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68화
57. 데이트(1)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는 신지아의 목소리에 나는 순간적으로 기분 좋아짐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골렘 제작이 중요하다지만, 다짜고짜 먼저 부탁을 꺼낼 수는 없었기 때문에 평범한 안부 인사로 대화를 시작했다.
“요즘은 일은 어떠세요?”
-어휴. 이제는 조금 한가해진 것 같아요. 저번에 들어왔던 최상급 마정석 때문에 한동안은 그걸로 주문 제작하느라 엄청 바빴거든요.
신지아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함께 공방에서 일했을 때부터 느꼈었지만.
워커홀릭이나 다름없는 신지아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 같다.
그녀는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쉬더니.
현장 상황은 생각해주지 않고 무작정 사업을 진행하는 사업팀 쪽 험담을 약간 흥분해서 늘어놨다.
그렇게 한동안 불평, 불만을 늘어놓던 그녀는 스스로 깜짝 놀란 듯 반응하며 사과했다.
-어머! 죄송해요. 너무 제 이야기만 했죠. 최근에 쌓인 게 많아서…….
“괜찮아요. 그렇게 많이 말한것도 아닌데요. 뭘.”
-그러고 보니 이엘은 요즘 어떻게 지내요? 이제 좀 괜찮아졌나요?
신지아도 최근에 있었던 이엘의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었기에, 걱정이 묻어나오는 말투로 이엘의 근황을 물었다.
“네. 이제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녀는 이엘이 괜찮다는 이야기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안도했다.
이렇게 서로의 근황에 관해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다가, 신지아 쪽에서 먼저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근데 오늘은 세진 씨가 무슨 일로 나한테 먼저 전화를 하셨을까? 저번처럼 또 대뜸 뭔가를 부탁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죠?
“…….”
-뜨끔!
이게 바로 여자의 감이라고 하는 건가?
빈틈을 보이자마자 정곡을 찔러오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진땀을 흘리며 긴장하기 시작했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연락 한번 없다가 세진 씨 필요할 때만 저에게 불쑥 연락하지 않았었나요?
“크흐흠. 그때랑은 조금 다르죠. 최근에는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주기적으로 연락은 했었잖아요.”
나는 필사적으로 억울한 상황을 해명했다.
저번에 한 번 크게 혼난 뒤로 신지아와의 연락은 주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최근에는 이엘에게 안 좋은 일도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다.
-흐응. 그런가요?
“물론이죠. 절대 지아 씨를 소홀히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신지아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지 딱히 내 말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좋게 상황이 넘어가는 듯 보여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얼마 전에 놀이공원에 놀려고 가셨죠? 우연히 사진을 보게 됐는데 혜린씨랑 정말 즐거워 보이던데. 세진 씨는 정말 좋았겠어요?
“…….”
-나도 놀이공원 정말 좋아하는데. 누가 불러주는 사람이 없더라고요.
아뿔싸……!.
가슴이 철렁 떨어지는 상황.
그와 동시에
나는 놀이공원에서 오연우가 했던 말이 스치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저는 너무 즐겁게 사진 많이 찍으면 여자친구가 질투해서 안 돼요.
설마 오연우의 이 대사가 복선일 줄이야.
물론 놀이공원에 놀러 간 이유는 아이들을 위해서였다.
나도 즐겁게 지내기도 했지만, 대부분 시간은 아이들을 챙기기 위해 사용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핑계 대기에는 같이 갔던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정씨 가족을 모두, 임진혁, 오연우, 이혜린, 심지어 경호팀까지.
-저는 아예 세진 씨 머릿속에 떠오르지도 않았나 봐요.
“그게 아니라. 지아 씨가 너무 바쁘다 보니까, 혹시 괜히 물어봤다가 신경을 쓰게 만들까 봐서…….
-…….
“…….”
-…….
“죄송합니다.”
휴대폰 너머로도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나는 옹색한 변명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찌할 줄 모르는 반응을 보이자 신지아는 한숨을 내쉬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어쩌자고 이런 답답한 사람을…….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
잘못 되물어봤다가 된서리를 맞고, 서러운 마음에 비 맞은 강아지마냥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이번 주말에 뭐해요?
“이번 주말이요? 어…… 오전에는 약초밭 관리 좀 하고. 오후에는 요즘 배우고 있는 일이 있어서 공부 좀 하고. 저녁에는 또 연구하고 있는 게 있어서…….”
-아니. 주말인데 왜 이렇게 일정이 많아요?
“죄송합니다.”
순간 일정이 많은 게 죄송한 일인가 싶기도 했지만, 일단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를 내뱉었다.
-이번 주말 일정 다 비워놔요.
“네? 갑자기 일정을 다 비우라고요?”
-싫어요? 그러면 앞으로 부탁할 일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지 마시고 회사 사업팀 쪽으로 하시든가요.
“비우겠습니다. 싹 다 비워놓겠습니다.”
-나머지는 문자로 보내놓을 테니까. 약속 어기지 말아요.
-뚝!
그녀는 약속을 어기지 말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
나는 뭔가 순식간에 전개된 상황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앞뒤 상황을 제대로 조립해본 결과.
“이거 혹시 데이트인 건가?”
* * *
데이트.
영어로는 그냥 날짜라는 뜻의 영어 단어.
하지만 남자와 여자 사이에 쓰이게 된다면 꽤 달콤한 의미로 변하는 마법의 단어.
처음에는 약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통화가 끝나고 날아온 문자를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9시까지 ◎◎공원 앞으로 나와요.
-대충 차려입고 나오면 아티팩트 위력 시험용 더미가 되는 줄 아세요.
조금은 살벌한 문장이 섞여 있기는 했어도, 최소한의 눈치가 있다면 신지아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 수 있는 상황.
골렘 제작에 대한 부탁은 아직 꺼내지도 못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신지아와 데이트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설렘도 잠시.
‘근데 어떻게 차려입고 가야 하지?’
‘데이트 코스는? 둘이서 뭘 해야 하지?’
’점심은? 저녁은? 식당에 예약해 둬야 하나?‘
’그러다가 혹시 늦어지면……. 으어어억!‘
머릿속은 온통 데이트에 대한 고민과 갈등으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
그래서 그런지 처음도 아닌데 모든 것이 어렵게 느껴졌다.
마치 첫 데이트를 준비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혼자서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다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옷! 옷부터 준비하자.‘
나는 황급히 옷장으로 뛰어가 옷들을 뒤져보다가 딱히 입을만한 옷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옷장 앞에서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1층에 거실에는 아이들과 임진혁이 편한 자세로 쉬고 있다가, 허겁지겁 뛰어 내려온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나는 임진혁에게 다가갔다.
“형. 부탁 좀 해도 되죠?”
“뭔데 이렇게 급해? 일단 말해봐.”
다짜고짜 부탁을 건네는 내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짓던 임진혁은, 신지아와의 이야기를 듣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 난 또 뭐라고. 그러니까 데이트에 나갈 옷이 필요하다 이거네.”
“부탁해요. 형 옷 잘 입잖아요.”
그와 함께 살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인데.
강한 인상과 위압적인 겉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임진혁은 옷을 꽤 잘 입는 편이었다.
그가 직접 밝힌 바로는
워낙 체형이 큰 편이라 입을 수 있는 옷의 선택지가 별로 없으니, 오히려 더 옷 선택에 신경을 쓰는 편이라고 한다.
실제로 놀이공원에 놀러 갔을 때 차려입은 모습을 보면 모델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으니.
아무튼,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에 임진혁은 부탁하기 딱 좋은 사람이었다.
“흐음. 그냥 평소처럼 입고 가도 되지 않을까? 대신 머리 손질 좀 하고, 깔끔하게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지아 씨가 제대로 안 차려입으면 아티팩트 시험용 더미로 써버린다는데요.”
“푸하하. 지아가 화끈한데.”
“아. 형! 웃지만 말고요. 저는 진지하다고요.”
“알았다. 알았어. 그럼 일단 같이 옷장 좀 볼까?”
나와 임진혁은 같이 내방으로 향했다.
거실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도 호기심을 느꼈는지 따라서 내방으로 올라왔다.
임진혁은 옷장을 대충 뒤져보더니 툭툭 코디를 해줬다.
나는 그가 맞춰준 대로 옷을 직접 입어봤다.
“어때?”
“멋있어요. 아빠!”
“잘 어울려.”
“퓨이!”
“후모?”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이건 어때?”
“그것도 멋있어요.”
“응응. 멋져!”
“퓨이! 퓨이!”
“후모.”
내가 뭘 입어도 멋지다고 환호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고맙기는 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형. 어때요?”
“다 괜찮은 것 같아.”
“새로 옷을 안 사도 될까요?”
“너도 지아랑 하루 이틀 보는 사이도 아니고. 새 옷 입고 나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리고 잘 차려입고 나오라는 말뜻은 이 데이트를 신경 써달라는 거지 새 옷을 사라는 말이 아니야.”
구구절절 맞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엘이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데이트? 아빠. 데이트가 뭐예요?”
“어…… 그러니까…….”
“데이트가 뭔지 내가 알아!”
이엘의 기습 질문에 당황하는 사이, 티아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튀어나왔다.
“데이트는 말이야. 서로 관심이 있는 남자랑 여자가 만나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거야. 내 말 맞지?”
“와아. 아빠. 진짜예요?”
“퓨우우우!”
달콤한 연애 이야기에 아이들은 눈빛을 반짝이며 내 쪽을 바라보았다.
모렛만 별 관심이 없는지 시큰둥한 표정으로 딴짓을 할 뿐이었다.
“나도 데이트해 보고 싶다. 아빠. 저도 따라가면 안 돼요?”
“나도 따라갈래!”
“퓨이! 퓨이!”
갑자기 아이들은 데이트에 큰 관심을 보이며, 따라가고 싶다며 초롱초롱 눈빛 공격을 보내기 시작했다.
“어…… 어. 그건 좀…….”
“안돼요? 저도 지아 언니 보고 싶은데.”
“맞아. 나도 보고 싶어.”
“퓨우우. 퓨이.”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으니, 아이들은 풀이 죽은 표정으로 변했다.
얼굴을 흐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으음. 지아 씨도 아이들 본지 오래됐으니까. 같이 놀러 다니자고 하면 안 되려나?’
내가 이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어깨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진지한 표정의 임진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진아.”
“네?”
“나도 그렇고 지아도 아이들 정말 좋아하지만. 방금 네가 머릿속으로 떠올린 생각은 좀 아닌 것 같다.”
“…….”
“아이들은 내가 잘 돌보고 있을 테니까. 다른 건 걱정하지 말고 둘이서 재미있게 놀다 와.”
그의 말을 듣고 다시 정신을 차린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아이들을 달래줬다.
“미안해. 얘들아. 이번에는 같이 가기 힘들 것 같아. 지아 씨는 다음에 꼭 데려올 테니까. 조금만 참자. 알았지?”
아이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지만, 부드러운 내 타이름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임진혁도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 * *
대망의 아침이 밝아오고.
나는 약속 시각보다 훨씬 일찍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 앞에 섰다.
아직 아침을 챙겨 먹지 않은 아이들이 약간은 비몽사몽인 모습으로 배웅을 나왔다.
“형. 그럼 아이들 좀 부탁할게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지아랑 재미있게 놀다 와. 그리고…….”
“……?”
“외박할 거면 미리 문자만 넣어주고.”
임진혁의 조금 과하게 느껴지는 배려에 나는 일단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머리를 긁적거렸다.
“얘들아. 나 다녀올게. 진혁 삼촌 말 잘 듣고 있어야 해.”
“다녀오세요. 아빠.”
“흐아암. 나중에 봐.”
“퓨이!”
“…….”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이엘, 귀엽게 하품하는 티아, 그나마 초롱초롱한 눈빛의 퓨이, 마지막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렛까지.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아두고 나는 현관문을 나섰다.
* * *
약속 시각 30분 전에 만날 장소에 도착한 나는 왠지 모르게 초조한 마음에 주변을 서성거리면서 계속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갈수록 초조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고 점점 커져 나갔다.
약속 시각 10분 전.
-또각. 또각.
뒤쪽에서 들려오는 여자 구두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니.
“오래 기다리셨어요?”
살짝 들뜬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