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2화
67. 엘프 마을 그리고 세계수(1)
우리는 경비대장을 중심으로 많은 엘프에게 둘러싸인 채 숲을 걸었다. 엘프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유심히 관찰했다.
경비대장이 환영 인사를 건네긴 했지만, 주변 엘프들의 태도는 손님보다는 위험한 외부 침입자를 대하는 듯했다.
이엘도 본능적으로 주변의 이런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내 옆에 딱 달라붙어서 불안한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부탁을 받고 찾아온 손님인데, 생각했던 것보다 대접이 너무 야박하다 느끼고 있을 때.
내 옆에서 걷고 있던 시르엘이 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죄송해요. 세진 님. 외부인이 거의 찾아오지 않는 곳이라. 원래 경계심이 심해요. 절대 나쁜 의도가 있는 건 아니니까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
시르엘의 부탁에 일단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노력했다. 최대한 주변 엘프들은 신경 쓰지 않으며 울창한 숲의 모습만 눈에 담았다.
일행 모두가 알게 모르게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와중에, 엘프들의 경계심 가득한 따가운 눈초리에도 신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와아. 형. 저것 좀 보세요. 엘프 손목에 있는 거. 액세서리 같은 건가?"
넬모란 장로와 새를 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영혼이 빠져나간 시체 같던 녀석이 지금은 최고로 신나는 표정으로 주변 엘프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오연우는 단순히 관찰에서만 그치지 않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촬영을 시도했다. 그 순간.
"멈춰라! 당장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놔!”
우리를 살피던 엘프 중 하나가 오연우에게 검을 들이밀며 차갑게 외쳤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엘프들이 긴장한표정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무슨 일입니까?"
앞서 걷던 경비대장 엘프도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단순히 카메라를 꺼내려다 봉변을 당한 오연우의 모습에 가장 먼저 피렌느가 튀어 나갔다.
"잠깐 잠깐만요. 이건 무기가 아니에요."
“그럼 뭐지? 왜 이 인간은 갑자기 이걸 꺼내 든 거지?"
“이건 눈에 보이는 모습을 순식간에 저장해주는 아티팩트예요."
"......?"
피렌느의 설명에도 엘프가 이해를 하지 못하자, 그녀는 오연우에게 사진 찍는 모습을 흉내 내며 사진을 찍어달라 부탁했고.
눈치껏 그녀의 의도를 파악한 오연우는 카메라를 들고 경계심 가득한 엘프를 바라봤다.
-찰칵!
사진이 찍히는 소리에 무기를 든 엘프는 살짝 움찔했다.
오연우는 촬영된 사진을 그 엘프에게 직접 보여줬다. 그러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사진을 바라봤다.
"오오......”
“제 말 맞죠? 전혀 무기가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까 차갑게 소리칠 때와는 전혀 다르게, 순수한 아이 같은 모습으로 카메라를 살피던 엘프는 오연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지만 좋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고, 경비 대장도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일행을 이끌기 시작했다.
“어휴. 너는 이런 분위기에 자제 좀 하지."
“이렇게까지 과민반응할 줄 몰랐죠. 그래도 사진은 찍어도 상관없나 보네요.”
“너도 참 대단하다.”
오연우는 조금 전까지 위험했던 상황은 잊어버리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카메라로 주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한편.
엘프들 쪽에서는 방금 카메라를 직접 구경한 엘프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오고 가더니. 모두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오연우의 카메라를 바라봤다.
신기한 물건의 등장에 엘프들의 경계심이 확 내려가고, 우리에 대한 관심도가 치솟은 상황.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단순하다고 해야 할지.'
아무튼, 오연우 덕분에 급변한 분위기 속에
일행은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숲길을 계속 걸어나갔다.
빽빽한 숲을 지나 드디어 우리는 엘프들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아……”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임진혁도 놀랄 정도로.
엘프 마을의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마치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에 바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나무 아래, 나무 위, 할 것 없이 지어져 있었고.
엘프 특유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평온하고 아늑한 느낌의 마을이었다.
시르엘이나 넬모란 장로가 말했던 대로.
외부인의 방문이 정말 오랜만이었던지, 마을의 엘프들은 집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우리의 모습을 지켜 봤다.
몇몇 어린 엘프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오려다가 경비 대원에게 혼나고 멀리 떨어져 나갔다.
처음 경비대장과 대원들을 만났을 때처럼 경계심이 심하지는 않았어도, 마을 주민들 역시 약간은 우리를 경계하는 듯했다.
경비대장은 대원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넬모란 장로님. 마을까지 안내는 끝이 났으니 저는 경비 임무를 계속 수행하기 위해 돌아가 보겠습니다.”
“고맙네, 경비대장."
“아닙니다.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손님들의 안내를 위해 대원 몇 명을 남겨둘 테니 장로님께서 직접 지시를 내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그럼.”
경비대장은 넬모란 장로에게 고개를 숙이고, 우리 쪽을 향해서도 눈 인사를 보낸 뒤 걸음을 되돌렸다.
하지만 그의 걸음은 얼마 가지 못 하고 누군가에 의해 멈춰졌다.
"경비대장!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넬모란 장로보다 조금 더 젊어 보이지만, 훨씬 더 꼬장꼬장한 느낌의 엘프가 경비대장을 불러세웠다.
그리고 그 엘프 뒤로는 몇 명의 엘프들이 뒤에 따르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카셀르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칼도르 장로님."
“왜 외부인을 함부로 마을 안으로
들여보내 준 건가?"
“저는 넬모란 장로님의 지시에 따랐을 뿐입니다.”
칼도르 장로라 불린 엘프는 흥분한
표정으로 경비대장을 질책했고, 경비대장은 흔들림 없는 자세로 대답을 이어나갔다.
“이보게. 칼도르. 내가 데려온 손님들일세. 흥분을 가라앉히게."
"넬모란 장로님. 장로회에서 했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까?"
“뭐가 다르단 말인가?"
“분명 인간 한 명과 아르엘의 딸만 데려오기로 했었죠. 제 말 틀렸습니까?"
넬모란 장로는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최대한 부드럽게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겨우 세 사람 더 데려왔을 뿐이야. 마을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걸세.”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음흉한 인간들의 속내를 우리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칼도르, 언행에 주의해 주게. 내가 직접 모셔온 손님들이야."
그의 진지한 경고에도 칼도르라는 엘프는 적대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넬모란 장로님. 이건 장로회에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경비대, 일단 저 외부인들을 감금하도록.”
“정말 이럴 건가?"
넬모란 장로도 더는 참을 수 없는 지 딱딱해진 말투로 그를 노려봤다.
임진혁과 오연우는 엘프어를 알아 듣지 못하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에 긴장한 기색을 내보였다.
특히 임진혁은 당장에라도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뛰쳐나갈 것 같았다. 경비대원들 역시 난처한 표정으로 허둥대고 있을 때.
“칼도르! 무례한 행동은 그만두세요."
위엄 있는 여자 엘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우리가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
“어렵게 초대한 손님에게 이렇게 무례한 행동을 하다니."
“하지만 장로회에서......"
"넬모란 장로를 그 먼 곳까지 보내 놓고서, 마을에서 편히 기다리라 하는데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나요?"
"......"
“그렇게 정확하게 일 처리를 하는 장로회에서, 왜 카셀르의 처분에 대해서는 흐지부지 넘어간 것인지 모르겠네요."
카셀르의 이야기가 나오자 칼도르는 얼굴을 구기며 한발 물러섰다.
“손님의 안내는 제가 직접 할 테니, 물러나도록 하세요."
“......”
칼도르는 처참하게 구겨진 얼굴로 카셀르와 따르는 엘프들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냉랭한 표정을 짓던 여자 엘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넬모란 장로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루나르엘 님."
“아니에요. 넬모란 장로, 직접 먼 곳까지 손님을 모셔오느라 고생하셨어요."
넬모란 장로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 외모를 가졌지만, 그는 여자 엘프를 굉장히 공경한 자세로 대했다.
루나르엘이라 불린 여자 엘프는 넬모란 장로를 지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나와 이엘이 있는 곳 앞에 서더니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네가 이엘이니?"
이엘은 낯선 엘프의 물음에 내 다리 뒤로 살짝 숨어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런 이엘의 모습을 살짝 안타깝게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들어 이번에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이 이엘을 보살펴 준, 세진 님이시군요."
"예. 맞습니다."
"반가워요. 루나르엘이라고 해요."
루나르엘은 굉장히 친근하게 대했지만.
그녀를 통해 느껴지는 뭔가 어려운 분위기에 자연스럽게 몸이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색하게 그녀의 인사를 받는 사이.
뒤쪽에 있던 시르엘이 앞으로 나섰다.
"다녀왔어요."
“그래.고생했구나. 아르엘의 소식은 벌써 전해 들었단다."
"죄송해요. 제가 조금만 더 빨리 언니를 찾았더라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때 아르엘을 막지 못했던 내 잘못이지."
루나르엘은 슬퍼하는 시르엘을 살짝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시 그녀의 품에 안겨 있던 시르엘은 우리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품에서 떨어져나왔다.
그리고 살짝 허둥대며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소개해 드릴게요. 엘프 마을의 가장 어른이신 루나르엘 님이에요.”
"......?"
겨우 30대 정도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루나르엘.
그녀가 엘프 마을에 가장 어른이라는 말에 나는 크게 눈을 떴다.
“호호. 그런 쓸데없는 소개는 하지 않아도 괜찮은데."
루나르엘은 나이가 밝혀진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민망하게 웃으며 시르엘의 팔을 쳤다.
그리고 뒤에 이어진 시르엘의 말에 나는 눈 뿐만 아니라 입까지 크게 벌렸다.
“그리고 아르엘 언니와 저의 어머니예요."
일행은 루나르엘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넬모란 장로와 피렌느는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중간에 헤어졌고. 경비대원들 역시 집 앞까지만 함께 하고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루나르엘의 집은 다른 엘프들의 집 보다는 큰 편이었지만.
일행이 모두 들어가자 꽉 차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루나르엘과 시르엘이 손님 대접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오연우와 티아는 고개를 휙휙 돌리며 집 구경에 여념이 없었고, 임진혁은 평소와 같이 담담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엘은 아까보다 더 내 곁에 달라 붙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전에 알게 된 사실에 긴장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나르엘 님이 아르엘 님의 어머니면, 이엘의 할머니?'
도저히 할머니라고 볼 수 없는 외모를 가진 루나르엘이었지만.그녀가 보여주는 외모와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아르엘을 떠올리게 했 다.
잠시 후.
루나르엘과 시르엘이 신선한 과일과 음료를 내왔고. 방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