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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192화 (192/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2화

64. 세계수의 방문자(1)

자신을 '시르엘'이라고 밝힌 여자엘프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한채. 다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네. 맞아요. 저희는 지금 아르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엘프를 찾고 있었어요. 지금 그분이 어디에 계신지 알고 있으신가요?"

"......"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아르엘이 있는 곳을 묻는 그녀.

얼굴에서 반가움과 희망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난 탓에, 나는 쉽사리 사실을 밝히지 못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미루자.

시르엘의 뒤쪽에 있던 남자 엘프가 불쑥 앞으로 나섰다.

“인간. 얼른 아르엘 님이 계신 곳을 말해라!"

은빛 머리칼에 서양 영화에나 나올 법한 배우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남자 엘프.

약간의 적대감과 강압적인 분위기가 뒤섞인 남자 엘프의 말투는 내 표정을 찡그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놈은 갑자기 내가 사는 곳으로 쳐들어 와놓고 왜 이래? 재수없게 생긴 게.'

생긴 것 때문인지, 더욱 불쾌하게 느껴지는 엘프였다.

시르엘은 이런 내 심정을 알아챘는 지, 위협적인 태도의 남자 엘프를 혼냈다.

“카셀르! 예의 없게 굴지 마세요.”

“하지만 인간은 쉽게 믿을 수 없습니다. 분명 무슨 꿍꿍이가......"

“아르엘 언니를 아시는 분이라면 괜찮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아직도 불만인 표정의 남자 엘프를 물러나게 하고.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아르엘의 추억이 떠올라 묘한 감정이 들게 만들었다.

"죄송해요. 저희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서.”

"아. 괜찮습니다."

“아직 성함을 듣지 못했는데. 혹시

괜찮으시다면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너무나도 정중한 시르엘의 부탁에, 나는 품속을 뒤져 길드장 명함을 꺼낼 뻔했다.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그냥 세진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세진 님이셨군요. 혹시 뒤쪽에 숨어 계신 분은?”

"아! 제 일행입니다. 이곳에 손님이 찾아오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경계를 좀 했습니다.”

임진혁은 아직도 내 뒤쪽에 숨어서 이곳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시르엘 뒤쪽의 엘프들도 그런 임진혁을 은근히 경계했다.

"세진 님. 괜찮으시면 아르엘 언니에게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부탁 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더 정중하게 부탁하는 시르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일단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해요. 그런데 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데……"

“지금 들어올 수 있도록 해드릴게요.”

나는 균열 관리자의 능력으로 엘프 일행이 균열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진입을 막고 있던 균열 경계가 없어졌고, 그들은 다시 한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따라오시죠."

나는 임진혁과 함께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세진아, 저 사람들, 아니 엘프들은 뭐하러 찾아온 거냐?"

“아르엘 님을 찾아 왔다는데요.”

"이엘의 어머님?"

“네. 저기 앞쪽에서 걷고 있는 푸른색 머리칼을 여자 엘프, 저 엘프가 아르엘 님의 가족인 것 같아요."

"흐음. 그럼 이엘의 친척인 셈이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나와 임진혁이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엘프 무리 사이에서도 끊임없이 대화가 오갔다.

표정을 보아하니 딱히 좋은 이야기가 오고

가는 분위기는 아닌듯했다.

숲속을 빠져나와 호수 옆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아르엘의 집 앞에 도착했다.

시르엘은 집을 둘러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에 언니가 머무시는 건가요?"

“….…”

그녀의 질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무 정령이 있는 숲속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 머릿속에서 나무 정령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너와 엘프 한 명만 데리고 들어 오너라.

나는 걸음을 멈춰 서고 엘프 무리에게 나무 정령의 말을 전했다.

“나무 정령님께서 저와 엘프 한 분만 숲속으로 들어오라고 하시는데."

“그럼 저만 따라 들어갈게요."

“안 됩니다. 시르엘 님. 뭘 믿고 저 인간을 따라가시는 겁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아까 나에게 위협을 가했던 카셀르라는 엘프가 다시 튀어나와 반대했다.

"괜찮아요. 세진 님은 믿을 만한 분이세요. 저는 느낄 수 있어요."

“시르엘 님……”

저 카셀르라는 엘프가 하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아르엘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철석같은 믿음을 보내는 시르엘이 더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세진 님. 제가 따라 들어갈게요. 안내해 주세요.”

“그럼 저를 따라와 주세요. 형,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줘요."

임진혁은 든든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남아있는 다른 엘프들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임진혁을 믿고 시르엘과 함께 숲속으로 향했다.

처음 오는 사람에게는 험한 숲길이었는데, 확실히 숲의 종족이라 불리는 엘프라 그런지 시르엘은 곧잘 내 뒤를 따라왔다.

숲길을 걸은 지 십여 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나무 정령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먼 길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 나무 정령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시르엘이라고 합니다."

시르엘은 반갑게 나무 정령과 인사를 나누고, 곧바로 아르엘을 찾기 시작했다.

"근데. 세진 님. 아르엘 언니는?"

“…...”

내가 계속 침묵을 유지하자 그녀는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순간 안색이 흐려졌다.

그리고 이어진 나무 정령의 말과 함께 그녀의 표정에는 슬픔이 가득해졌다.

- 시르엘 님. 아르엘 님은 얼마 전

이곳에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습니다.

“아…….”

- 털썩.

진실을 전해 듣게 된 시르엘은 탄식과 함께 휘청거렸다.

나는 황급히 손을 뻗어 그녀가 쓰러지지 않게 부축했고, 그녀의 가녀린 몸이 내 품에 안겨들었다.

"괜찮으세요?"

"언니가...... 아르엘 언니가 그렇게

떠나버리다니,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는데.”

깊은 슬픔에 빠진 시르엘은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와 나무 정령은 그저 안타깝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시르엘은 꽤 오랫동안 내 품에서 계속 눈물을 흘렸다.

쏟아낸 눈물로 슬픔을 덜어낸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죄송해요. 세진 님."

“아뇨. 이제 좀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그녀는 일부러 얼굴에 작은 미소까지 띠며, 짐짓 괜찮은 척 보이려 노력했다.

그래도 아직 얼굴에서는 슬픔과 후회가 묻어나왔다.

“이곳으로 오면 언니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이곳을 늦게 찾아 왔나 봐요."

“어떻게 이곳으로 오시게 됐나요?"

"세계수에서 이곳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 속에서 어떤 의식을 느꼈거든요."

"...…어?"

“그런 능력을 갖춘 존재는 세상에 언니 말고는 없으니까. 당연히 언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얼마 전에 생명의 샘을 살피다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던 낯선 존재의 외침을 기억해 냈다.

“혹시 이틀 전, 오전 시간대에 그걸 발견해 내셨나요?"

"네. 맞아요."

"그리고 그 의식을 발견했을 때, '찾았다!' 라고 생각하셨죠?"

“아앗! 그걸 어떻게?"

시르엘은 귀를 쫑긋 세울 정도로 깜짝 놀라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독심술이라도 당한 것처럼, 무척이나 신기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꽤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면서 그녀에게 사실을 전해줬다.

“아무래도 발견하셨다는 그 의식은 저를 말하는 것 같은데요."

“네?”

“제가 이틀 전에, 여기에 있는 생명의 샘으로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거든요."

“그렇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엘프도 아니고 인간이 세계수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니."

시르엘은 내가 있는 그대로 말했음에도 쉽게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때 나무 정령이 나서서 그 진실을 뒷받침했다.

- 시르엘 님, 세진이 하는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는 꽤 오래전부터 생명의 샘을 이용해 흐름을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정말로 세진 님이 세계수의 흐름을 느끼시는 건가요?"

-네. 모두 사실입니다.

“아아. 정말 대단해요. 역시 처음 봤을 때부터 평범한 분이 아니신 줄 알았어요."

시르엘은 푸른색 두 눈동자를 크게 뜨고, 초롱초롱 빛나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신뢰가 득한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이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 친근함이 느껴졌다.

"혹시 가능하다면 그 생명의 샘을 살펴볼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살펴보시죠.

-뿌드드드득.

-파파팍!

시르엘의 부탁에 나무 정령은 곧바로 생명의 샘으로 가는 땅속 통로를 열어주었다.

나는 그녀와 함께 통로를 따라 생명의 샘으로 향했다.

시르엘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샘물을 바라보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그 주변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언니의 기운이 느껴지네요.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안타깝네요."

“혹시 이 샘을 되살리는 방법을 알고 있으신가요?"

나는 그녀에게 약간의 기대감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그건 저도 몰라요."

“아……”

“저도 언니와 비슷한 능력을 타고 났지만, 이런 능력을 갖추고 있던 엘프는 마을에서도 언니뿐이었어요."

“그렇군요.”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르엘은 씁쓸한 표정으로 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언니가 그렇게 도망치듯 떠나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생명의 샘을 빠져나온 시르엘은 나무 정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언니를 마지막까지 돌봐주셔서 감사해요."

- 아닙니다. 시르엘 님. 저도 아르엘 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그녀는 또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나와 함께 숲을 빠져나왔다.

카셀르는 곧바로 시르엘에게 뛰어 오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시르엘 님! 괜찮으십니까?"

"네. 별일 없었어요."

"아르엘 님은?"

"......”

시르엘은 엘프 일행들에게 아르엘의 소식을 전했다.

아르엘에 대한 좋지 못한 소식에 그들은 금방 비통한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대로 아무 것도 못 한 채 마을로 돌아가야 하는 겁니까?"

“아르엘 님이 계시지 않으면 세계수는 이대로……"

“더 방법이 없다면 빨리 마을로 돌아가는 게 옳은 선택인 것 같습니다.”

시르엘과 카셀르는 물론이고 모든 엘프가 심각한 표정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의견을 나눴고.

나와 임진혁은 엘프 무리에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구경했다.

“지금 저 엘프들이 뭐 하고 있는 거냐?"

“아르엘 님을 찾으러 왔는데. 목적을 달성하지 못해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아요."

“우리 할 일은 다 끝난 거 아냐? 그냥 내버려 두고 집에 돌아가자."

"그래도 저기 있는 시르엘이라는 엘프는 아르엘 님의 여동생인 것 같은데, 그냥 보내기는 좀 그렇네요. 갈 땐 가더라도 이엘의 얼굴은 보여 줘야 할 것 같아서."

"그럼 이엘에게는 이모가 되는 건가?"

“촌수로 따지자면 그렇게 되겠네요.”

나와 임진혁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엘프들은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무

리하고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도 시르엘이 나서서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세진 님. 이곳까지 안내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가시는 건가요?"

“네. 마을에 급한 일이 있어서. 빨리 소식을 전해야 할 것 같아서요."

“으음. 그러면 잠깐만 시간 내서 저희 집에 들렀다가 가세요."

내가 시르엘을 집으로 초대하자, 이번에도 카셀르가 튀어나와 대신 대답했다.

“인간, 우리는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시르엘 님 그냥 바로 이곳을 떠나시죠."

시종일관 나를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의 말은 무시하고 시르엘에게 재차 권했다.

“바쁘시더라도 조금만 시간을 내주세요. 집에 아르엘 님의 딸인 이엘도 있으니까요.”

내가 이엘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엘프들에게서 엄청난 반응이 튀어나왔다.

“아앗! 언니의 딸이요?"

"커헉?!"

"아르엘 님이 자식을 낳으셨다고?!"

이엘 이야기에 엘프들이 큰 충격을 받자

나 역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세진 님. 정말인가요? 정말로 언니의 딸이 있는 건가요?"

“네. 근데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저희에게는 충분히 큰일이에요."

확실히 엘프들의 모습을 보니 평범한 반응은 아니었다.

“세진 님. 언니의 딸을 만나 볼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세요. 처음부터 집으로 초대하려고 생각했으니까."

“감사합니다. 세진 님. 감사합니다.”

시르엘은 다시 한번 환한 미소와 함께 내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그녀의 진심이 느껴지는 행동에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만날 수 없는 언니 대신, 조카를 만날 수 있어서 기쁜 거겠지?'

“그럼 따라오세요."

나는 임진혁과 함께 엘프들을 이끌고 통나무집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른 엘프들을 만나보고 싶어 했던 이엘.

그런 이엘에게 이모와 고향 사람들을 데려간다는 사실에 나는 마음이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이엘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미소를 짓던 카셀르와 다른 엘프들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찝찝하게 느껴졌지만.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며 통나무집

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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