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73화 (173/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73화

58. 만들다(3)

길드의 수장이 되어달라는 아저씨의 부탁.

놀라는 나와는 달리 무척 침착해 보이는 주변 사람들을 보아하니, 이미 이야기가 다 오고 간 것처럼 보였다.

“이러려고 집들이하자고 하신 거예요?"

“부정은 안 할게. 자연스럽게 모두 모일 자리를 만들려고 한 건 사실이니까.”

“하아…….”

아저씨의 진지한 모습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장난스럽게 길드 창설 이야기를 꺼내고 가벼운 분위기였던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매우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난감한 상황에 입을 우물거리고 있으니, 가까이에 앉아 있던 강유환 회장이 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쉽게 결정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 역시 오랫동안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다."

“근데 회...... 사장님은 여기 왜 계시는 거죠?"

“새로 만들 길드의 투자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아마 강유환 회장도 여기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미리 이 계획에 참여한 듯했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이.

내 반대편 쪽에 앉아 계속 상황을 지켜보던 윤동현이 입을 열었다.

"괜찮다면 제가 이야기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몰리고.

암묵적인 동의를 받았다고 생각한 그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저는 세진 씨가 굉장히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길드장에 어울리는 분인지는 아직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길드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음에도 오히려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야기였다.

정씨 가족이나 임진혁은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사람들이지만, 오성 길드의 사람들은 나와 함께한 기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나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윤동현의 발언은 지극히 합리적이었다.

“저는 옆에 있는 서율희 조장님, 이제는 조장님이 아니지만. 어쨌든 조장님을 따라 길드를 탈퇴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저도요. 아! 물론 저는 세진씨가 길드장이 되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귀여운 아이들도 매일 볼 수...... 아앗!”

이번에도 김유미의 발언은 윤동현에 의해 중단되었다.

“조금 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여기 모인 사람들끼리 길드를 만든다면 서율희 조장님이 가장 길드장에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너……"

"허허."

윤동현의 지지 발언에 서율희는 당황한 얼굴을 했고, 그 돌발적인 행동에 아저씨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사람들의 반응에도 윤동현은

꿋꿋하게 자신이 할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세진 씨가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길드장이 된다고 해도 저는 불만없이 따를 생각입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 주시죠."

"......?"

“절대 떠밀리듯 길드장 자리를 수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롯이 세진 씨의 확실한 의지로 선택하시는 겁니다."

진지하다 못해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윤동현의 이야기.

당황하던 서율희나 아저씨도 그 모습에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저 친구가 하는 말이 일리가 있네. 세진아. 너도 대훈 아우의 떠밀림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수락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깔끔하게 거절해라.”

"형님."

"가만히 있어봐라. 너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기 세 사람은 자신의 시간과 커리어를 걸고 하는 일이다. 저 정도 요구는 당연한 일이야."

강유환 회장의 따끔한 일침에 아저씨는 머리만 긁적거렸다.

“만약에 제가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내 물음에 서율희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두 번째 계획도 있어요. 임시로 다른 사람을 길드장으로 하고 길드를 만드는 일은 계속 진행할 예정이에요."

“꼭 네가 길드장이 아니더라도 길드를 만드는 일 자체는 모두 동의한 상황이니까. 물론 나는 네가 길드장이 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생각한다."

아저씨의 말을 끝으로 거실에는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내

결정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

'하아. 어떻게 해야 할까?'

마음속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많은 사람이 나를 믿고 길드장이라는 자리를 맡기려는 것은 굉장히 기쁜 일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내가 이런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워내기 힘들었다. 내가 힘들게 고민을 이어나가고 있을 때.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임진혁 이 내게 말을 걸었다.

“세진아. 지금 스스로가 길드장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고민하는 거지?"

-끄덕.

“처음에 이 사람들이 모여 길드를 만들고, 너를 길드장으로 세우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 계획에 동의했어. 그만큼 너를 믿기 때문이지."

“.......”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다 마찬가지일 거야. 네가 완벽하게 길드장에 어울리는 사람이어서 아니라, 널 믿고 있기 때문에 이런 계획을 세운 거야.”

임진혁의 이야기에 사람들은 조금은 낯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고 헛기침을 했다.

“만약에 네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다면. 이렇게 널 믿어주고 있는 사람들을 믿어봐."

“믿어주는 사람들…...”

“그래. 모두 네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그러니까 조금 더 자신감을 가져봐.”

그의 이야기에 나는 잠시 멍한 기분이 되었다.

처음에는 길드장이라는 자리에 대한 무거운 부담감만 느껴졌다면. 이제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의 기대감과 신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부담감은 점점 작아지고, 나를 믿어주는 사람들에 대한 뿌듯한 감정이 차올랐다.

나는 한차례 머리를 거칠게 흔든 뒤.

결심한 표정으로 선언했다.

"해볼게요. 길드장,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최선을 다해볼게요."

내가 길드장 자리를 수락하자 아저씨가 가장 먼저 크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크하하하! 나는 믿고 있었지. 암!

역시 세진이야."

강유환 회장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고, 임진혁 역시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율희는 방긋 웃으며 약간은 장난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세진 씨, 아니 이제 길드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제발 지금은 편하게 해주세요."

그녀는 어색해하는 내 반응에 더욱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윤동현과 김유미도 한결 가벼워진 표정으로 내게 인사를 해왔고, 나는 기꺼운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 덜컥!

- 다다다닷!

“아빠, 어떻게 됐어요?"

“우리 길드 만드는 거예요?"

정씨 남매는 2층에서 1층 분위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지, 분위기가 왁자지껄해지자 곧바로 뛰어 내려와 질문을 던졌다.

“하하. 그래. 만들기로 했다. 세진이가 길드장이다."

“오빠. 축하해요."

“역시 세진이 형이야.”

내가 길드장이 된다는 이야기에 남매는 크게 기뻐하며 나를 축하해줬다.

그리고 뒤늦게 아이들도 2층에서 내려오더니, 들뜬 분위기에 신이 난 표정을 하고 나에게 달라붙었다.

“아빠, 길드장이 되는 거예요? 근데 길드장이 뭐지?"

“세진이 대장이 된다는 이야기야.

내말맞지?"

“하하하.”

순진한 아이들의 모습에 사람들 입에서는 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집들이로 시작한 모임이 어느새 길드 창설 축하 자리로 변해 버리고.

"자자. 앞으로 새롭게 만들어나갈 길드를 위해 건배하자고. 우리 길드장님이 한 말씀 해줘."

나는 아저씨의 성화에 못 이겨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며 잔을 들었다.

"어...… 조금은 갑작스럽게 일이 진행돼버렸지만. 어쨌든 열심히 한 번 해보겠습니다."

“길드장님. 앞으로의 포부 한번 밝혀주시죠."

“딴 건 모르겠고 저번 골렘 균열을 공략했던 것처럼만 할 수 있는 길드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와아아!"

지난번 꽤 두둑한 보상을 획득했던 골렘 균열을 언급하자, 사람들은 뜨거운 반응으로 나를 환호해줬다.

새로운 길드가 탄생하는 자리를 축하하며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아직 술을 마실 수 없는 선우와 아이들은 아주머니의 관심 아래에서 음료수를 마셔야 했다.

밤이 깊어지고.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강유환 회장이었다.

“형님, 벌써 가시려고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시지."

“이 정도면 충분해. 나머지는 젊은

사람들끼리 즐기게 놔둬야지."

"저랑 얼마나 차이가 나신다고, 그러면 저도 민망해서 못 있습니다.”

“허허허.”

아쉬운 아저씨의 말에도 그는 사람들과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현관문을 나섰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로 술자리를 즐기게 하고 나만 그의 뒤를 따라서 대문까지 배웅했다.

"근데 언제까지 숨기실 거에요?"

“흐음. 뭐 딱히 안 밝혀도 상관없지 않으냐? 어차피 내 역할은 돈만 투자하는 일인데."

“그렇긴 하지만……”

"그리고 이미 눈치챈 사람도 몇 명 있는 것 같던데. 특히 그 조장이라는 아가씨 말이야."

"그런가요?"

“윤동현인가 하는 친구도 이상하다 생각하는 것 같았고. 그래도…….”

"......?"

“대훈 아우는 이대로 놔두면 죽을 때까지 모를 것 같더구먼."

“네, 그건 확실하죠."

강유환 회장이 대문을 나설 때쯤.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검은색 고급 차량이 딱 알맞게 집 앞에 멈춰 섰다.

“모시겠습니다. 회장님."

운전기사는 강유환 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내 쪽을 향해서도 작게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느라 수고 많았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아닙니다."

그는 운전기사가 열어주는 뒷문에 올라타기 직전에 나를 보며 말했다.

“세진아."

“네?”

“지금 모인 사람들. 정말 모두 좋은 사람인 것 같더구나.”

“그렇죠. 정말 좋은 분들이죠.”

“그만큼 네가 올바르게 살아왔다는

뜻이겠지."

“.......”

갑작스러운 칭찬에 쑥스러우면서도, 그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붕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누군가를 이끄는 자리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야 할 거다.”

“그 정도는 당연히 각오하고 있어요."

“후후, 그래. 늙으니 괜한 걱정만 느는구나. 너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그럼 나중에 보자꾸나."

"들어가세요."

"오냐."

강유환 회장은 마지막으로 많은 감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나를 한 번 응시하고 차에 올라탔다.

그를 태운 차량이 부드럽게 나아가기 시작하고, 주택가의 거리를 빠져 나가 차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차가 지나간 거리를 바라보았다.

- 덜컥!

현관문을 열고 선우가 얼굴을 빼꼼 내밀며 나를 불렀다.

반쯤 열린 현관문 사이로, 술에 취해 살짝 풀린 목소리로 나를 찾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뭐해요? 아빠가 빨리 들어와서 술잔 받으라는데요.”

"알았다. 알았어. 아저씨는 나중에 아주머니한테 얼마나 또 혼나시려고..….”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직도 달아오른 분위기의 술자리로 돌아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