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7화
65. 엘프들과 일상(2)
"아주머니가 만들어주신 새참이에 요. 모두 나눠드릴게요."
나는 나무 평상 위에 새참으로 가져온 크레이프와 탄산수로 만든 과일 음료수를 꺼내 놓았다.
“자, 하나씩 드세요."
미리 잘 포장된 크레이프와 탄산수를 한 컵씩 따라 나눠주었다.
열심히 약초밭 일하느라 땀 흘린 엘프들은 고개를 숙이며 새참을 받아갔다.
"으음?!"
"맛있다……”
“안에 뭐가 들어간 거지?"
엘프들은 달콤하고 쫀득쫀득한 크레이프 맛에 감탄했다.
생생한 표정과 함께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은 순수한 아이들의 반응을 보는 듯했다.
아무래도 엘프들은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적었는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상대적으로 얼굴에 감정이 풍부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면 그만큼 아주머니의 음식 솜씨가 좋은 것이라고 해야 하나?'
어르신은 크레이프의 단맛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신의 크레이프를 아이들에게 조금씩 나눠주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처럼 어르신 곁에 달라붙어 눈동자를 빛냈다.
일행이 새참을 먹는 사이 멀리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오늘은 일이 금방 끝나겠는데? 새참만 먹고 가도 되겠어.”
아저씨와 임진혁은 약간 늦게 평상에 합류했다.
약초밭 끝쪽에 있는 배수로를 점검하다가 왔는지, 바지와 몸에는 흙과 낙엽이 붙어 있었다.
"고생하셨어요. 아저씨. 형도 먼저 음료수 한잔하세요."
나는 고생한 두 사람에게 먼저 시원한 음료수를 한 잔씩 챙겨줬다.
"으아! 시원하다."
"고마워. 세진아."
늦게 도착한 두 사람은 몸이 더럽다는 이유로 평상에 앉지 않고 그냥 땅바닥에 주저앉아, 내가 건네는 크레이프와 음료수를 받아먹었다.
잠시 휴식하면서 새참을 먹던 아저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대화를 이끌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주제는 단연 엘프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 엘프분들이 일을 정말 잘 하시더라고. 나랑 진혁이는 방해가 될 정도라니까."
아저씨는 약초밭에서 빛난 엘프들의 실력을 언급하면서 연신 감탄을 쏟아냈다.
"그 정도예요?"
“그럼! 오죽했으면 우리는 약초밭에서 나와서 배수로 점검이나 했겠냐. 거기다 지치지도 않는지 금방금방 일을 끝내버리더라고."
어르신과 임진혁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의 말에 동의했다.
"진혁이는 괜찮은데. 저기 저놈은 진짜 방해가 되는 수준이지."
"아이. 어르신 또 왜 이러세요? 저 그 정도는 아닙니다."
"아니긴 뭘 아냐. 너는 내일부터 약초밭 옆에서 돌이나 나르고, 새로 밭 갈아엎을 준비나 해라. 약초밭에 얼씬도 하지 말고.”
옆에서 밭이나 갈라는 어르신의 호통에 아저씨는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쭉 내밀고 툴툴거렸다.
그 모습에 나와 임진혁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엘프들 쪽으로 향했다.
피렌느를 포함한 5명의 엘프들은 아직도 크레이프를 소중히 꼭 쥐고 맛보는 중이었다.
덩치는 성인만 했는데, 마치 초등학생 여러 명이 맛있는 간식을 아껴먹는 느낌이었다.
나는 천진난만한 엘프들의 모습을 보면서 처음 약초밭에 도움을 주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시르엘과 피렌느만 간간이 집을 방문하던 시절.
피렌느는 집에 있는 물건과 음식들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시르엘이 실례라며 피렌느를 말리려 했지만, 호기심이 넘쳐나던 그녀를 말릴 수는 없었다.
-세진 님.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와! 도대체 무슨 원리로 움직이는 거죠?
-세진 님! 세진 님!
그녀의 왕성한 호기심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지치게 만들 정도였다.
그리고 애초에 내가 TV나 휴대폰의 원리를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피렌느는 먹는 것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았는데, 과자나 인스턴트 커피, 티백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
끝없는 질문에 지친 나는.
그녀가 질문을 던지기도 전에 줄 수 있는 모든 제품을 그녀 품에 안겨주었다.
- 이렇게 많이 주셔도 돼요?
-네, 저는 괜찮으니까, 다 가져가서 다른 분들이랑 나눠 드세요. 그리고 제발 질문 좀 그만 해요. 제발.
- 헤헤. 감사합니다.
다행히 그녀는 내 말을 들어주었고
더는 질문으로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
그 뒤로도 나는 피렌느를 통해 여러 가지 것들을 엘프들에게 전해줬다.
엘프들도 피렌느를 통해 숲속의 귀한 약초들을 보내왔으니 일종에 거래와 비슷했다.
그런데 어느 날 시르엘과 피렌느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 세진 님. 더는 가져다 드릴 약초가 없어요. 너무 많이 채취하면 숲 속의 다른 동물들이 피해를 보거든요.
-아. 괜찮아요. 이미 충분히 많이
받았으니까. 이것들은 그냥 가져가세요.
- 아뇨.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런 귀한 물건들을 받을 수는 없어요.
-저번에도 설명했지만 그렇게 귀한 물건은 아닌데……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요.
시르엘이 말한 대가는 바로 엘프의 노동력이었다.
이미 내가 약초밭을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시르엘은 엘프들이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큰 기대감 없이 엘프들을 약초밭에서 일하도록 했다.
그런데 효과는 굉장히 뛰어났다.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약초들의 성장 속도도 빨라지고, 더욱 튼튼하고 효과가 좋은 약초들이 쏟아져나왔다.
약초 재배에 뛰어난 식견을 가진 어르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실력.
이런 엘프들의 활약에 힘입어 어르신은 약초밭을 더 늘릴 계획을 짜고 있었다.
엘프들이 계속 일을 도와준다면, 지금보다 뛰어난 약초를 더 많이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이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밭을 늘리는 일은 잠시 미뤄두는 중이다.
“자, 그럼 나머지 일을 마무리하죠.”
“저도 도울게요."
나는 아저씨와 임진혁과 함께 일어섰다. 시르엘과 어르신, 아이들은 평 상에서 쉴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는 다시 각자의 일을 시작했다.
* * *
저녁 시간이 되기 전.
약초밭에서 일을 끝내고 모두 다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어르신은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고, 나머지 사람들만 우리 집 앞에 모여 들었다.
“세진 님.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또 올게요."
시르엘과 피렌느가 먼저 작별인사를 하자, 뒤에 있던 엘프들도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만요. 시르엘 님."
"......?"
"괜찮으시면 저녁이라도 같이하시죠. 다른 엘프분들도 모두.”
“네?”
“최근에 약초밭에서 열심히 일해주셨는데, 식사라도 한번 대접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계획에 없던 초대를 하자 시르엘은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반면 피렌느나 다른 엘프들은 살짝 기대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시르엘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옆에 있던 이엘이 시르엘 곁으로 다가갔다.
"이모. 집에서 저랑 같이 식사해요. 네?”
"으으음.”
이엘도 나서서 부탁하자 시르엘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세진 님께 민폐를 끼치는 게 아닐지?"
"괜찮아요. 식사 한번 대접하는 정도인데.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 안 하셔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럼 세진 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시르엘이 내 초대를 수락하자, 뒤에 있던 피렌느와 엘프들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는 함께 따라 들어오는 엘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응? 뭐야? 오늘은 엘프들도 같이
밥 먹는 거야?"
“네. 제가 초대했어요."
"하하. 잘했다. 세진아.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
나는 땀 흘린 엘프들을 2층으로 데려가 씻을 수 있게 해주었다.
깨끗한 수건과 세면용품을 건네주자 엘프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행히 피렌느가 샤워실과 세면용품 사용법을 알고 있어서 따로 설명은 하지 않아도 됐다.
엘프들을 2층으로 안내하고 1층으로 내려가니, 아주머니가 속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진아, 손님을 데리고 올 거면 미리 말하지. 그러면 내가 준비를 다 해놨을 텐데.”
"괜찮아요. 그리고 어차피 시켜 먹으려고 했어요.”
“그래도 그렇지."
“다음에 또 초대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그때는 미리 말씀드릴게요."
아무래도 계획된 초대가 아니다 보니, 아주머니는 미리 준비하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었다.
나는 다음에 또 기회가 있을 거라며 아주머니를 달래면서 저녁 식사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엘프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최대한 많은 종류의 음식을 푸짐하게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들이 하나씩 도착할 때쯤. 아직 촉촉한 기운이 남아 있는 엘프들이 차례로 2층에서 내려왔다. 물기에 젖어 기분 좋은 향기를 뿜어내는 엘프들.
워낙 선남선녀다 보니 1층의 분위기가 확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엘프들의 미모에 놀라고 있을 때.
엘프들은 순식간에 준비된 화려한
음식들을 보며 놀라고 있었다.
"어서 자리에 앉으세요. 방금 와서 식기 전에 드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얼떨떨해하는 엘프들을 손수 이끌어 자리에 앉혔다.
치킨,피자, 스파게티 같은 인스턴트 음식부터. 초밥, 보쌈, 월남쌈까지.
식탁을 꽉 채운 음식들이 엘프들의 눈을 어지럽혔다.
전부 처음 보는 음식들이라 당황해 하는 엘프들을 위해, 나는 손수 먹는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내가 먹는 모습을 본 엘프들은 어색한 움직임으로 음식들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음식들을 즐기기 시작했 다.
음식이 꽤 입맛에 잘 맞았는지. 호기심 대장인 피렌느도 질문 던지는 것을 잊어버리고 음식을 먹는 데 집중했다.
아까 새참으로 크레이프를 먹을 때보다 더 생생한 표정을 보여주는 엘프들.
그런 엘프들을 보면서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마른 체형이라 많이 먹지 못할 것 같이 보였는데, 엘프들은 준비한 음식들을 깔끔하게 모두 비워냈다.
오히려 몇몇은 눈빛에 약간 아쉬워 하는 기색도 보이는 것 같았다.
시르엘은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귀를 축 늘어뜨리고 포만감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만족한 표정을 하는 시르엘에게 다가갔다.
“입맛에는 좀 맞으셨어요? 엘프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이것저것 좀 준비해 봤는데.”
그녀는 내 질문에 화들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죄, 죄송해요. 저희가 너무 많이 먹었죠?"
"아뇨, 괜찮아요. 어차피 모두 엘프 분들을 위해서 준비한 음식인데요. 오히려 맛있게 드셔주는 것 같아서 안심했습니다."
".......”
시르엘은 너무 정신없이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얼굴을 붉힌 채 내 눈치를 봤다.
평소에는 일행을 이끄는 리더로서 위엄 있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가끔 보여주는 어린아이같이 순수한 모습은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다.
나는 쑥스러워하는 시르엘을 두고
피렌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식사는 괜찮으셨어요?"
“너무 맛있었어요. 이런 음식들을 순식간에 준비하실 수 있다니. 세진 님은 혹시 마법사인 건가요?"
“하하하. 마법사는 아니고. 그냥 다른 분들에게 음식을 주문했을 뿐입니다."
"헉! 그러면 혹시 귀족이신 건가요? 어쩐지……”
내 의도와는 다르게 피렌느의 오해가 점점 깊어지는 동안, 뒤쪽에서 쾌활한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쿵!
"엘프분들 벌써 배가 다 찬 건 아니겠지? 아직 중요한 게 남았는데 말이야."
“후모! 후모!”
아저씨는 모렛이 만든 커다란 맥주 저장통과 함께 등장했고, 엘프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저씨가 가져온 맥주 저장통을 바라 봤다.
"엘프들은 술을 잘 마시려나?"
아저씨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엘프들을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