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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194화 (194/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4화

64. 세계수의 방문자(3)

뒤쪽에서 들려오는 외침과 함께 티아가 두둥실 앞으로 떠올랐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짓이야!"

처음에 엘프들은 티아의 모습을 보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나섰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티아가 조금씩 숨겨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자, 엘프들의 얼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티아의 몸 주변에는 아르키트 왕가를 상징하는 문양이 드러났고, 제대로 눈을 뜨기 힘들 정도의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그 광경을 목격한 엘프들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든 무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거나, 몇몇은 한쪽 무릎을 꿇기도 했다.

"크윽!"

가장 기세등등하던 카셀르도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전의를 상실한 모습을 보였다.

시르엘 역시 크게 당황하면서 티아의 행동을 주시했 다.

티아는 아르키트 왕국 공주님의 위엄을 제대로 뽐내면서 엘프들에게 따끔하게 말했다.

"아무리 이엘의 친척이라고 해도 세진과 내 가족들에게 함부로 구는 행동은 용서 못해. 당장 너희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

"크윽!"

겨우 버티고 있던 카셀르는 강력한 티아의 위엄에 결국 무릎을 꿇었고,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단 한 번의 외침으로 모두를 굴복시킨 티아는 엄숙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슬쩍 내 쪽을 바라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나 잘했어?' 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나도 미소를 지으며, 티아를 향해 작게 엄지를 들어 보여줬고.

공주님은 잠시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이다가 다시 엄숙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모든 엘프들이 티아의 기세에 짓눌려 어찌할 줄 모르는 사이, 시르엘이 앞으로 나서 티아에게 아주 공손하고 간절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티아 님, 죄송합니다. 일행이 잠시 실수를 저질렀던 것 같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흥!"

아까는 시르엘과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던 티아였지만, 카셀르의 선을 넘은 행동 탓인지, 시르엘의 간절한 태도에도 티아는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시르엘은 차가운 티아의 태도에 귀를 축 늘어뜨리고, 이번에는 내 쪽으로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 역시 티아 못지않게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나는 잠시 티아를 뒤로 물러나게 했다.

"티아. 잠시만."

"알았어."

“시르엘 님.”

“네. 말씀하세요, 세진 님."

"죄송하지만 더는 손님으로 받아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저......"

티아와 같은 나의 냉정한 태도에 그녀는 크게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상당히 안쓰러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이미 싸늘히 식어버린 내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다.

가족을 향해 무기를 꺼내든 존재들과 더는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계속 제 말을 따라주시지 않는다면, 손님이 아닌 다른 취급을 받게 되실 겁니다."

"......"

시르엘은 한껏 어두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엘프들을 다독여 일행을 정비한 뒤, 우리 쪽을 향해 작게 고개를 숙이고 이곳을 떠나갔다.

엘프들의 뒷모습이 숲속으로 사라지자, 내 뒤에 서 있던 이엘이 내 한쪽 손을 꼭 잡았다.

고개를 돌려 내려다보니 이엘이 슬픈 표정으로 엘프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착잡한 기분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아...….”

평소처럼 생명의 샘을 살펴보던 나는, 잠시 집중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한숨을 내쉬느냐?

"......."

나무 정령의 물음에 나는 침묵을 유지했지만, 그는 이미 답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이 질문을 이어나갔다.

- 균열 밖에 있는 엘프들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하아아...... 알고 계셨네요."

-당연히 모를 수가 없지.

엘프 일행이 이곳을 방문했다가 떠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으나, 끝에 좋지 않은 일로 인해서 찝찝한 인연으로 끝나버린 뒤.

일상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엘프를 직접 만난 이엘은 그 뒤로 풀이 죽어 생활했다.

혹시 어디가 아픈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이엘은 우울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엘프 무리를 쫓아내는데 적극적이었던 임진혁과 티아는 이런 이엘의 모습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내뱉은 한숨은 이엘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게 매몰차게 내쫓겨진 엘프 일행.

그들은 그날 이후로 계속 균열 경계 밖에 머물면서 무엇인가를 기다렸다.

억지로 균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한다든가, 어떤 특별한 행동을 보이지 않고 그저 경계 밖에 조용히 머물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금방 떠날 줄 알았는데, 그들은 계속 그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 다시 한번 그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떻겠느냐?

나무 정령은 나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그들과 다시 대화를 나눠볼 것

을 권유했다.

"…….”

나는 나무 정령의 권유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도 카셀르를 포함한 엘프들이 무기를 꺼내 들던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만약에 우리가 그들을 억제할 힘이 없었다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있었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하지만 반대로 카셀르를 말리려고 했던 시르엘에 대해서는 약간 미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를 공격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같은 일행을 말리려고 했었다.

거기다 이엘은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이엘에게 아빠라 불리며

그녀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지만, 실제로 피를 나눈 가족인 시르엘을 내가 막아도 되는지 혼란스러웠다.

머리가 복잡한 와중에 나도 모르게 생명의 샘 쪽으로 눈길이 흘러갔다. 멍하니 샘물을 바라보다가 처음에 는 아르엘이 떠오르더니, 자연스럽게 그녀와 닮은 시르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나무 정령에게 짧은 인사를 남기고 나는 숲을 빠져나와 호수 반대편으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은 길을 잠시 헤매다, 처음으로 엘프 일행을 만났던 장소에 도착했다.

내가 일부러 인기척을 낸 덕분인지 균열 경계 반대편 숲속에서 시르엘과 엘프들이 곧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

"......"

한동안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시르엘은 내 눈치를 보느라 쉽게 입을 떼지 못하고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아…….”

움찔!

커다란 내 한숨 소리에 그녀는 큰 귀가 팔랑거릴 정도로 온몸을 움찔거렸다.

“왜 아직 여기 계신 거예요? 마을에 급한 일이 있으시다고 하셨잖아요."

"......"

“하실 말씀 없으시면 저는 다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앗! 그게..….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겠다는 말에 깜짝 놀란 시르엘은 양손을 허우적거리더니 억지로 입을 열었다.

“말씀드릴게요. 전부 말씀드릴 테니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주세요."

모두 말하겠다는 시르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첫 만남과는 다르게 조건을 내걸었다.

"알겠어요. 대신 시르엘 님만 이곳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다른 엘프들은 안됩니다.”

“저 혼자만 들어가면 괜찮은 거죠?"

시르엘만 들어올 수 있다는 조건에 옆에 있던 카셀르를 포함한 엘프들이 난색을 보였다.

“안 됩니다. 시르엘 님. 혼자서 들어가시는 건......”

“그렇습니다. 저희들의 역할은 시르엘 님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하게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다.

“세진 님의 호의를 먼저 저버린 건 우리였어요. 이제는 우리가 먼저 세진 님께 믿음을 보여줘야 해요.”

시르엘은 주변 엘프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서 균열 경계를 넘어 나를 따라왔다.

별다른 거부 없이 선선히 따라나서는 그녀의 모습에 내심 놀랐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길을 이끌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내 통나무 집이 아니라, 아르엘의 집으로 향했다. 다른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다.

함께 아르엘의 집 안으로 들어선 뒤, 나는 그녀를 테이블 의자에 앉혀두고 자연스럽게 부엌 찬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찬장에는 이곳에서 머물렀던 스승님의 흔적인 인스턴트식품들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스승님을 떠올리며 잠시 쓸쓸한 미소를 짓다가, 찬장에서 차와 컵을 꺼내고 뜨거운 물을 준비했다.

준비된 뜨거운 물을 티백에 부어 차를 우려내고, 준비된 찻잔을 익숙하게 그녀에게 전했다.

"감사해요."

그녀는 약간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는 조금씩 차를 맛보기 시작했다.

뜨끈한 차 향을 음미하며 몇 번 찻잔을 홀짝이다가, 본격적으로 궁금했던 것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 이곳에 도착하셨을 때, 아르엘 님을 찾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셨죠?”

“네.”

“저는 단순히 헤어졌던 가족을 찾고 싶어서 이곳에 오신 건 줄 알았는데, 다른 목적이 있으셨던 겁니까?"

내 질문에 시르엘은 뜨끈한 찻잔을 잠시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르엘 언니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세진 님이 말씀하신 대로 가족을 찾고 싶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

"언니가 가지고 있었던, 세계수를 가꿀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언니를 찾아 나선 거예요."

“세계수를 가꾸는 능력?”

“네. 저희 마을에서는 먼 옛날부터 세계수를 지켜오면서, 특별한 능력을 가진 엘프들이 태어났어요. 방금 말했던 세계수를 가꾸는 능력이에요.”

그녀가 설명해 준 '세계수를 가꾸는 능력' 이란 굉장히 단순했다.

세계수와 교감하고, 세계수가 만드는 생명의 흐름을 더욱 활기차게 만드는 능력이라 설명했다.

“얼마 전에 봤던 생명의 샘도, 언니가 그 능력을 사용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에요."

대충 설명을 이해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질문을 이어나갔다.

“그럼 그 능력 때문에 아르엘 님을 다시 마을로 데려가려고 한 건가요?"

“네. 왜냐하면 저희 마을의 세계수가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거든요."

“마을에는 그 능력을 가진 다른 사람이 없나요?"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있긴 하지만 언니만큼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어요. 저도 어느 정도 '세계수를 가꾸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금 세계수를 되살리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라요.”

나는 어렵지 않게 엘프들이 목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엘프들이 마지막에 보여 줬던 행동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이엘을 억지로 데려가려고 했던 건?"

시르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카셀르는 이엘을 아르엘 언니 대신 데려가서, 세계수를 살리는 일을 맡기려고 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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