
"그분들이요? 아까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쪽으로 내려갔습니다. 조금 전에 내려갔으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예. 감사합니다."
뭔가 훨씬 호의적으로 변한 경비대원의 모습에 내심 당황스러웠다.
“일행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저쪽으로 갔다네요.”
"그럼 저희도 따라가 보죠."
마을의 지리를 잘 아는 시르엘을 앞세워, 우리는 경비대원이 알려준 방향으로 일행을 찾아 나섰다.
***
일행을 찾아 나선 우리는 어렵지 않게 그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자! 찍을게요."
-찰칵!
"으음. 이건 잘 나왔네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끄덕 끄덕.
“좋습니다. 그럼 이걸로 뽑아드릴게요."
분명 말이 통하지 않는데도, 위화감 없이 엘프들과 의사소통을 나누고 있는 오연우.
"너 뭐 하냐?"
"어? 형 금방 나오셨네요. 잠시만요. 이분들 사진만 좀 뽑아드리고......"
그는 방금 찍은 사진을 노트북과 연결된 휴대용 인쇄기로 출력하기 시작했다.
"여기 있습니다.”
오연우가 출력된 사진을 건네주자.
사진을 확인한 엘프는 크게 기뻐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가져온 가방을 통째로 들이밀었다.
“아. 이런 거 안 주셔도 되는데.”
오연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능숙하게 가방을 챙겨 들었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던 나는.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임진혁과 티아를 발견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 옆에는 수많은 과일과 여러 가지 물건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세진. 이것 봐! 맛있는 게 잔뜩 있어."
티아와 이엘은 어느새 어린 엘프들과 친해졌는지, 옹기종기 모여앉아 과일들을 나눠 먹고 있었다.
"형.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그게……”
임진혁은 조금 오묘한 표정으로 내가 건물로 들어간 뒤의 상황을 이야기해 줬다.
시작은 오던 길에 사진을 전해줬던 경비대원이 찾아오면서 시작됐다고 했다.
경비대원은 오연우가 선물했던 사진이 꽤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의 연인과 함께 약간의 과일을 가지고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연인과 다시 사진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고, 심심했던 오연우는 흔쾌히 그 부탁을 들어줬다.
신나게 사진을 찍은 오연우는 그들에게 사진을 인쇄해 선물해 줬고, 두 연인은 가져왔던 과일을 감사의 뜻으로 전했다.
그런데 오연우가 찍은 사진에 대한 소문이 마을에 퍼지기 시작하면서, 엘프들은 각자의 선물을 가지고 오연우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거리낄 것이 없던 오연우는 신나서 엘프들의 사진을 찍어주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서……
"한 곳에서만 사진을 찍으니까 너무 배경이 심심하네요. 마을 이곳저곳에서 한번 찍어보죠.”
마을의 여러 장소를 배경으로 쓰고 싶다며 대담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점점 더 마을 엘프들의 관심을 끌면서 지금 상황에 이르게 된 것.
조금 어이가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오연우의 활약 덕분인지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은 꽤 부드러워져 있었고. 원래 호기심이 많던 어린 엘프들은 눈을 반짝이며 우리 주변을 맴돌았다.
루나르엘과 시르엘도 쌓여 있는 엘프들의 선물을 보면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엄청나게 선물을 많이 받으셨네요. 어? 이건……”
선물 사이에 뭔가를 발견한 시르엘이 조심스럽게 뭔가를 들어 올렸다.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건 뭐죠?"
“이건 '엘프주'에요. 그것도 꽤 오랫동안 잘 숙성된 귀한 물건이네요. 굉장히 구하기 힘든 거예요."
"오오.......”
그것 말고도 구하기 힘든 약초라든지, 직접 만든 엘프차 등등. 귀한 값어치를 지닌 선물들이 잔뜩이었다.
이렇게 많은 선물이 쌓여 있음에도.
아직 사진을 찍지 못한 엘프들이 많았고, 오연우는 쉴 새 없이 사진을 찍어야 했다.
***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엘프들의 사진 소동이 겨우 끝났다.
다시 루나르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정말 원 없이 사진을 찍은 오연우는 하얗게 불태운 표정으로 짓고 있었다.
나와 임진혁의 손과 등에는 엘프들에게 선물이 잔뜩 들려 있었다.
우리가 다 먹지 못할 것 같은 과일이나 음식들은 다시 다 돌려줬는 데도 귀한 선물들이 한가득했다.
집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루나르엘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세진 님, 혹시 저분에게 그 사진이라는 것을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당연히 해드려야죠."
나는 그녀의 부탁을 곧바로 받아들여 오연우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는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는 눈빛으로 다시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루나르엘은 시르엘과 함께 집을 배경으로 나란히 섰다.
배경을 확인한 오연우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잠시만요."
"......?"
루나르엘은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몹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이엘. 너도 함께하겠니?"
"......"
이엘을 부르는 루나르엘은 애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시르엘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부름에 이엘은 망설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이엘의 눈동자에서 감정을 읽어낸 나는.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등을 살짝 떠밀어줬다.
"가봐. 이엘."
내 손길에 용기를 얻었는지.
이엘은 쭈뼛쭈뼛 루나르엘과 시르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세 사람이 모여서자 약간은 어색하지만 뭔가 묘한 끈끈함이 느껴졌다.
"자! 찍을게요.”
-찰칵!
오연우의 외침과 함께 사진이 찍히고,
한 번 더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돌연 이엘이 내 쪽을 향해 뛰어왔다.
"어...... 이엘?"
이엘은 작은 두 손으로 나를 이끌더니, 루나르엘과 시르엘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는 이엘의 의도를 파악하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집 앞에 어색하게 네 사람이 모여 들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아요."
루나르엘과 시르엘, 그리고 나와 이엘까지 다시 자세를 잡았다.
"자! 다시 찍을게요."
-찰칵!
오연우의 외침과 함께 다시 사진이 찍혔다.
나중에 찍힌 사진을 확인해 보니.
나는 굉장히 어색한 모습이었지만, 이엘과 나머지 두 사람은 굉장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