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5화
64. 세계수의 방문자 (4)
시르엘에게서 진실을 전해 들은 나는 그렇게 좋은 표정은 짓지 못했다. 어쨌든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엘을 데려가려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그녀도 그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번에 저희가 무례한 짓을 벌였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하지만 그만큼 저희에게도 굉장히 중요하고 급한 일이에요.”
“세계수를 살리는 일이요?"
“네. 맞아요. 저희 엘프들은 대대로 세계수의 축복을 받아 생활해 왔어요. 세계수의 운명이 엘프들의 운명이나 다름없어요."
시르엘의 말을 듣던 나는 한가지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잠깐만요. 세계수를 보살피는 일이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아르엘 님은 왜 마을을 떠난 거죠?"
평소에 겪어본 아르엘의 성격상 종족의 운명이 달린 중대한 일을 아무 이유 없이 내팽개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직 듣지 못한 속사정이 있을 거라 예상했고, 내 예상대로 시르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저도 그때 상황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르엘 언니는 이엘을 지키기 위해서 도망쳤던 것 같아요."
"......?"
"만약 그때 언니가 이엘을 임신하고 있었다면, 이엘을 살리기 위해서는 마을을 빠져나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 거예요."
“그게 무슨 뜻이죠?"
그녀는 무거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세계수를 가꾸는 능력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있는데, 대부분 첫째가 그 능력을 온전히 물려받아요. 제가 언니보다 약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죠.”
"흐음."
“문제는 이엘의 아버지였어요. 이엘의 아버지는 평범한 엘프가 아니라 인간의 피를 물려받은 하프 엘프, 마을 어르신들은 만약 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인간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온전히 능력을 물려받지 못할 거라 생각했어요.”
"……..”
"만약 둘 사이에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마을에서 먼저 눈치챘다면......"
시르엘이 직접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아르엘이 마을을 도망쳐야 했던 끔찍한 이유는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뱃속의 이엘을 지켜내기 위해 마을을 떠나 이곳에 숨어든 것이었다.
계속된 무거운 이야기에 나와 시르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 뭔가를 생각했고, 시르엘은 내 눈치를 보며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계속되던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나였다.
"하아. 사정은 대충 알았겠습니다. 그럼 시르엘님이 계속 이곳에 머 는 이유가 뭐죠? 어떻게든 이엘을 마을로 데려가겠다는 건가요?"
약간 싸늘함이 느껴지는 내 질문.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양손을 내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에요. 계속 기다린 이유는
제대로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었어요."
“……”
"그리고 이엘과도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언니와 어떻게 지냈는지, 또 어떤 즐거운 일들이 있었는지."
시종일관 굳어있던 시르엘의 표정에 처음으로 미소가 돌기 시작했다.
“마을 어르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
“저는 아르엘 언니가 절대 세계수를 버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해요. 비록 마을은 떠났어도 항상 세계수를 생각하고 있었을 거라고."
그녀는 언니를 떠올리는 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봤다.
"제가 세계수의 흐름을 따라 누군가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저는 당연히 언니의 흔적이라 확신했는데, 그게 세진 님이 한 일이라는 말을 듣고 정말 많이 놀랐어요."
“크게 실망하셨겠네요."
"실망했다기보다는 많이 놀랐어요. 그리고 아까 왜 이곳에 남아 있냐고 물으셨죠?"
“네. 그랬죠.”
“처음에는 세계수를 구하기 위해 언니가 남긴 방법이 이엘 일 거라 생각했는데, 어쩌면 세진 님이 저희를 위해 이곳에 남긴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거든요."
“제가요?"
내가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시르엘은 그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저도 확실한 건 아니에요. 그냥 처음 세진 님을 만났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좋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쩝......"
약간 듣기 민망한 이야기에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세진 님, 괜찮으시다면 이곳에 잠시 머물 수 있게 해주실래요? 멀리 떨어진 경계 밖이라도 괜찮아요. 가끔 이엘을 만날 수 있고 이렇게 한 번씩 세진 님과 대화를 나눌 수만 있으면 돼요."
"흐음."
시르엘의 부탁에 나는 침음성을 흘렸다.
처음에는 그녀를 포함한 엘프들을 이곳에서 떠나보내려 했었는데, 모든 것을 진실하게 밝히는 그녀의 태도에 약간 마음이 흔들렸다.
거기다 풀 죽어 있는 이엘을 생각하면 매몰차게 그녀를 내쫓을 수 없었다.
"하아. 알겠어요. 원하시는 만큼 그 곳에 머무르셔도 돼요. 어차피 지금 계시는 곳이 제 땅도 아니고……”
“감사합니다, 세진 님."
"대신!"
"......"
“제 가족들이 머무는 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시르엘 님. 딱 한 분뿐입니다. 다른 엘프들은 제 허락 없이는 절대 못 들어올 겁니다.”
"알겠어요. 세진 님이 정하신 대로 따를게요."
시르엘은 이곳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어떤 요구도 받아들일 기세였다. 왠지 갑질을 하는 것 같아 약간 찝찝한 마음도 생겼지만, 가족의 안전을 생각하면 마음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대충 이야기를 끝낸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이렇게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뇨. 뭘..….”
“그럼 저는 이만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볼게요."
“시르엘 님. 잠시만요."
"......?"
“흠흠. 저번에 그렇게 가시고 난 뒤에, 이엘이 많이 아쉬워했는데. 지금 이엘을 만나보실래요?"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지금 가보죠.”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 섰고, 시르엘은 기대감반, 불안감 반인 표정으로 내 뒤를 따랐다.
****
-철컥!
-쪼르르르.
현관문 여는 소리와 함께 언제나처럼 아이들이 마중을 나왔다.
"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티아가 시르엘을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르엘은 살짝 어색한 표정으로 티아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티아 공주님."
"으, 응, 안녕.”
마지막에 좋지 않게 헤어졌던 탓에 티아 역시 어색하게 인사를 받아줬다.
"퓨이?"
“후모.”
- 뀨우웃?
뒤이어 마중 나온 퓨이와 모렛, 세이도 엉거주춤 시르엘을 바라봤다.
나는 일단 아이들과 시르엘을 이끌고 이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엘을 만나기 전, 중간에 임진혁과도 마주쳤는데.
시르엘이 먼저 임진혁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꽤 정중함이 느껴지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행동에 임진혁도 약간 미묘한 표정을 한 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줬다.
이엘은 거실에 혼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시르엘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이엘."
"......!"
자기를 부르는 목소리에 이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두 눈으로 시르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빠르게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시르엘은 자연스럽게 이엘을 안아 주면서 눈물을 글썽거렸다.
"이엘, 미안해.”
"괜찮아요. 시르엘 이모."
둘 사이에 피어오르는 애틋한 분위기에 나와 아이들은 물론, 임진혁까지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
시르엘이 나에게 균열 경계에서 머물러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뒤.
약간은 기묘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가끔 시르엘을 집으로 불러 오려고 했었는데. 이엘이 시르엘을 워낙 좋아하고, 다른 아이들 역시 그녀와 친해지게 되면서. 그녀는 하루 대부분을 우리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시르엘 덕분에 이엘은 다시 웃음을 되찾았고, 다른 아이들도 그녀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엘프와 약간은 어색한 감정이 남아 있던 임진혁도.
최근에는 그녀에게 선뜻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임진혁과 내가 바쁠 때는 대신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해서 나에게도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한가지 신경이 쓰이는 점은.
이엘의 관심이 너무 시르엘에게 쏠리는 것 같아서, 상대적으로 약간 외로움이 느껴진다는 것만 빼면 다 괜찮았다.
한편.
시르엘과 함께 이곳을 찾아왔던 엘프들은 일행을 반으로 나눠서 따로 행동하게 되었다.
재수 없는 카셀르를 따르는 엘프들은 일단 이곳을 떠나 마을로 되돌아 갔다. 아르엘과 이엘에 관한 소식도 전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 위 해서라고 했다.
남은 엘프 5명은 계속 경계 밖에 머물면서 시르엘과 함께 행동했다.
처음에는 원래 약속했던 대로 시르엘의 출입만을 허용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엘프들의 출입도 부분적으로 허용하기 시작했다.
특히 5명의 엘프 중에 '피렌느'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엘프가 가장 많은 출입을 했는데. 성격이 좀 많이 특이했다.
“이건 어떻게 쓰는 물건이죠?"
"와아! 도대체 무슨 원리로 그림이
움직이는 건가요?"
"세진 님! 세진 님!"
".….."
휴대폰, TV, 노트북......
그녀는 굉장히 현대 문물에 관심이 많았다.
딱히 물건에 욕심을 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너무 왕성해 굉장히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성격도 굉장히 활달하고, 외향적이라 그런지 금방 아이들과 친해졌고, 친해지기 힘든 분위기의 임진혁에게도 서슴없이 친한 척을 했다.
그렇다고 귀찮게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매번 집을 방문할 때마다 숲에서 채취한 귀한 약초, 열매들을 한 아름 품에 가져와 선물했고, 내가 약초밭에서 기른 약초들 손질하는 데 직접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 오만한 표정의 카셀르보다는 훨씬 괜찮은 엘프였다.
자연스럽게 시르엘과 피렌느의 왕래가 잦다 보니, 금방 다른 사람에게도 이 소식이 전해졌다.
가장 먼저 엘프들을 보게 된 것은 역시 정씨 가족들이었다.
그래도 평소에 이엘을 자주 봐서 그런지, 엄청나게 놀라거나 신기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외국에서 온 예쁜 손님 정도로 인식하는 것 같았다.
“어머, 엘프들은 어쩜 이렇게 다 피부가 고울까?"
"그러게. 세진 오빠. 저 엘프분한테 무슨 비결이 따로 없는지 물어봐 줘요.”
"물어보긴 뭘. 글쎄. 그냥 타고난 게 아닐까?"
"나이도 그렇게 안 많아 보이는 데.”
나와 아주머니 그리고 아윤까지 한국말로 대화를 나누자, 옆에서 듣고 있던 시르엘과 피렌느가 궁금한 표정을 지었고.
역시 궁금한 것은 못 참는 피렌느가 곧바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세진 님. 저분들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우리 쪽으로 보고 말씀하신 것 같은데."
“아…… 피부가 굉장히 좋다고, 부럽다고 하셨어요."
"헤헤. 그런가요? 저나 시르엘 님은 아직 젊은 편이라서."
"아! 피렌느 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저는 79살이고, 시르엘 님은 121살이세요."
"......"
생각지도 못한 숫자에 내가 넋 놓고 있는 사이.
아윤이가 나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세진 오빠. 저분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아.…… 아니. 그냥 칭찬해 줘서 고맙데."
아무튼.
시르엘을 포함한 엘프들은 조금씩 내 일상에 녹아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