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90화 (190/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90화

63. 불안한 변화(2)

나에게 마지막으로 이엘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간 아르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아르엘이 떠나갔을 때, 단지 혼자 남게 될 이엘이 걱정돼서 남기는 부탁인 줄 알았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그런데 갑자기 나에게 이런 상황이 닥치자 당황스러워졌다.

'내가 이 생명의 샘을 되살릴 수 있다고?'

아주 잠시 멍하게 생명의 샘을 바라보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이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상황.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무 정령의 말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뭔가 시도를 해봐야 했다.

생명의 샘에 가까이 다가서자 아주

희미하게 이전에 느껴보았던 신비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말라가는 샘을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하는 와중. 나는 희미하게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 속에서 언뜻 익숙한 느낌을 눈치챘다.

그리고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일어 났던 상황이 떠올랐다.

유리병에 샘물을 채우다가 손이 샘물에 닿았을 때, 기묘하고 편안한 느낌과 함께 분명 문양의 흔적을 발견했었다.

그때는 스킬 레벨이 낮아 불완전한

해석밖에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예전과는 다르게 아르키트 회로 이론이 한 단계 상승했으니까.

실마리를 찾아내자마자 나는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Sanye(질서)!

나는 생명의 샘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문양의 힘을 따라서 내부를 둘러 보기 시작했다.

처음에 생명의 샘 내부를 확인했을 때는 너무 간단한 기운의 흐름에 의아함이 생겨났다.

아티팩트로 따지자면 엄청 간단한 회로 구조에서 고위력 마법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과 비슷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감고 좀 더 집중해 이 기운들이 흐름을 따라 가 보았다.

내 의식이 점점 흐름에 녹아들어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눈동자에는 경이로움과 좌절감이 뒤섞여 있었다.

처음에 이 기운의 흐름을 단순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흐름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극히 일부분만 확인했던 것.

생명의 샘으로부터 세세하게 이어진 흐름은 이 숲을 벗어나, 호수, 산맥, 그 뒤를 넘어까지 흘러갔다. 결계를 중심으로 많은 기운이 모여 있긴 했어도.

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나뭇잎이 다 연결된 것처럼, 이 생명의 샘과 결계도 세계라는 거대한 흐름에 연결돼 있었다.

아마 아르키트 회로 이론의 수준이 높아지지 못했었다면 발견할 수 없 었던 경이로움.

하지만 그 커다란 경이로움은 곧 좌절감으로 변해갔다.

'이건 지금 내 수준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 엄청나게 거대한 흐름은 아주 섬세하고 완벽하게 조율돼 있었다. 마치 하나의 커다란 아티팩트 회로인 것처럼.

지금의 내 지식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생명의 샘은 놔두고, 이엘을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점점 초조해지는 마음에 잡다한 생각이 떠올랐지만,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떨쳐냈다.

방금 잠깐이라도 생명의 샘을 살펴 보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이 샘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이엘 역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시 생명의 샘에 집중했다.

'뭔가 방법이 있을 거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이마와 등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앓는 소리가 꽉 다문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를 정도로 집중해서 흐름을 살핀 끝에. 확실하지는 않지만 지금 이런 상황이 발생한 원인을 어느 정도 예상해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뭐가 문제인지는 몰라도. 그 문제가 이 생명의 샘이 있는 숲에서 벌어진 것은 아니다.'

내부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외부에 알 수 없는 영향으로 흐름이 흔들리고 있는 상황.

지금으로써는 외부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는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잠깐! 외부에서 생긴 문제로 생명의 샘이

흔들린다면, 외부와의 흐름을 아예 차단해 버리면 되지 않을까?'

번뜩이듯 떠오른 아주 단순한 해결책.

본질적인 문제의 원인을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해결책이었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던 캄캄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불안함과 절망감으로 가득했던 마음속에 희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생명의 샘을 중심으로 한 결계. 이 결계를 내가 다시 구성해야 한다.'

아르엘과 나무 정령이 유지하던 숲 결계의 흐름을 차단하기 위해, 나는 '균열 관리자'로 승급하며 얻은 능력 ‘균열 창조’를 사용할 준비를 했다.

내가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균열의 크기는 숲과 호수, 산맥 일부분을 포함한 어마어마한 크기.

저번에 자그마한 방 크기의 균열을 만들어 냈던 것과는 비교하기조차 힘든 사이즈였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잠시 망설이는 와중에도 이엘은 고통스러운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는 수밖에 없다.'

결심을 굳힌 나는 곧바로 행동을 시작했다.

-균열 창조!

-우우우우웅!

-파지지지지직!

생명의 샘과 나를 중심으로 공간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균열이 만들어져 나갔다.

처음 균열을 창조했을 때보다는 좀 더 안정적인 흐름이었다.

- 우우우우웅!

-파지지지지직!

"끄으응."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벌써 내 입에서는 한계에 부딪힌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직 절반의 절반도 일이 진행되지

상황에서 그 짧은 순간에 온몸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고, 살 떨리는 압박감에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이런…… 안 되는 건가?'

영혼이 뽑혀 나오는 것 같은 고통에 겨우 의식만 붙잡고 있는 그때.

-정신 차려라! 포기하면 안 돼!

머리를 울리는 호통 소리와 함께 편안하게 내 온몸을 감싸는 나무줄기.

그리고 나무줄기를 통해서 흘러들어오는 포근하고 거대한 기운.

잠시 고통이 완화된 덕분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균열을 창조해 나가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창백한 얼굴로 고통스러워하던 이엘의 모습과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두 가지 생각만 떠올리면서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반쯤은 정신을 놓아버린 채 버티던 나는, 순간 몸이 텅 비는 것 같은 공허함을 느낌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새로운 균열을 창조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진 균열은 곧바로 귀속됩니다.]

[새로운 균열 입구를 열었습니다.]

[관리자의 권한에 따라 균열 입구의 제한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눈앞에 아른아른하게 떠오르는 알림창.

나는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마지막 작업을 하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균열의...... 생명의 샘과 이어진 흐름을 끊어야 해..….’

기도하듯 간절하게 마지막 작업을 진행한 뒤 무의식의 바다 위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 버티던 의식은 곧바로 완전히 수면 아래로 침몰했다.

모든 의식과 생각이 꺼져가는 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이엘의 얼굴이

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허억! 허...... 컥!”

요란스러운 숨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다시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일어났느냐?

머릿속을 울리는 나무 정령의 부드러운 목소리.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부드럽게 몸을 감싼 나무줄기의 도움으로 겨우 누워 있던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잠시 멍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잠시 내가 기절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곧바로 위급했던 이엘의 상황을 떠올렸다.

"이엘은?! 크윽!"

-움직이지 말아라. 이엘은 이제 괜찮으니, 지금은 네가 안정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정말..…. 입니까?"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나? 정말로 이엘은 괜찮아졌으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하아아아……."

나무 정령을 통해 수차례 이엘이 괜찮다는 확신을 받은 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몸을 편안하게 뉘었다.

나무줄기는 내 움직임에 맞춰서 몸을 편안히 쉴 수 있게 고정해 주었고, 나는 편안한 침대에 누운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편하다. 집에서 침대로 썼으면 좋겠다.'

잠시 긴장이 풀린 탓인지 쓸데없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고 지친 심신을 달랬다.

나무줄기 침대의 사업 계획서까지

상상하던 나는.

다시 천천히 눈을 뜨면서 입을 열었다.

"완전히 해결된 건 아니겠죠?"

-그렇다. 너의 순간적인 기지로 잠시 위험한 상황은 벗어났지만, 생명의 샘이 메말라 가는 상황은 계속될 거다.

“완전히 메말라 버리면 이엘은...…”

-......

침묵을 유지하는 나무 정령.

잠시 머릿속으로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지만, 고개를 흔들어 불쾌한 생각을 털어냈다.

“왜 좀 더 일찍 저에게 이런 상황을 알려주시지 않은 거예요? 미리 알고 있었다면 좀 더 확실히 대응할 수 있었을 텐데.”

약간의 원망이 섞인 내 질문에 나무 정령은 굉장히 이례적으로 사과의 말을 전해왔다.

-미안하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적어도 10년, 길게는 몇십 년 동안은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알고 계시는 건가요?"

-나도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단지 이곳이 아닌 아주 먼 곳에서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아쉽게도 나무 정령 역시 정확한 문제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 정확하지는 않지만. 짐작이 가는 곳은 있다.

"......?"

-아르엘 님이 떠나오신 고향. 엘프들이 세계수를 지키는 곳에서 아마 문제가 생겼을지도 모른다.

"세계수?"

내가 의문을 표하자 나무 정령은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네게 설명한 적은 없지만, 아르엘 님은 떠나오신 고향에서 굉장히 귀한 혈통을 타고난 엘프였다. 그 혈통으로 인해 특별한 능력도 갖추고 계셨지.

“특별한 능력이요?"

-그래. 엘프 중에서도 아주 소수의 몇몇만 가지고 있는, 세계수를 가꿀 수 있는 능력이다. 아르엘 님은 그 중에서도 꽤 능력이 뛰어나신 편이었다. 이 생명의 샘도 그 능력을 사용해서 만들어 낸 결과물이지. 물론 결계를 만드는 데는 그 재수 없는 인간 마법사의 도움이 좀 있었지만.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엘은 왜 생명의 샘이 없으면 위험한 거죠? 불치병 같은 거라도 걸린 건가요?"

-불치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비슷한 상황이다.

“비슷한 상황이라면."

-아르엘 님의 능력을 이엘이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이엘은 불완전한 엘프의 육체를 가지고 있어서 그 능력을 온전히 감당해내지 못하고 있다.

"아……”

나는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바로 이엘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본래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계신 아르엘 님은 정해진 엘프 상대와 결혼했어야 하는 운명이었다. 하지만 아르엘 님은 이미 사랑하는 상대가 있었지. 아르엘 님이 임신을 하고, 이엘의 아버지와 도망쳤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다.

“사랑의 도피를 하신 거군요?”

-그래. 그러던 중에 이엘의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마법사의 도움으로 여기에 정착하게 된 거다.

아르엘과 이엘의 아버지에 얽힌 이야기를 들으며 사정을 이해하고 나니, 마지막까지 이엘을 걱정하면서 떠난 아르엘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나는 애써 슬픈 감정을 억누르면서, 지금 가장 중요한 문제를 먼저 생각했다.

“지금 상황이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 길면 2년, 짧게는 1년 정도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1년......"

이엘의 생명이 달린 문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계획을 세워야 했다. 1년이라는 시간 안에 생명의 샘을 원래대로 되돌려야 한다.

다시 나에게 주어진 어려운 문제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때.

-♩∼♬∼♪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꺼내서 확인해 보니 임진혁에게서 온 전화였다.

"형?"

- 아빠? 지금 어디에 있어요?

휴대폰을 통해 들려오는 이엘의 목소리에 나는 얼굴을 환하게 만들며 대답했다.

“이엘, 이제 괜찮아? 어디 아픈 곳 없어?"

-네. 아까는 엄청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그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평소와 다름없는 이엘의 목소리를 들으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복받쳐 올라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아빠, 언제 돌아와요?

"으응, 금방 갈게. 무리하지 말고 아빠 갈 때까지 진혁 아저씨 말 잘 듣고 있어.”

-네. 알겠어요. 보고 싶으니까 빨리 오세요.

“그래. 알겠어. 나도 이엘 많이 보고 싶어."

-헤헤.

보고 싶다는 이엘의 귀여운 말에 아까의 힘들었던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통화가 종료되고.

잠시 웃고 있는 이엘의 모습을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다가, 표정을 바꿔 강렬한 의지로 눈동자를 빛냈다.

'어떻게든 내 딸을 지킨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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