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3화
64. 세계수의 방문자(2)
나와 임진혁은 엘프 일행들을 이끌고 통나무 집 앞에 도착했다.
엘프들은 뭐가 그렇게 신기한지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시르엘은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여기에 언니의 딸이?"
"잠시만 기다리세요."
나는 엘프 일행을 마당에 기다리게 하고, 임진혁과 함께 집으로 들어갔다.
-쪼르르르.
문을 열자마자 아이들의 앙증맞은 발소리가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퓨이!"
내 품 안에 와락 안겨드는 아이들.
그 뒤로 티아와 모렛도 한 발 느리게 나와 임진혁을 맞이했다.
“후모!"
"어디 갔다 왔어?"
"아. 잠시 손님들이 찾아와서."
티아의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을 해 주고 품속에 있는 이엘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이엘은 나한테 안겨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지, 빙글 웃음을 지었다.
“이엘. 지금 밖에 이엘을 만나러 온 손님들이 있는데, 밖에 나가서 만나볼래?"
"손님이요?"
"응. 아르엘 님이 살았던 고향에서 찾아온 손님들이야."
“엄마의 고향에서 저를 찾아 왔어요?”
정확히는 아르엘을 찾아온 거지만, 이엘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엘은 몸을 움찔 떨면서 긴장한듯한 기색을 보였다.
예전부터 다른 엘프들을 만나고 싶어 했던 이엘이었지만, 갑작스러운 방문이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반면 다른 아이들이 아르엘의 고향에서 손님이 찾아 왔다는 이야기에 조용히 관심을 표했다.
나는 예상과 다른 이엘의 모습에 내심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이엘, 혹시 손님들이랑 만나기 싫어?"
"아뇨. 그건 아닌데요……”
"......?"
이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잠시
망설이더니.
결심했는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손님들이랑 만나볼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나는 이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 뒤, 한 손을 잡고 다시 현관문을 열어 밖으로 나섰다.
-철컥.
천천히 현관문이 열리고.
현관문을 통해 우리가 모습을 드러내자, 엘프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아니. 정확히는 이엘에게 모든 시선이 향했다.
이엘은 엘프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내 왼쪽 손을 꼭 붙잡고, 시선을 피해 내 뒤쪽으로 숨으려 했다.
엘프들은 제대로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이엘의 행동에 약간 초조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굉장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마당에 생각보다 훨씬 더 어색한 반응이 흐르자, 나 역시도 당황하고 있을 때.
시르엘이 조심스럽게 나와 이엘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이엘을 내려다보며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아르엘 언니의 딸이니?"
“……"
-끄덕끄덕.
소극적인 이엘의 반응에.
시르엘은 좀 더 이엘에게 다가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췄다.
이엘은 몸을 움찔하면서 조금 더 내 뒤쪽으로 숨어들었지만, 시르엘의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렇구나. 나는 아르엘 언니의 여동생 시르엘이야. 만나서 반가워."
“...… 저도 반가워요."
“언니를 정말 많이 닮았네."
시르엘은 회한이 담긴 눈빛으로 잠시 이엘을 바라보더니.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엘, 괜찮으면 한 번만 안아봐도 될까?"
“…...”
-끄덕끄덕.
그녀의 애절한 부탁에 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엘은 아주 천천히 이엘에게 손을 뻗었고, 조심스럽게 자신의 품 안으로 이끌었다.
처음에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시르엘.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 남아 있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는지,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흑…... 흐흑…..."
마당에 울려 퍼지는 그녀의 구슬픈 울음소리는 나뿐만 아니라 엘프들까지도 숙연하게 만들었다.
“......”
이엘은 눈물 흘리는 시르엘에게 작은 두 팔을 벌려 그녀의 품으로 포옥 안겼다.
다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시르엘은 다시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다.
코끝이 빨개지고 눈은 퉁퉁 부었지만.
내가 가져온 물티슈로 직접 얼굴을 닦아주는 이엘의 손길에, 그녀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시르엘이 감정을 추스르는 동안.
얼마 전, 팬 미팅에서 사용했던 손님용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 엘프들이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집 안에 들어가 그들에게 대접할 차와 간단한 먹을거리를 내왔다.
간식은 마트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과자에 차는 평범한 커피.
처음에는 엘프 차를 꺼내려다가, 왠지 엘프들에게 어쭙잖게 엘프 차를 꺼내는 게 민망해서 그냥 평범한 커피를 준비했다.
"으음? 맛있다.”
“처음 맛보는 차인데, 굉장히 진하고 맛있네."
“조금 더 달라고 해볼까?"
다행히 준비한 과자와 커피가 엘프의 입맛에 맞았는지 모두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이엘과 시르엘은 따로 마련된 자리에 오붓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 이엘은 언니가 떠난 뒤로, 계속 세진 님과 함께 지낸 거야?"
“엄마가 떠난 뒤로, 계속 아빠랑 같이 지냈어요.”
“아빠? 세진 님이 아빠라고?"
"네. 아빠예요.”
이엘이 나를 아빠라고 칭하자 시르엘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둘의 대화를 주시하고 있던 몇몇 엘프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으, 응. 그렇구나. 이엘은 세진 님이랑 친하니?"
시르엘의 질문에 이엘은 쑥스러운 듯 몸을 비틀면서 말했다.
“네.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아요."
“크흠. 흠.”
세상에서 아빠가 제일 좋다는 이엘의 대답에.
나는 낯간지러운 느낌을 받으면서도, 굉장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시르엘은 진심으로 나를 따르는 이엘의 모습을 확인하고, 나에게 전보다 더 신뢰와 호감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한편, 카셀르와 몇몇 엘프들은 이런 나와 이엘의 관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삐딱한 시선을 보냈다.
이엘과 시르엘의 대화가 길어지는 사이.
궁금함을 참지 못한 아이들이 현관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내가 아이들을 다시 집 안으로 돌려보낼지,말지를 고민하는 와중에. 이엘이 먼저 아이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아이들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내가
말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자, 쪼르르 이엘과 시르엘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 뀨우우.
거기에는 새끼 드레이크 한 마리도 포함돼 있었다.
아이들을 가까이서 맞이한 시르엘은 물론.
따로 커피와 과자를 즐기던 엘프들까지 갑자기 등장한 아이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아이들은 엘프들의 그런 반응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시르엘의 주변에 몰려들어 눈동자를 빛냈다.
가장 먼저 티아가 감탄사와 함께 입을 열었다.
“우와! 아르엘이랑 정말 많이 닮았다. 이엘, 이 엘프는 누구야?"
“제 엄마의 동생, 시르엘 님이에요."
"그렇구나. 어쩐지 많이 닮은 것 같더라.”
티아가 신기한 듯 시르엘을 살피는 사이. 그녀는 티아의 등장에 굉장히 당황한 듯했다.
"이엘, 이분은?”
"티아 공주님이에요."
"공주님?"
"그래. 맞아. 나는 아르키트 왕국의 공주 아라스티아라고 해."
“아...... 처음 뵙겠습니다. 세계수를 지키는 마을에서 온 시르엘이라고 합니다."
아르엘과 마찬가지로 시르엘 역시 티아를 쉽게 대하지 못했다.
다른 엘프들 역시 티아를 굉장히 어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라스티아 공주님은 이엘과 어떤 관계이신지?"
“이엘? 당연히 가족이지. 세진과 함께 지내면 모두 가족이야. 그치?"
"맞아요. 저랑 아빠, 공주님까지 모두 가족이에요.”
티아와 이엘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나머지 아이들이 화를 내면
서 끼어들었다.
"퓨이! 퓨이!"
“후모!"
-삐이익!
마치 자신들도 가족이라 주장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미안. 깜빡했네. 여기 있는 퓨이, 모렛, 세이도 다 함께 가족이에요."
"퓨이. 퓨이."
“후모."
-뀨우우.
이엘이 나머지 아이들도 다시 가족이라 말하자, 아이들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르엘은 아이들의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결국에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엘은 정말 좋은 가족들을 뒀구나. 다행이야."
“네. 맞아요. 헤헤."
그 뒤로는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시르엘의 대화가 이어졌다.
그녀가 아르엘과 닮은 탓인지, 분명 처음 방문한 손님인데도 아이들은 이례적으로 그녀를 친근하게 대했고.
시르엘도 그런 아이들이 썩 마음에 드는지 시종일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은 시르엘뿐만이 아니었다.
몇몇 엘프들은 대놓고 아이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눈을 빛냈다.
아마 아이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분위기상 그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들과 시르엘이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벌떡!
뭔가 불만인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던 카셀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성큼성큼 이쪽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몇몇 엘프는 동조하듯 그의 뒤를 따랐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는 카셀르의 등장에 차갑게 가라앉았고, 아이들은 시르엘과는 다르게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시르엘 님. 죄송하지만 더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카셀르, 그게 무슨 뜻이죠?"
“저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벌써 잊으신 겁니까?"
"......"
카셀르의 말에 시르엘은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지고, 다시 걱정과 근심이 가득해졌다.
그리고 그는 이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시르엘과 달리 차가운 그의 눈동자에 이엘이 살짝 몸을 떨었다.
"이엘이라고 했지? 아르엘 님의 딸이라면 당연히 그분의 의무를 이어야겠지."
"카셀르! 그건 아직 정해진 일이 아니에요! 마을에 연락을 보내고, 장로님들의 의견을 들어봐야…...”
“시르엘 님. 저희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저 아이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야 합니다.”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죠?"
"인간, 조금 전의 대접이 꽤 마음에
들어서, 이번 한 번만은 참도록 하겠다. 너는 빠져 있어라.”
밑도 끝도 없이 오만한 카셀르의 태도에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세진 님은 지금까지 이엘을 보호해준 분이세요. 그런 무례한 행동은 자제해 주세요.”
“어떻게 인간이 엘프의 보호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까지의 은혜는 따로 보답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이엘은 뭔가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황급히 시르엘 곁을 떠나 내 등 뒤로 숨었다.
다른 아이들 역시 카셀르에게 경계심을 보이며 내 곁으로 모여들었다.
시르엘은 지금의 상황이 안타깝게 바라보며, 카셀르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카셀르, 우리의 목적이 중요한 것은 알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마음대로 일을 진행할 수는 없어요. 또 언니 때처럼 일을 그르칠 생각이에요?"
"죄송합니다. 시르엘 님.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카셀르!"
그녀의 애원이 담긴 타이름에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내 쪽을 바라봤다.
“인간, 어서 아르엘 님의 딸을 이쪽으로 보내라. 지금까지 아르엘 님의 딸을 보호하고 있었던 은혜는 따로 보답하겠다."
마치 맡겨놓은 물건을 찾는 것처럼 당당한 태도의 카셀르.
그리고 그를 따르는 엘프들도 심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카셀르 이건……”
“아니. 집으로 초대한 입장이라 참고 있었더니. 보자 보자 하니까 답이 없네."
시르엘을 생각해 가만히 있으려 했지만, 카셀르의 행동은 내 분노를 끝까지 끌어올리고 말았다.
“아빠…....”
내 등 뒤에서 느껴지는 옷을 붙잡는 손길과 떨리는 목소리.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일갈했다.
“이엘은 어디에도 안가! 계속 쓸데 없는 소리 하려면 빨리 이곳을 떠나.”
분노한 내 모습에 시르엘은 참담한 표정을 지었고, 오히려 카셀르는 잘 됐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사악한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인간. 시르엘 님. 물러서시죠."
카셀르를 중심으로 그를 따르는 엘프들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기를 꺼내들기 시작했다.
나머지 시르엘과 몇몇 엘프들은 무기는 꺼내지 않았지만, 난감한 표정으로 나와 대치 상황을 유지했다.
-철컥!
“세진아, 무슨 일이야?"
집 안에 있던 임진혁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은은한 붉은 기운을 내뿜으며 내 쪽으로 합류했다.
"형. 이 녀석들이 이엘을 데려가겠데요.”
“지들이 뭔데 이엘을 데려가?"
임진혁은 내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거칠게 반응했다.
“이 녀석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세진아. 넌 아이들이랑 빠져 있어."
그는 붉은 기운을 거칠게 내뿜으며
나와 아이들 앞으로 나섰다.
위압적인 그 모습에 엘프들은 움찔하면서 한발 물러서야 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모두 그만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