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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200화 (200/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200화

66. 세계수에서 온 초대(2)

세계수에 함께 가달라는 넬모란 장로의 부탁.

갑자기 거대한 새를 타고 찾아와서 하는 부탁치고는 굉장히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부탁에 당황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시르엘과 나머지 엘프들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로님. 갑자기 세진 님을 세계수로 데려가신다고요?”

“그렇다. 내가 직접 이곳까지 찾아 온 이유는 세진 님을 직접 모시기 위해서다."

“하지만…….”

넬모란 장로와 시르엘이 심각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오연우와 임진혁이 슬쩍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진아. 저 늙은 엘프가 뭐라고 하는 거냐?"

“그러니까…… 갑자기 저를 세계수로 데려가겠다는데요?"

"으응? 형, 세계수면 엘프들이 왔다는 그 마을이 있는 곳 아니에요?"

"맞아. 그런데 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이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잘......"

엘프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나 역시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고 얼떨떨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넬모란 장로와 시르엘의 이야기가 길어지는 듯 보이자, 나는 조심스럽게 끼어들어 대화를 중단시켰다.

"죄송한데. 그…… 일단 넬모란 장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네. 그렇게 불러주시면 됩니다.”

"넬모란 장로님. 일단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시르엘 님도 같이 집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실례가 아닐지……”

갑작스럽게 거대한 새를 타고 찾아온 것부터 이미 실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고 최대한 친절한 웃음으로 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맥주를 만들고 있던 임진혁과 엘프들은 빨리 정리를 하고 오겠다며 맥주 창고 쪽으로 향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와 넬모란 장로와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들어서자.

밖에서 일어난 소란 때문에 아이들이 방에서 나와 불안한 얼굴로 주변 을 살피고 있었다.

나는 먼저 불안한 아이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바로 넬모란 장로를 소개해 줬다.

“얘들아, 시르엘 님이 오신 엘프 마을에서 또 손님이 찾아왔어. 넬모란 장로님이셔.”

아이들은 처음 보는 엘프의 등장에 약간 긴장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다른 엘프들보다 나이가 많아 보여서 더욱 긴장하는 것 같았다.

“퓨이."

- 삐이익.

슬라임, 새끼 드레이크가 차례로 인사를 건네자, 넬모란은 직접 허리를 숙이면서까지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의 표정에는 호기심과 그보다 더 진한 호감이 드러났다.

“세진 님은 정말 특별하고, 귀여운

가족들을 두셨군요."

"아. 네."

퓨이와 세이의 인사가 끝나고 이엘이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네가 아르엘의 딸, 이엘이구나?"

“네. 맞아요. 엄마를 아세요?"

“허허. 당연히 알지.”

넬모란은 부드럽게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아르엘을 많이 닮았구나. 정말 많이 닮았어..….”

"......"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은 넬모란의 표정은.

마치 예전에 시르엘이 보여줬던 것처럼, 회한이 담긴 씁쓸한 미소였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기에는 이엘은 너무 어렸고.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넬모란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

넬모란 장로가 잠시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사이.

맥주 창고의 정리를 끝낸 임진혁과 모렛, 티아, 엘프들이 돌아왔다.

부엌 식탁 위에 간단히 커피와 과자를 꺼내 놓은 뒤.

한편에는 시르엘과 넬모란, 반대편에는 나와 임진혁이 자리를 잡았다. 마치 양자회담을 진행하는 분위기 였다.

나머지 엘프들은 거실 쪽에서 기다리며 부엌의 눈치를 살폈고, 오연우 역시 아이들과 놀아주면서 이쪽으로 귀를 열고 있었다.

살짝 무거운 분위기에 처음으로 입을 연 사람은 나였다.

"넬모란 장로님. 아까 저를 세계수로 데려가겠다고 하셨는데, 혹시 무슨 이유로 그러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고,

넬모란 장로도 역시 이 질문을 예상했는지 곧바로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 이유를 설명드리자면......"

“아, 장로님.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크흠. 그럼 좀 더 편하게 이야기 하겠네."

그는 좀 더 편해진 말투로 말을 계속했다.

“나도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네.”

"예?"

“일단 내가 맡은 역할은 자네를 마을로 데려오는 것뿐. 좀 더 자세한 사정을 들으려면 함께 마을로 가야 하네.”

이유를 듣기 위해서는 무조건 마을로 가야 한다는 대답에 내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세진아. 뭐래?"

"왜 데려가는지 물었더니, 이유를 알고 싶으면 무조건 마을로 가야 한대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장 거절해."

나와 임진혁이 대화를 나누며 별로 좋지 않은 분위기를 표하자, 넬모란 장로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자네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네. 이유도 들려주지 않고 다짜고짜 함께 가자고 하면 당연히 꺼릴 수밖에 없겠지."

"......"

“하지만 이럴 수밖에 없는 우리의 사정도 좀 이해해 주게. 우리에겐 일족의 미래가 달린 문제야."

참담한 표정을 짓는 넬모란 장로의 모습에 살짝 마음이 흔들리긴 했지만, 아직 그를 따라나서야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때.

한동안 가만히 있던 시르엘이 나섰다.

“세진 님, 넬모란 장로님에게도 아마 사정이 있으실 거예요.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주시겠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진지한 분위기로 나름의 생각을 풀어놨다.

“세계수의 힘이 약해지고 일족의 미래가 흔들리면서, 저희 마을은 자연스럽게 폐쇄적으로 변해갔어요. 이전에 교류를 맺었던 다른 종족들과도 대부분 관계를 끊었지요. 마을에는 외부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엘프가 생겨날 정도였으니까요."

약간 이야기의 주제가 다른 곳으로 흐르는 것 같았지만, 일단 귀를 열고 경청했다.

“지금의 폐쇄적인 마을 분위기에서. 장로님이 직접 세진 님을 데리고 마을로 가는 상황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에요. 아마 장로님의 방문이 개인의 독단적인 선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겠죠."

“크흠.”

시르엘의 꽤 논리적인 추론에 넬모란 장로가 살짝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장로님에게 일을 맡길 정도라면, 마을의 대소사를 모두 관장하는 장로회가 직접 움직였을 거예요. 그리고 외부인의 마을 방문을 극도로 꺼 리는 장로회의 특성에 반해, 이런 일을 계획했다는 것은 오로지 한가지 상황뿐이에요."

"......?"

“세계에서 직접 전언이 내려왔을 때. 그 경우 말고는 없어요."

시르엘은 내 눈을 강하게 직시하며 말했다.

“마을의 엘프들이 세진 님을 부르는 게 아니에요. 세계수가 세진 님을 찾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장로 님도 이유를 설명하시지 못하는 거고요."

길었던 그녀의 설명이 끝나자. 넬모란 장로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시르엘의 말이 모두 맞습니 다. 죄송합니다. 세진 님. 저도 장로회의 일원으로서 마을의 내부 사정을 쉽게 말할 수 없는 처지라……"

그는 깔끔하게 모든 사실을 인정하더니, 시르엘 쪽으로 슬쩍 시선을 옮겼다.

“시르엘, 너는 세진 님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구나."

"예? 그게 갑자기 무슨..….”

“마을에 민감한 문제를 거리낌 없이 외부인에게 말할 정도면, 그만큼 세진 님을 믿고 있다는 거겠지."

“......."

조금 전까지 진지한 모습을 보여주던 시르엘은 넬모란 장로의 몇 마디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푹 숙였다.

심하게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반응에 나도 왠지 민망해져서 볼을 긁적거렸다.

“이미 시르엘이 다 설명해 버렸으니. 나도 편하게 이야기하겠네. 앞서 그녀가 말한 대로 자네를 찾은 것은 우리가 아니야. 세계수에서 직접 자네를 찾았다네.”

넬모란 장로는 이미 체념한 듯 시원하게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나로서는 계속해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직접 본 적도 없는 세계수가 뭣 때문에 나를 찾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저를 찾는지는 모르시는 거죠?"

“그렇다네. 자네를 데려와야 한다는, 아주 짧은 메시지만 전달됐을 뿐. 다른 이유는 우리도  전혀 듣지 못했네."

"흐음."

"사실 이 문제로 장로회에서는 수많은 말이 오고 갔었어. 아까 시르엘이 설명한 것처럼 외부인을 직접 마을로 데리고 오는 일은 올해 전부터 금기시되어 왔으니까."

“마을에 제가 방문하는 것을 꺼리는 분들이 있나 보군요?”

“솔직히 말하면 훨씬 많다고 할 수 있네. 나는 꽤 중립적인 입장이었지만,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자네의 초대를 반대했다네."

나의 방문을 꺼리는 엘프가 많다는 이야기에 내 미간이 자연스럽게 좁아졌다.

솔직히 이야기해 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굳이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넬모란 장로는 이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애원하듯 내게 말했다.

“세진. 자네의 마음은 이해하네. 하지만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우리가 이렇게 변해 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세진 님. 저도 부탁드릴게요. 세계수가 직접 세진 님을 불렀다면 분명 중요한 이유가 있을 거예요. 어쩌면 엘프 일족의 미래가 걸린 문제일지도 몰라요. 제발…”

시르엘까지 간절한 표정으로 부탁해오자 나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임진혁도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태도였지만, 두 엘프가 간절히 애원하는 태도를 보이자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들의 부탁에 쉽사리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을 때, 시르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세진 님이 찾고 계시는 답을 세계수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게 무슨?"

“생명의 샘! 생명의 샘을 다시 되돌릴 방법을 찾고 계시잖아요. 저는 알아보지 못했지만, 세진 님이라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으실지도 몰라요.”

"…...”

시르엘의 말에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생명의 샘, 그리고 세계수.

세계수를 직접 본 적은 없어도, 분명 생명의 샘과 무슨 연관이 있을 거로 추측했다.

이엘을 위해 꾸준히 생명의 샘을 연구하는 중이지만, 아직 뚜렷한 실마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상황.

어쩌면 시르엘의 말대로 그 실마리를 세계수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야 하는 걸까?'

계속 심각하게 고민을 이어나가던 도중.

오연우와 함께 있던 이엘이 불쑥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한쪽 팔을 붙잡았다.

"이엘?"

“아빠, 엄마의 고향으로 가는 거예요?"

"......"

뭔가 기대감이 담겨있는 이엘의 눈동자를 보고 나는 바로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엘은…… 아르엘 님의 고향에 가보고 싶니?"

이엘은 더욱 강하게 내 팔을 잡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엄마는 고향의 이야기를 하면서 항상 웃었어요.”

“처음에는 저도 그 이야기를 좋아

했었는데. 언젠가부터는 일부러 듣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그곳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거든요."

이엘이 꺼내 놓은 아르엘의 이야기에 나는 물론이고 시르엘, 넬모란 장로의 표정에도 슬픈 기색이 가득 했다.

오히려 이엘만이 담담한 표정으로 엄마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이제는 엄마가 고향에 갈 수는 없겠지만, 제가 대신 가볼래요. 그래서 엄마한테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어요."

조심스럽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히는 엘프 소녀.

그런 이엘의 모습이 조금 안쓰러우면서도,

너무나도 대견해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 마음을 전하려 이엘을 꼭 끌어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리고 넬모란 장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볼게요. 세계수에 그리고 아르엘 님의 고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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