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8화
65. 엘프들과 일상(3)
-짹짹짹.
"으으음......”
닫혀 있는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새의 지저귐 소리.
그 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평소보다 훨씬 늦은 기상 시간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졸린 눈을 비비며 천천히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으으윽."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어제 과음으로 인한 숙취가 몰려왔고, 약간의 어지러움과 두통이 생겨났다.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지러움과 두통이 약간 가라앉자 이번에는 입에서 타는듯한 갈증이 느껴졌다.
시원한 냉수가 간절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부엌으로 내려가기 전, 습관처럼 침대와 바닥을 살폈다.
바로 아이들을 살피는 일이었다.
"후우우."
가장 먼저 바닥 포근한 방석 위에서 잠을 자는 모렛.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모습이 커다란 털 뭉치 같았다.
나는 손을 뻗어 귀여운 털 뭉치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이번에는 침대 옆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퓨이와 티아는 서로를 꼭 껴안고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 세이가 꼬리와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천사처럼 조용히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잠시 눈에 담아두고, 나 때문에 내려간 이불을 끌어 올려 아이들을 덮어 주었다.
내 시선은 마지막으로 침대 끝쪽에 이엘을 향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이엘의 모습
역시...... 잠깐만.
이엘이 언제 이렇게 컸지?
잠이 덜 깼나 싶어 양손으로 눈을 두어 번 비볐다.
얼마나 세게 비볐는지 눈동자에서 약간 얼얼함을 느끼며 다시 이엘 쪽을 살피는데.
"......?!!"
나는 눈앞의 광경을 확인하고, 입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양손으로 겨우 틀어막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두근두근 뛰면서, 눈에서는 순식간에 잠기운이 사라졌다.
혹시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라도 들릴까.
조심스럽게 눈을 움직여 상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이엘과 똑 닮은 표정과 자세로 잠들어 있는 커다란 이엘.
잠결에 이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비슷한 그 존재는 바로 시르엘이었다.
- 새근새근.
마치 자기 침대인 것처럼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시르엘.
그녀의 품 안에는 이엘이 꼭 안겨서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만 보자면 굉장히 평화롭고, 마음이 안정되는 광경이겠지만.
지금 이 장면을 보는 내 머릿속은 허용량을 넘은 혼란과 당황으로 쑥대밭이 돼버렸다.
나는 숙취로 얼얼한 머리를 굴리며, 흐릿한 어젯밤의 기억을 필사적으로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젯밤 분명 아저씨가 폭주하는 바람에…….'
모렛의 수제 맥주 저장통을 가져 온 아저씨는 너나 할 것 없이 술을 권했다. 엘프들 역시 수제 맥주에 관심을 보이며 기분 좋게 한 잔씩 맥주를 받아마셨다.
기분 좋게 술자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술이 약했던 엘프들이 하나둘씩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고,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얼큰하게 취했다.
아저씨를 부축해 집을 나서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배웅한 뒤, 집을 대충 정리하고 2층 내 방으로 가 잠든 것이 기억 전부였다.
'뭐지? 나는 시르엘 님을 방으로 데리고 들어온 적이 없는데.'
나는 잠시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시르엘이 일어나 한 침대에서 얼굴을 마주치는, 그런 끔찍한 상황은 일단 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벗어난 나는 살금살금 문으로 걸어가 방을 빠져나왔다.
방문을 닫기 전, 마지막으로 아이들과 시르엘이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조심스럽게 방문을 닫고 1층으로 내려갔다.
“허허허."
나는 1층의 상황을 목격하고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피렌느를 포함한 모든 엘프가 대충 던져놓은 빨랫감처럼, 거실 이곳저곳 흩어져 있었다.
소파에 위에 잠들어 있는 엘프는 그나마 양반이었고.
테이블의 엎드려 있거나,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평소에 보던 엘프와는 전혀 딴판인 모습이었다.
피렌느가 가장 대박이었는데.
굉장히 특이한 자세로 소파 윗부분에 올라가, 마치 고양이처럼 잠들어 있었다.
이 거실의 혼돈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림과 동시에
임진혁이 나타났다.
분명 같이 맥주를 마셨는데도 그는 숙취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어나셨네요. 형은 숙취 괜찮아요?"
“응. 나는 원래 숙취가 별로 없는 편이라."
"으으. 부럽네요."
나와 대화를 나누던 임진혁은 잠시 후 거실의 혼돈을 목격하고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전부 살아 있는 거지?"
“네.”
엘프 특유의 흰 얼굴에 널브러진 모습이 확실히 시체처럼 보이기는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하던 우리는 일단 손님을 이렇게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와 임진혁은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엘프들을 조심스럽게 옮기기 시작했다.
일단 정상적인 자세로 누울 수 있게 공간을 마련하고, 이불과 베개를 사용해 한 명씩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워낙 호리호리한 체형이라 남녀 할 것 없이 쉽게 옮길 수 있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엘프들은 좀 더 편안한 얼굴로 늦잠을 즐겼다.
"으음. 그러고 보니 한 분 더 계시지 않았냐?"
뜨끔!
임진혁은 여기에 없는 시르엘의 존재를 눈치채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어어...... 2층 손님방에 계시는 게
아닐까요?"
"그런가?"
다행히 임진혁은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나는 일단 위기를 넘겼다는 생각에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부엌에서 임진혁이 타는 커피 향기가 거실까지 흘러나올 때쯤. 누워 있던 엘프 중 피렌느가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으응."
그녀도 어젯밤 과음의 여파로 숙취가 장난 아닌 것 같았다.
평소에 활기찬 모습이 아니라 축 처져 있는 그녀의 모습이 꽤 새롭게 느껴졌다.
"좀 괜찮으세요?"
"으으. 네. 저기. 엘프 차 한 잔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비틀거리는 피렌느를 부엌 테이블 의자에 앉혀놓고, 찬장에 보관 중이던 엘프 차를 꺼내 뜨거운 물과 함께 준비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뜨끈한 김이 올라오는 엘프 차가 완성됐고, 피렌느는 퍼져나오는 엘프 차 특유의 향을 맡으며 숙취의 고통을 흘려보냈다.
"아아. 좀 살 것 같네요.”
그녀는 엘프 차를 홀짝이며 기분이 좋은지 큰 귀를 흔들거렸다.
임진혁은 엘프와 한자리에 있는 것이 어색한지, 산책 핑계를 대고 집을 빠져나갔고. 부엌에는 나와 피렌느만 남게 되었다.
“어제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술을 마시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엘프도 술을 마시나요?"
“네. 엘프의 비법으로 만든 엘프주가 따로 있거든요. 물론 축제나 마을 행사가 아니면 맛보기 힘들지만."
"호오."
엘프주가 있다는 이야기에 나는 살짝 관심을 드러냈다.
엘프 차가 워낙 뛰어난 맛과 향을 선사해줬기 때문에, 엘프주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피렌느와 엘프주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거실에 누워 있던 나머지 엘프들도 하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미리 준비해 뒀던 엘프 차를 하나씩 그들에게 전해줬다.
“감사합니다. 세진 님."
"감사합니다."
그들은 초췌한 몰골의 엘프들은, 진심으로 내게 감사 인사를 하며 따뜻한 엘프 차를 양손으로 받아들었다.
아무래도 피렌느가 그나마 숙취가 덜한 편이었나보다.
다른 엘프들이 아직 제정신을 되찾지 못하는 사이.
평소의 분위기로 돌아온 피렌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어? 시르엘 님은 어디 가셨지?"
-뜨끔. 뜨끔.
그녀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지금쯤이면 일어나실 시간인데, 세진 님. 시르엘 님은 어디 계신지 알고 계세요?"
"어…… 그러니까."
내가 크게 당황하며 대답을 미루는 사이, 피렌느는 내 이상한 반응을 보고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2층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쿵쿵.
잠시 후.
살짝 상기된 표정의 시르엘이 1층으로 내려왔다.
피렌느는 내려오는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게 말을 걸었다.
"어? 시르엘 님. 2층에서 주무신 거예요?"
"으, 응. 그래."
피렌느의 질문에 시르엘은 훨씬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그녀의 수상쩍은 행동에 피렌느가 눈을 가늘게 좁히는 순간,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시르엘 님은 2층 손님방에서 주무셨어요. 제 말 맞죠?"
"으으...… 네. 맞아요. 2층의 손님방에서 잤어요.”
나는 필사적으로 시르엘에게 무언의 신호를 보냈고, 그녀는 한 박자 늦었지만 내 말에 동조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아. 그랬었군요. 시르엘 님이 안
보이셔서 깜짝 놀랐어요."
“시르엘 님도 엘프 차 드실래요?"
“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도 엘프 차를 권하며 화제를 돌렸고, 피렌느의 곤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멀어져갔다.
곤란한 상황은 벗어났지만 상기된
시르엘의 얼굴은 좀처럼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시르엘이 엘프 차를 받아 마시는 사이.
정신을 차린 나머지 엘프들이 그녀 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그녀는 초췌한 엘프들을 안쓰럽게 둘러보며 좀 더 휴식을 취하라고 명했고, 엘프들은 다시 거실로 돌아가서 숙취의
여운을 달랬다.
붉었던 시르엘의 얼굴이 평소처럼
돌아왔을 때쯤.
2층에서 아이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왔다.
가장 먼저 내려온 퓨이가 휙 뛰어올라 내 품에 안겼다.
"퓨우우.……”
"잘 잤어?"
"퓨이."
아직 침대의 온기가 느껴지는 퓨이를 쓰다듬으며, 평소처럼 아침 인사를 나눴다.
품에서 비비적거리는 퓨이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사이, 티아와 이엘이 차례로 1층으로 내려왔다.
아무래도 세이와 모렛은 더 늦잠을 잘 모양인 것 같았다.
"으으, 술 냄새!"
티아는 부엌으로 오자마자 코를 잡으며 질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귀여운 티아의 반응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엘은 아직 잠이 덜 깼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시르엘에게 다가갔다.
시르엘은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이엘을 맞이했다.
"이엘, 잘 잤니?"
"으응. 이모도 편안히 주무셨어요?"
평범한 아침 인사를 나누던 이엘은 한 손으로 시르엘의 손을 잡고, 나머지 손으론 눈을 비비며 말했다.
“어제 이모랑 같이 자서 너무 좋았어요. 옛날에 엄마랑 같이 자는 것 같았어요."
시르엘의 품에서 엄마를 떠올렸다는 말에.
나는 물론이고 시르엘과 피렌느 모두 애틋한 표정으로 이엘을 바라봤다.
다음 말과 행동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이엘은 눈을 비비던 나머지 손으로 내 손을 잡더니, 세상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헤헤. 매일 이렇게 셋이 함께 잤으면 좋겠어요.”
"......?!?!"
"......?!?!"
"......?!?!"
아직 잠이 덜 깬 엘프 소녀의 발언에 부엌에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휘몰아쳤다.
나는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상황을 얼버무려보려 했지만.
이미 시르엘이 누가 봐도 크게 당황한 행동과 표정을 보이면서, 아까보다 훨씬 얼굴이 붉어졌다.
피렌느는 이런 나와 시르엘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슬쩍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이건 빼박 들켰네.'
나는 체념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