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6화
65. 엘프들과 일상(1)
생명의 샘이 있는 지하 통로.
나와 시르엘은 샘 주변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보통은 이런 식으로 능력을 사용해요.”
시르엘은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세계수를 가꾸는 능력'을 직접 선보였다.
그녀가 생명의 샘에 의식을 집중하자, 주변에 신비한 기운들이 순식간에 모여들었다.
어느 정도 기운이 충만해지자 다시 빠르게 흩어졌다.
이렇게 기운이 모였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더니 생명의 샘에는 아주 조금 샘물이 불어났다.
"오오.......”
처음으로 샘이 불어나는 장면을 목격한 나는 입을 살짝 벌리고 감탄하는 소리를 냈다.
“하아…… 하아..…."
3분 정도 능력을 사용하던 시르엘은 거칠게 호흡을 내뱉으며 집중을 깨뜨렸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이마에는 땀이 살짝 땀이 맺히고, 얼굴에는 피로함이 가득했다.
"괜찮으세요."
“네,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마을에 있을 때도 이 정도는 거뜬하게 해냈었거든요."
내 걱정스러운 물음에 시르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줬다.
그녀는 약간 불어난 샘물을 바라보더니 아쉬운 표정을 했다.
“저는 겨우 이 정도지만, 아르엘 언니는 하루에 몇 시간 동안 능력을 사용하기도 했어요."
"몇 시간이요?”
“네. 제가 어렸을 때, 언니는 매일 세계수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셨거든요. 기억하기로는 그렇게 힘들어 하지도 않으셨던 것 같아요.”
나는 아르엘과 시르엘의 능력 차이를 실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 비슷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시르엘이 있으면서 굳이 아르엘을 찾아 나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겨우 이 정도로 도움이 됐을지 모르겠네요."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
그녀가 능력을 사용하는 동안. 나도 내 나름대로 그 원리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을 많이 했는데.
워낙 복잡한 기운의 흐름에 능력이 사용된 시간도 워낙 짧아서, 나는 제대로 상황을 살펴보지 못했다.
'분명 줄어들기만 했던 샘물이 다시 불어났어. 이 능력의 원리만 알아낼 수 있다면……’
아쉽기는 했어도.
땀으로 촉촉해진 머리와 피로감이 가득한 시르엘을 앞에 두고, 그런 기색을 내보일 수는 없었다.
오로지 나를 돕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그녀가 최선을 다했음을 알고 있기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항상 아르엘 님의 신비한 능력을 궁금해했었는데, 시르엘 님 덕분에 해결됐네요.”
"그런가요?"
도움이 됐다는 내 이야기에 그녀는 잠시 피로함도 잊어버리고,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가끔 제가 능력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걱정 마세요. 세진 님이 부탁하신다면 언제든지 보여드릴게요.”
그녀는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힘찬 모습과 함께 결의를 다졌다.
그 모습이 왠지 귀여운 이엘을 연상케 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침착하자. 시르엘 님은 121 세야.'
나는 억지로 웃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종종 부탁드릴게요."
“네. 맡겨만 주세요."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시르엘과 나는 생명의 샘에서의 일을 끝내고 땅속 통로를 빠져나왔다.
-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시르엘 님.
"아니에요. 나무 정령님. 오늘도 맞이해 주셔서 감사해요."
나무 정령은 정감넘치는 표정과 말투로 시르엘을 대했다.
마치 예전에 아르엘을 대하는 듯했다.
-너도 수고했다.
"아뇨, 시르엘 님이 고생을 다 하셨죠. 그럼 오늘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가볼게요. 나무 정령님."
우리는 나무 정령에게 인사를 하고 숲을 빠져나왔다.
“오늘도 저희 집으로 가실 거죠?"
“네.”
그리고 자연스럽게 통나무집으로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르엘은 우리 집에 방문하는 것을 어색해 했었는데, 지금은 아주 자연스럽게 통나무 집을 드나들었다.
나도 시르엘이 집에 방문하는 것이 굉장히 익숙해져서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정도였다.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호숫가 길을 따라 통나무 집을 향해 걸어갔다.
-철컥!
-쪼르르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문 앞으로 뛰어오는 아이들.
"시르엘! 왔어?"
“어서 오세요. 이모!"
"퓨이!"
"후모!"
순식간에 시르엘 주변을 둘러싼 아이들은 그녀의 옷을 잡아당기며 집 안으로 이끌었다.
"잠시만. 얘들아."
시르엘은 약간 당황하면서도, 아이들의 환대가 싫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나는 시르엘과 아이들이 많이 가까워진 모습을 보면서, 훈훈함과 씁쓸한 감정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뀨우뀨우우?
"그래. 세이야. 너밖에 없다."
-그릉. 그르릉.
유일하게 내 곁에 남아 있는 세이를 품 안에 끌어안으며, 나도 시르엘과 아이들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서 와! 딱 맞춰서 왔네."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고 계시던 아주머니가 나와 시르엘을 반갑게 맞이해 줬다.
우리는 달콤하고 맛있는 향기에 이끌려 부엌 쪽으로 향했다.
“뭐 하고 계신 거예요?"
“밭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 주려고, 크레이프를 만드는 중이었어."
아주머니 옆에는 벌써 잘 구워진 크레이프 반죽들이 쌓여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금방 하나 만들어 줄 테니까."
쫀득쫀득하게 구워진 반죽 위에 생크림, 초코맛 잼을 얹고, 예쁘게 잘린 딸기와 바나나가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견과류까지 더해진 뒤, 조심스럽게 반죽 끝을 말아 먹기 좋게 모양을 만들어냈다.
"자, 완성!"
"와아……”
"퓨이! 퓨이!"
“후모!"
예쁜 모양과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흘러나오는 크레이프가 완성되자, 아이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시르엘 역시 매력적인 자태를 뽐내는 크레이프에 눈을 떼지 못 했다.
진한 미소를 지은 아주머니는 완성된 크레이프를 시르엘 쪽으로 내밀었다.
시르엘은 자신 앞에 놓인 크레이프를 보며 큰 귀가 떨릴 정도로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한국어를 할 수 없어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크레이프와 자신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아마 자신이 먹어도 되냐고 손으로 묻는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끄덕여줬고, 시르엘은 조심스럽게 크레이프를 받아들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에 정신을 못 차리던 그녀는 천천히 입가로 크레이프를 가져갔다.
- 우물우물.
처음으로 크레이프 맛을 본 시르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귀를 움찔거리며 환상적인 경험을 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입 더 크레이프를 맛본 그녀는 흥분한 표정과 말투로 엘프어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말 너무 맛있어요.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시르엘은 아주머니가 엘프어를 알아듣지 못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환상적인 맛의 크레이프 찬양을 멈추지 않았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과 말투를 통해서 충분히 의미를 전달 받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는 시르엘의 반응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먹을래!”
"퓨이! 퓨이!"
“후모!"
시르엘의 반응을 본 아이들은 기대감으로 가득한 눈동자를 빛내기 시작했다.
그 눈빛에 힘을 받은 아주머니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아주머니는 순식간에 아이들 입에
크레이프를 하나씩 물려주고, 마지막으로 나에게도 예쁜 모양의 크레이프를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단 음식이나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취향이라 별로 큰 기대감 없이 크레이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첫맛은 쫀득쫀득하고 고소한 크레이프 반죽이 느껴졌고, 그 뒤로 달콤한 초콜릿과 바나나 맛, 새콤한 딸기, 바삭한 견과류의 식감을 줄지어 맛볼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단맛이 강했지만, 고소하고 쫀듯한 크레이프 반죽과 새콤한 딸기 맛이 단맛과 조화를 이루니 깔끔한 크레이프를 맛볼 수 있었다.
“정말 맛있네요.”
"그러니? 다행이다. 세진이는 단 거 안 좋아하니까 싫어할 줄 알았는데.”
“단맛이 조금 세긴 한데. 쫀득쫀득한 크레이프 반죽이 예술이네요.”
“호호, 신경 써서 만들었단다."
아주머니는 내 칭찬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입을 가리고 소리 내 웃음을 흘렸다.
-툭. 툭.
한창 크레이프를 맛보고 있는데, 누군가 팔을 찌르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세진 님."
"......?"
“저 하나만 더 먹으면 안 될까요?"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 시르엘.
겉모습은 아르엘인데, 하는 행동은 훨씬 어린 이엘과 닮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푸흡. 푸하하하!"
"......"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는 내 모습에.
시르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붉혔다.
***
나는 시르엘과 아이들을 이끌고 약초밭으로 향했다.
시르엘은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아까 내가 크게 웃음을 터뜨린 뒤로 계속 저 상태였다.
물론 새침한 표정을 하고서도 아주머니에게 크레이프를 한 개 더 받아 먹었다.
내가 들고 있는 바구니에는 금방 아주머니가 만들어낸 따끈한 크레이프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아주머니는 뒷정리를 위해 남았고, 우리들에게 배달을 부탁한 것.
"할아버지!"
"퓨이!"
“후모!"
멀리서 평상에 앉아 있는 어르신의 모습이 보이자, 아이들은 신나서 뛰기 시작했다.
"어이쿠. 천천히 오너라. 넘어질라.”
달려오는 아이들의 모습을 어르신은 반가움 반, 걱정 반 섞인 표정으로 바라봤다.
어르신의 염려 덕분인지 아이들은 아무도 넘어지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고, 어르신은 반가운 감정을 가득 담아 아이들을 한 명씩 쓰다듬어 줬다.
나는 아이들보다 한걸음 늦게 어르신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어르신."
생명의 샘을 조사하느라 일찍 밭일에 참여하지 못한 죄송함의 표현이었다.
"괜찮다. 바쁜 일이 있다고 들었다. 어차피 힘든 일은 저기 있는 사람들에게 시켰으니 상관없어."
어르신의 시선 끝에서 열심히 밭일하는 엘프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굉장히 일을 잘 배워. 한 번 알려주면 금방 따라 하더라고."
"그런가요?"
“그래. 나 대신 뒤에 계신 분한테 고맙다고 전해주거라. 덕분에 밭일을 쉽게 했다고.”
나는 어르신의 부탁대로 시르엘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새침한 표정을 짓던 시르엘은 표정을 바꿔 인사를 받아들였다.
“다행이네요. 도움이 됐다니."
그리고 그녀는 어르신을 향해서도 살짝 고개를 숙였다.
어르신도 담담한 표정으로 같이 살짝 고개를 숙여줬다.
“아앗! 세진 님! 시르엘 님!"
약초밭 한구석에서 일하고 있던 엘프 피렌느는 나와 시르엘을 발견하고 금방 이곳으로 달려왔다.
"흐음! 맛있는 냄새. 세진 님. 뭐예요? 뭘 가지고 오신 거예요?"
“밭일로 고생하시는데. 새참을 좀 가지고 왔어요."
"새참?"
"일하다가 중간에 잠깐 쉬면서 먹는 음식을 새참이라고 해요."
"오오. 그런 게 있었네요?"
피렌느는 눈을 빛내며 내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바라봤다.
그녀의 뒤를 따라 일을 멈춘 나머지 엘프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시르엘 님."
“모두 수고하셨어요."
엘프들은 먼저 시르엘에게 공손히 인사를 전한 뒤, 나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옆에서 새참이 든 바구니를 콕콕 찔러보는 피렌느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