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65화
56. 또 다른 시작(1)
새로운 집을 구하고, 균열 창조 능력으로 아이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게 된 이후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물론 가장 많은 변화를 보인 것은 아이들이었다.
한창 호기심 많던 아이들에게 숲속 통나무집을 벗어난 바깥세상은 그야말로 끝없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정말 한동안은 바깥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아이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야 할 정도였다.
이제는 아이들도 어느 정도 적응해서 진정이 된 상태지만, 아직도 아이들에게 바깥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신세계였다.
이렇게 신난 아이들과 더불어 신이 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정씨 가족의 아주머니였다.
“호호. 정말 새로운 딸들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좋다.”
의욕이 넘쳐 흐르시던 아주머니는 티아와 이엘을 데리고 각종 옷과 필요한 물건들을 쇼핑하러 다녔다.
아무래도 나는 남자다 보니 챙겨줄 수 없는 섬세한 부분이 있다며 아주머니는 정말 딸처럼 티아와 이엘을 챙겨주었고, 아이들도 그런 정성에 기쁜 듯 보였다.
아. 물론 결제는 전부 내 카드로 했기 때문에 휴대폰 문자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결제 알림을 보았을 때, 등골이 조금 오싹해지기는 했지만.
“세진. 이 옷 어때? 예쁘지?”
“아빠. 저도요. 저도 예뻐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새로 산 예쁜 옷을 자랑하는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에 결제 금액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그래. 이렇게 예쁜데 당연히 사야지. 암.’
오히려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사 같은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최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저번에 요리대회에 출전했던 유현성과 콜린의 가게에도 초대받았다.
두 사람의 가게는 너튜브 요리대회 이후에 엄청나게 유명해져서 각종 방송에 출연할 정도로 굉장히 바빠졌다.
이미 대회 우승 보상으로 약속했던 기간은 끝났지만, 지금도 조금씩 호수 물고기를 요리 재료로 제공해 주고 있는데.
이 호수 물고기가 가게에 들어올 때마다 가게에 예약하려는 손님들이 아직도 넘쳐난다고 하니 그 인기를 제대로 실감하고 있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두 요리사는.
“언제 꼭 한번 가게로 모시고 싶었습니다. 시간이 여유로울 때가 있으시다면 연락해 주세요. 가게의 모든 예약을 비워놓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헤이. 세진! 설마 나에게서 사랑스러운 엔젤들을 대접할 기회를 빼앗지는 않겠죠? 언제든지 연락해요. 지금 당장에라도 맛있는 요리를 준비할 테니까.”
경쟁적으로 나와 아이들을 초대하기 위해 연락을 보내왔다.
먼저 두 가게에 들렀던 정씨 가족에게 정말 좋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아이들도 함께 갈 수 있게 되어서 곧바로 두 가게에 예약을 잡고 방문했다.
유현성의 한식점에서는 정말 고급 식상에 왔다는 느낌을 제대로 받으며 대접을 받았다.
고급스러운 방에서 유현성 주방장이 풀코스 요리를 직접 하나씩 가지고 나왔고, 재료나 요리법에 대해서도 정성 들여 설명해 줬다.
맛은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
너무 극진한 대접에 조금 어색한 느낌은 있었어도 아이들도 맛있게 식사할 수 있도록 유현성이 엄청나게 배려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콜린의 레스토랑에서는 조금 상반된 분위기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마치 파티에 초대된 것처럼, 가게 직원들과 반갑게 인사도 나누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거기다 콜린이 직접 관리하는 주방 안까지 안내받아 직접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기도 하고, 아주 간단한 요리법을 배우기도 했다.
물론 콜린의 요리도 엄청나게 맛있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유현성의 식당에서는 직접 만들어 포장된 여러 가지 반찬들을 선물 받았고, 콜린에게서는 미국에서 가져왔다는 여러 가지 과자와 기념품들을 선물 받았다.
두 요리사 모두 언제든지 다시 찾아와 달라는 말과 함께 우리를 배웅해줬고, 나와 아이들은 아주 기분 좋게 가게를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바깥세상과 만남과 더불어 새로운 일을 시작한 존재가 있었는데.
“여기 이렇게 하면 되지?”
“후모! 후모!”
바로 모렛과 임진혁이었다.
무슨 계기로 둘이 함께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둘은 갑자기 합심해 수제 맥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맥주를 만들기 위한 재료와 장비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본격적으로 맥주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호수를 따라 흐르는 깨끗한 강물을 떠다가 맥주를 제조하고, 통나무집 뒤편에는 만든 맥주를 보관할 창고도 뚝딱 만들어 냈다.
“근데. 모렛…… 너무 많이 만든 것 아니니?”
“후모! 후모!”
창고에 가득 쌓인 맥주들을 보며 나는 질린 표정을 물었다.
모렛 특유의 맥주 사랑과 뼛속까지 박혀 있는 근로 의욕이 서로 상승 작용을 일으켰는지, 수제 맥주 가게를 오픈하나? 싶을 정도로 많은 맥주를 만들어 냈다.
내 물음에 모렛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오히려 화를 내며 항변했다.
녀석으로서는 창고를 가득 채운 맥주도 모자란 모양이었다.
창고에 가득 쌓인 맥주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모렛과 임진혁의 모습을 나는 묘하게 바라보았다.
이렇게 아이들의 각자 바쁘게 보내고 있을 때.
퓨이 역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 이야기의 시작은 바깥세상과는 상관없이 호숫가의 숲으로 돌아온 스승님으로부터 시작됐다.
* * *
“돌아오셨네요. 스승님.”
“그래. 잘 지냈느냐?”
“네.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베른하르, 내 스승님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내 안부를 물었고 나는 웃으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내 평범한 대답에도 스승님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함께한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지만 뭔가 따스한 정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미소를 짓던 스승님은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아르엘의 집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침중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엘 님은…….”
“그래. 알고 있다. 원하셨던 대로 내 친구를 따라 숲의 품으로 돌아가셨구나.”
“…….”
스승님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였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말에서는 씁쓸한 감정이 조금 묻어나왔다.
“이엘은 잘 지내느냐?”
“네.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그래. 잘했다. 정말 고맙구나.”
이엘이 잘 지낸다는 말에 스승님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피곤하실 텐데 일단 집으로 들어가시죠.”
나는 긴 여행에 피곤할 스승님을 통나무 집으로 이끌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익숙한 손님의 방문에 신난 표정으로 스승님을 맞이했다.
특히 이엘은 가장 환하게 웃으며 스승님에게 안겨들었다.
“마법사 아저씨!”
“허허. 이엘이구나. 잘 지냈느냐?”
“잘 지냈어요.”
“지금은 여기에서 사는 거냐?”
“네. 아빠랑 같이 여기에서 살고 있어요.”
“흐음.”
이엘의 입에서 나온 아빠라는 호칭에 스승님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바로 상황을 이해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잘 지내고 있었다니 정말 다행이구나.”
스승님은 밝은 모습의 이엘을 쓰다듬으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른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조금은 어색한 임진혁과도 짧게 눈인사를 나눴다.
점심 식사 시간은 아직 일렀지만.
스승님을 위해 조금 이른 시간에 점심을 준비했다.
꽤 만족스러운 식사를 대접받은 스승님은 거실 소파에 앉아 차를 즐기며 긴 여정의 피로를 털어내려 했다.
“제자야.”
“네. 스승님.”
“혹시 아르엘 님의 집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
“아르엘 님이 떠나가신 뒤로 이엘을 이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한번 정리는 했지만, 거의 원래의 모습 그대로예요.”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스승님은 이번엔 옆에 있던 이엘과 눈을 마주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엘. 혹시 괜찮으면 내가 아르엘 님이 계시던 집에 머물러도 괜찮겠니?”
“엄마랑 살던 집이요?”
“그래.”
아르엘의 집에 머물겠다는 스승님의 말에 내가 깜짝 놀라 말했다.
“스승님. 저희랑 같이 이곳에 계셔도 상관없는데.”
“아니다. 여기도 편하지만 나는 저쪽 집이 더 편할 것 같구나. 혼자 조용히 연구하기도 좋고.”
“…….”
이미 결심을 굳힌듯한 스승님의 모습에 더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확실히 조용히 연구하기 위해서는 이곳보다는 아르엘의 집에 더 좋을지도 몰랐다.
“이엘, 괜찮겠니?”
“네. 괜찮아요. 마법사 아저씨.”
“그래. 고맙구나. 대신 아르엘 님이 쓰시던 방과 물건은 절대 손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이엘의 허락을 받은 스승님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시선은 내 쪽으로 향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제자야. 당장 내일부터 정해진 시간에 내가 머무는 곳으로 찾아오도록 해라.”
“네?”
“당연하지 않으냐?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늦어지긴 했어도 당장에라도 마법에 입문해야지.”
“아…….”
정식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맺어진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마법에 대해 뭔가 배움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
드디어 정식으로 마법에 대한 입문이 시작될 것 같았다.
“늦게 시작한 만큼 큰 성취는 보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네가 원하는 치료법을 얻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할 게다.”
“네. 알겠습니다. 스승님.”
내 진지한 대답에 스승님은 마음에 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드디어 마법사가 되는 건가?’
물론 가장 큰 목적은 티머시 증후군의 치료법을 얻기 위함이 가장 컸지만.
그래도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봤을 마법사가 된다는 이야기에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레는 마음은 스승님의 가르침이 시작되자마자 철저하게 박살 났다.
* * *
“아니. 조금 전에 설명했는데 벌써 까먹은 것이냐?”
“…….”
“허허. 아직 기초 중에서 기초인 부분인데. 벌써 이 정도로 헤매다니.”
“죄송합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스승님의 마법에 대한 가르침은 처음부터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일단 스승님이 나를 위해 준비한 기초 마법서부터 난관의 시작이었다.
전혀 알 수 없는 ‘저쪽 세상의 언어’로 적혀 있는 마법서는 스승님의 해석 없이는 읽을 수조차 없었고.
겨우 해석을 받아적어 읽어도, 너무 난해한 이야기에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주 간단한 수식인데 이것도 이해하기 힘들어하다니.”
“…….”
생각보다 훨씬 더 떨어지는 내 마법사의 자질에 스승님은 계속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쩝. 그러게 그냥 제자로 받지 말고 치료법만 줬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은 불경스러운 내 생각과 달리, 스승님은 전혀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애초에 네가 마법사로서 자질이 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최대한 메꿔줄 테니 쉽게 포기하지 말아라.”
“스승님…….”
“자. 다시 해보자.”
부족한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스승님은 몇 번이고 똑같은 내용을 다시 설명해 줬다.
나도 힘들지만, 스승님의 정성을 생각해 최대한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스승님의 정성과 내 노력과는 별개로 진전은 더뎠다.
“잠시 쉬었다 하자꾸나.”
“하아아.”
피곤한 표정의 스승님이 잠시 방 밖으로 나서고.
혼자 남게 되자 나는 긴 한숨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 엎드려 버렸다.
옆에서 조용히 구경을 하고 있던 퓨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원래는 나 혼자 스승님께 오려고 했었는데, 웬일인지 고집을 부려 퓨이가 따라왔다.
“퓨이?”
“하. 퓨이야. 재미없지? 지금이라도 집에 데려다 줄까?”
“퓨이! 퓨이!”
퓨이는 고개를 흔들며 내 말을 부정했다.
그 귀여운 모습에 찡그렸던 표정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폴짝!
“퓨우우.”
“……?”
퓨이는 내 책상으로 폴짝 뛰어오르더니, 내가 머리를 싸매고 풀고 있던 수식을 빤히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꼬리로 펜을 들고 수식의 풀이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 어?…… 어?!”
“퓨이!”
마지막 해답까지 완벽하게 풀이를 끝낸 퓨이의 모습에 나는 경악한 표정으로 결과물을 내려다봤다.
때마침 스승님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오고.
“오. 내가 없는 사이에 수식을 풀어낸 것이냐? 제대로 잘 풀어냈구나.”
스승님은 깔끔한 수식의 풀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셨다. 나는 아직까지도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스승님께 사실을 전했다.
“그거 제가 푼 게 아닌데요.”
“뭐? 그럼 누가 풀었단 말이냐?”
“…….”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옆에 있던 퓨이에게 향했고, 스승님의 눈동자도 따라서 퓨이에게로 향했다.
“설마……?”
“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