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70화
57. 데이트(3)
카페를 나온 후.
나는 신지아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고층 빌딩이 모여있는 도심
한복판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떤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인 건물로 입장했다.
눈치껏 주변을 둘러보니 아마도 미래 그룹과 관련된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장을 차려입고 업체에서 온 듯한 사람들과 카메라를 들고 이곳저곳 기웃거리는 기자들까지.
행사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신지아는 안내 직원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활짝 웃으며 내 팔을 이끌었다.
"세진 씨. 이쪽이에요."
붐비는 인파들을 헤쳐나가, 행사장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미래 그룹에서 만들어 낸 아티팩트들이 줄줄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래도 아티팩트 쪽에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기에, 전시되어 있는 아티팩트들이 얼마나 대단한 물건들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내가 아티팩트들에 한 눈이 팔린 사이 신지아는 계속 나를 이끌고 행사장 안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는 큰 입구와 그곳을 지키고 있는 직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아무래도 행사자 안쪽에서 또 다른 이벤트가 있는 듯했다.
"잠시만요."
신지아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직원들과 약간 길게 대화를 나눴다.
그녀가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직원들에게 뭔가를 보여주니 화들짝 놀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이제 됐어요. 들어가요."
“네……”
그 직원들은 신지아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에게 끌려갈 뿐이었다.
입구 안쪽으로 들어오니 그곳에는 큰 무대와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리고 그 뒤쪽으로는 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사람들이 쫙 늘어서 있었다.
"조금 불편하지만 우리는 뒤쪽에 서 있죠."
“네. 근데 지아 씨. 여기에는 왜 온 거예요?"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곧 시작하니까."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다시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전체적인 조명이 살짝 어두워지고 무대 쪽에 조명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무대 뒤쪽 큰 화면에 글자가 떠올랐다.
'아티팩트 신작 발표회.'
그리고 무대 위에 중년의 여성이
올라오면서 이곳의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저분 지아 씨가 있던 연구소, 소장님 아니세요?”
"맞아요. 오늘 우리 연구소에서 개발한 아티팩트 신작 발표회에요."
내가 말한 대로 무대 위에 올라온 사람은 저번에 연구소에서 봤던 이연수 연구소장이었다.
그녀는 이런 자리가 익숙한지 전혀 긴장한 기색도 없이, 여유롭게 발표회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약간은 지루한 도입부를 지나 연구소에서 개발한 새로운 아티팩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뒤쪽 화면에서 아티팩트의 성능을 설명하는 영상이 함께 흘러나오자.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메라들이 연달아 플래시를 터뜨리고,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몸을 앞으로 숙여 새로운 아티팩트를 관심 있게 바라봤다.
나 역시 흥미를 가지고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던 신지아가 내 팔을 툭툭 건드리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말했다.
“제가 만든 아티팩트에요."
“네?”
“내부 회로부터 부품 제작까지 전부 제가 기획한 아티팩트에요.”
"아..….”
사실을 알려준 신지아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그녀는 기뻐하기보다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에게는 꽤 의미 있는 자리에요.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아티팩트를 만드는게 제 꿈이었으니까, 그래서 세진 씨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었어요.”
살짝 회한에 빠진듯한 그녀의 표정에 나 역시 자연스럽게 예전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석을 팔기 위해 간 곳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계약을 맺고, 낡아 쓰러질 것 같았던 공방에서 같이 아티팩트 연구도 하고.
그녀가 만들어 준 아티팩트들로 위기를 극복하면서 나와 신지아 모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전에 많은 일이 떠오름과 동시에.
발표회에 소개되고 있는 아티팩트를 보니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듯한 뿌듯함이 느껴졌다.
“아버지도 이 장면을 함께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
신지아는 많은 후회를 가지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꼬옥.
“......!"
내가 그녀의 한쪽 손을 꽉 잡으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더 놀라는 그녀의 반응에 약간 민망한 생각이 들었어도, 꽉 잡은 그녀의 손을 풀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지막에는 은은한 미소까지.
그렇게 우리는 발표회 내내 손을 꼭 붙잡고 남은 시간을 보냈다.
***
아티팩트 신작 발표회가 끝나고.
발표회장 안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으로 넘쳐났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났던 아티팩트의 성능에 기자들은 한시라도 빨리 기사를 쓰기 위해 노트북을 두드리기 바빴고, 업체 사람들도 제각각의 표정으로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
"......"
한편 나와 신지아는 발표회가 끝났음에도 어색한 침묵을 유지하며, 손을 꼭 붙잡은 채로 회장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일단 충동적으로 손을 잡기는 했는데 왠지 어색한 기분에 다시 놓기도 그렇고, 뭔가 말을 꺼내기도 껄끄러웠다.
'일단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까……'
나는 아무도 들어줄 사람도 없는데 속으로 변명을 하며 계속 신지아의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했다.
“지아 씨! 잠시만요."
회장을 거의 빠져나가기 직전에 뒤 쪽에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이연수 연구소장이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아 씨, 오면 온다고 연락을 해 주지 그랬어요.”
"죄송해요. 소장님."
약간 서운함이 묻어있는 연구소장의 말에 신지아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세진 씨, 오랜만이에요."
“네. 오늘 발표회 정말 좋았습니다.”
“호호, 고마워요."
그녀는 내 칭찬에 기분이 좋은지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러다 이연수 연구소장은 뭔가를 발견했다는 듯이 나와 신지아 쪽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우리가 잡고 있는 손 쪽을.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신지아는 화들짝 놀라며 잡고 있던 손을 놓으려 했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손에 더 힘을 주며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신지아는 크게 당황하며 얼굴을 붉혔지만 결국에는 손을 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이연수 연구소장은 묘한 미소를 짓더니 신지아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지아 씨, 조금 있으면 기자들과 질문 시간이 있을 건데 같이 가지 않겠어요? 세진 씨는 따로 대기실을 마련해 드릴게요."
신지아는 연구소장의 제안에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해요. 소장님, 오늘은 그냥 구경하러 온 것뿐이에요."
"그런가요?"
이연수 연구소장은 정말로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억지로 신지아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연구소장은 급한 일정 중에 우리를 보러 잠시 나왔는지,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급하게 다시 돌아갔다.
“우리도 이제 갈까요?"
-끄덕.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신지아를 이끌고 행사장을 빠져나갔다.
다음으로 우리가 향한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주변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여기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요.”
“정말 그렇네요. 예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출근했었는데."
우리가 도착한 곳은 예전에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이 있었던 공터였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화재에 처참하게 남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으로 변했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한 캔씩을 들고, 뒤쪽 공터에 있는 바위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나와 신지아는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예전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공터에서 문양의 힘을 시험하다가 폭발한 이야기, 아티팩트 경연대회에 있었던 이야기, 골렘의 핵을 구하러 간 이야기.
정말 많은 일들 있었고.
술기운 때문인지 그 모든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 일인 것처럼 아련하게 느껴졌다.
하늘에 별이 떠오르고, 마시던 맥주캔이 모두 비워졌을 때쯤.
"이제 가볼까요? 세진 씨. 너무 어두워졌네요.”
“그러죠.”
가로등 불빛에 의존해 이야기를 계속 나누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내려가 도로변으로 나온 뒤.
휴대폰으로 신지아가 타고 갈 콜택시를 불렀다.
“......”
“......”
바로 전에까지는 맥주를 마시며 신나게 떠들었는데, 헤어질 순간이 다가오자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렇게 침묵이 흐르는 사이 택시 한 대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스으으윽.
“콜택시 부르셨죠?"
“맞아요. 저 그럼 가볼게요. 세진씨. 오늘 즐거웠어요."
“네……”
간단히 작별인사와 함께 신지아는 내 쪽을 바라보며 방긋 미소를 지어 주고, 택시에 올라타기 위해 뒷문을 열었다.
그녀가 택시에 몸을 실으려는 순간.
"잠깐만요. 지아 씨."
나는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아쉬움에 그녀를 팔을 붙잡았다.
“네?”
"잠시만요."
깜짝 놀란 신지아는 엉거주춤하게 다시 택시 옆에 서면서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으니, 뭔가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았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세진 씨?"
의아한 표정을 짓는 신지아.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지아 씨. 아직 지아 씨를 태워줄 차도 없고, 집에는 신경 써줘야 할 아이들도 많이 있지만, 오늘 지아 씨랑 함께하면서 저도 정말 즐거웠어요."
"......"
"그러니까 저기…… 혹시 괜찮으시다면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을래요?”
횡설수설한 내 고백에 신지아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부정적인 반응에 가슴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고, 끔찍한 미래가 그려지는 와중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니. 이런 식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
탓하는 그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거기 형씨, 내가 웬만하면 가만히 있으려고 했는데 아가씨 말대로 너무했네."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 아저씨도 운전석에서 조수석 창문까지 몸을 내밀며 나를 힐난했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 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신지아의 부드러운 손이 내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 손으로 내 얼굴을 들어 올려 눈을 마주쳤다.
“이번만 한 번 봐주는 거예요."
"네?"
-쪽!
그녀의 얼굴이 내 쪽으로 훅 다가오더니, 볼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멍한 표정을 짓는 사이, 그녀는 내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곧바로 택시에 올라타 버렸다.
-부릉!
나는 떠나가는 택시를 바라보며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손을 들어 볼에 남아있는 부드러운 감촉을 매만지다가.
"하하. 하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저 사람으로 괜찮겠어요? 엄청 허술해 보이던데?"
택시 기사는 백미러로 신지아를 바라보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괜찮아요. 그래도 할 때는 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요?"
“아니면 제가 책임지면 되니까 상관없어요.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
“허허. 아가씨 성격이 화끈하네요.”
신지아는 택시 기사 아저씨와 이야 기를 나누며, 조금 전에 멍한 표정을 짓던 전세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오늘 하루 중에 가장 기분이 좋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