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1화
63. 불안한 변화(3)
생명의 샘을 떠나 집으로 돌아갔을 때.
이엘은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빠!"
“이엘, 이제 괜찮아?"
“몇 번을 물어보는 거예요. 이제 정말 괜찮은데.”
나는 이엘을 품 깊숙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미안해. 그래도 어디 불편하거나 아프면 아빠한테 꼭 말해야 줘야 해. 알았지?"
"알았어요."
어디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이엘을 꼭 끌어안고 있는데도.
이 작은 소녀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디론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 불안감은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아 나를 괴롭혔다.
-길면 2년, 짧게는 1년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나무 정령은 이엘에게 남은 시간은 1, 2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때 1년.
어쩌면 내 품 안에서 느껴지는 이 행복한 미소가 이제는 1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슬퍼졌다.
“아빠. 답답해요.”
"으, 응, 미안해."
무심결에 힘을 줬던 팔을 풀면서 다시 이엘을 내려다봤다.
작은 엘프 소녀는 그저 순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래. 내가 지켜줘야 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거야.'
나는 다시 한번 더 마음을 굳게 다지며, 이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다듬어 줬다.
****
그 사건이 있고 나서 3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든 이엘을 지켜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는 3개월을 보냈다.
아르킨 길드장으로서의 일도 수행해야 했고, 가끔 너튜브 영상도 신경 써서 촬영해야 했다.
거기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골렘 제작에 관한 연구도 병행했다.
가장 심혈을 기울여 시간을 투자한 일은 당연히 생명의 샘을 되살리기 위한 연구였다.
나는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거의 매일 나무 정령이 있는 숲을 방문해서 생명의 샘을 살폈다.
하지만 아직 생명의 샘을 되살릴 방법에 대해서는 어떠한 실마리도 잡지 못한 상태였다.
제대로 된 방법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원래도 얼마 남지 않았던 샘물은 더더욱 줄어들어 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예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생명의 샘을 살핀 덕분에 아주 조금이나마 이 샘물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생명의 샘은 한마디로 숲, 호수, 산맥에 모든 생명체가 내뿜는 생명의 기운을 받아 만들어진 결정체.
심지어 나를 포함한 우리 가족들의 기운도 이 생명의 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단순히 생명체의 기운을 빼앗는 개념이 아니라, 받아온 기운을 다시 주변으로 순환시켜 생명의 샘 주변의 존재가 더욱 풍요롭고 활발하게 만들었다.
활발해진 생명체는 더욱 많은 기운을 내뿜고, 다시 그 기운을 받아들인 생명의 샘은 또다시 주변에 영향을 미치는.
무한동력과 비슷한 원리로 이루어 지는 순환 속에서 만들어지는 결정체가 이 샘물이었다.
한마디로 생명의 샘은.
거대한 크기의 회로를 통해 무한으로 생명의 샘물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무한동력 아티팩트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어떤 원리로 이런 무한동력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는지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그래도 최근에.
아주 우연한 계기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냈다.
돌파구를 발견한 곳은 스승님이 남겨주신 책에서 발견되었다.
스승님은 떠나면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리스의 저주 치료법'을 정리해 둔 책을 남기셨는데.
지금의 내 마법 실력으로는 완벽히 원리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책의 초반부만 읽어두고 내버려 둔 상태였다.
그런데 최근에 생명의 샘을 살피다가 스승님의 책에서 읽었던 치료법의 방법과 비슷한 원리가 적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연의 일치일까?
스승님은 예전에 아리엘과 나무 정령이 이 결계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고 했었다.
그저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 딱 들어맞는 상황.
새로운 돌파구를 찾았다는 생각에
기뻐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직은 부족한 내 마법 실력 탓에 스승님이 남겨주신 책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럴 때 스승님이 계셨다면……'
골렘을 완성하고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떠나신 스승님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남겨주신 책을 가지고 어떻게든 독학을 해보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9개월.
지난 3개월 동안 이엘은 저번처럼 쓰러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새롭게 창조한 숲속 균열 안에 있는 동안에는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다.
대신 생명의 샘이 있는 균열이 아닌,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쉽게 피로해지고 아주 오랫동안 잠을 자야만 했다.
이엘의 이상한 증상을 발견하자마자 나는 이엘이 현대 세계로 넘어갈 수 없도록 했다.
"또 놀러 가고 싶은데……”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모르는 이엘은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지 못해 슬퍼했고, 그런 이엘의 모습에 나도 마음이 아팠다.
그렇게 속절없이 시간이 흐르는 사이.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
평소와 다름없는 오전.
나는 이제 매일 일과나 다름없는 생명의 샘을 방문했다. 나무 정령도 이제 익숙하게 나를 맞이했다.
-왔느냐?
“네. 당연히 와야죠."
-아직도 해결 방법은 찾지 못했구나.
"……"
-마음 편하게 먹도록 해라. 꾸준히 하다 보면 방법을 찾을 수 있겠지.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무 정령도 나만큼이나 굉장히 답답해 보였다.
-뿌드드드득.
-파파팍!
나무 정령이 열어주는 땅속 통로를 따라 생명의 샘에 도달했다.
새롭게 샘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탓에 남아 있는 샘물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었다.
나는 평소와 같이 생명의 샘 근처 에 손을 올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생명의 샘 주변의 흐름을 따라 녹아든 내 의식은 익숙하게 먼 곳으로 나아갔다.
숲을 빠져나와, 호수를 지나, 산맥까지 넘은 내 의식은 쭉쭉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생명의 샘을 어지럽게 만든 문제를 찾기 위해 의식을 집중하고 있는데.
-찾았다!
-???
순간 낯선 누군가의 의식이 내 머릿속을 침범해 오는 느낌이 들었다. 굉장히 기묘한 기분에 펴져 있던 의식을 순식간에 되돌렸다.
"헉! 허억!"
다시 원래대로 의식이 되돌아옴과 동시에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뭐지? 분명 누군가가 나에게 말을
걸었는데?'
단순히 잘못 들었다고 믿고 싶었지만.
의식의 접촉과 함께 들려온 그 목소리는, 머릿속에 화인을 남긴 것처럼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내 이상한 상태를 눈치챈 나무 정령이 말을 걸었다.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그건 아닌데."
-......?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나는 나무
정령에게 방금 경험한 일을 설명해 줬다.
-정말 목소리를 들었느냐?
나무 정령은 내 설명에 꽤 놀란 듯 되물었다.
“네. 분명히 들었어요. '찾았다'라고.”
- 허허허.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무 정령은 꽤 오랫동안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혹시 잘못한 건가요?"
-아니다. 네가 잘못한 것은 없다. 그저..…
"......?"
-나는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정말 사실이라면 아마 그들이 우릴 찾아올 것이다.
“네? 누가 우릴 찾아오는데요?”
내 물음에도 나무 정령은 침묵을 유지할 뿐, 더는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나무 정령이 설명해 주지 않은 방문자는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
[균열에 침입자가 발생했습니다.]
[현재 침입자의 진입을 차단하는 중입니다.]
집에서 쉬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눈앞에 침입자를 경고하는 알림창이 떠오르자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빠?"
"퓨이?"
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자. 옆에 있던 퓨이와 이엘이 깜짝 놀라 나를 쳐다봤다.
“어, 어, 아빠 잠시 어디 좀 다녀올게."
"어디 가는데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퓨이. 퓨이."
둘 다 나를 따라오려는 행동을 취했다.
"아냐. 별일 아니니까. 둘은 집에서 놀고 있어. 금방 다녀올게."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둘을 달래주고 조심스럽게 안방으로 가서 아티팩트와 장비를 챙겼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임진혁에게 도움 메시지를 보냈다.
- 형. 여기에 침입자가 생겼데요.
도와주세요. 저는 지금 아이들 모르게 집 밖으로 나가는 중이에요.
- 알았다. 금방 갈게.
장비를 챙겨 집을 나서니, 약초밭에서 일하고 있던 임진혁이 쏜살같이 뛰어왔다.
"무슨 일이야?"
“저도 정확히 몰라요. 그냥 침입자가 있다는데.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알았어. 그럼 바로 확인해 보러 가자."
나는 임진혁과 함께 알림창이 안내하는 곳으로 향했다.
우리가 향한 곳은 집에서 꽤 멀리 떨어진,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 호수 반대편 숲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숲길을 헤치며 나아간 끝에 우리는 알림창이 알려준 장소에 도달했고,
생각보다 쉽게 침입자 무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10 명 정도로 이루어진 침입자들은 균열 경계에 가로막혀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세진아."
“네. 형."
“저 사람들. 그러니까 귀 저거, 내가 보는 게 맞는 거지?"
“그런 것 같아요."
나무 뒤에 숨어서 상황을 살피던 우리의 눈에, 유난히 강조되어 보이는 침입자들의 특징이 있었다.
"엘프…… 맞지?"
“......"
아르엘, 이엘과 비슷한 크고 기다란 귀.
엘프 특유의 가녀린 체형에, 뭔가 흔적을 찾으려는 듯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
내가 아는 엘프라고는 세상에 아르엘과 이엘 단 둘뿐이었지만, 누가 봐도 10명의 침입자는 확실하게 엘프처럼 보였다.
잠시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엘프 모두 각자 활과 검.
무기를 장비하고 있었지만 싸움을 하러 온 분위기는 아니었고, 계속 뭔가를 찾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민하던 나는 임진혁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모습을 드러내기로 했다.
"누구냐?!"
뛰어난 청각 덕분인지 금방 우리가
움직이는 소리를 인지한 엘프, 그들은 곧바로 화살을 활시위에 걸어 우리 쪽을 향해 겨냥했다.
나는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언제든지 아티팩트를 발동할 준비를 하면서.
경계하는 엘프 무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 싸우려고 나온 게 아닙니다. 저는 원래 여기 살던 사람입니다."
"인간? 인간이 어째서 엘프어를?!"
이엘과 아르엘 덕분에 원어민 수준으로 탄탄한 내 엘프어 실력에 침입자 무리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어찌하다 보니 인연이 닿았습니다. 그것보다 당신들은 무슨 목적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보아하니 뭔가를 찾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적대적이지 않은 내 말투에 엘프들은 약간 경계심을 낮추며, 겨냥했던 활을 내렸다.
물론 활시위에 메긴 화살까지 거두지는 않았다.
엘프 무리 사이에 잠시 대화가 오고 가더니, 무리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신비한 푸른색 머릿결을 가진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 엘프였다.
나는 그 엘프의 모습을 확인하고 입을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예고 없는 방문으로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예. 뭐, 괜찮습니다."
고개까지 살짝 숙이며 정중하게 사과하는 엘프.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 사과를
받아들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세계수를 지키는 엘프 마을에서 온 시르엘이라고 합니다."
"아.…..”
"혹시 이곳에서 다른 엘프를 만나신 적 없으신가요?"
시르엘이라는 이름. 약간은 다른 분위기지만 누군가와 똑 닮은 외모. 그리고 엘프를 찾는 질문까지.
나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혹시 찾고 계시는 분의 성함이 '아르엘' 맞습니까?"
내 말에 질문을 던진 여성 엘프 뿐만 아니라, 나머지 모든 엘프 일행의 얼굴에
놀라운 감정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