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62화
55. 놀이동산에서(1)
아이들이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된 두 번째 날.
어제도 아주 많은 곳을 돌아다니고 즐겁게 지냈지만, 아이들은 다시 첫날처럼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오늘은 드디어 TV 광고에서 보았던 네버랜드의 요정 축제에 가는 날이었다.
혹여 날씨가 좋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도 구름 한 점 없고 바람도 선선하게 부는, 외부활동을 하기 아주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끝낸 아이들은 벌써 신난 모습을 보여줬고, 정씨 가족들 역시 조금은 들뜬 표정이었다.
‘놀이동산이라…….’
시설에서 자랐어도 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을 통해서 몇 번 가본 적은 있다. 어린 시절에 꽤 즐겁게 보냈던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마치 그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마음이 풍선처럼 조금씩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아이들과 함께했던 정씨 가족과 임진혁 그리고 오늘은 오연우까지 추가돼 대가족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일행에 한 사람이 더 추가되었는데.
“안녕하세요. 이혜린이라고 합니다.”
* * *
이혜린이 일행에 합류하게 된 사연은 전날 강유환 회장에게서 온 전화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내일 아이들과 놀이공원에 갈 예정이라고?
“아니. 진짜 도청 장치라도 심어둔 거예요? 그건 회장님이 또 어떻게 아시는 거죠?”
-후후. 도청 장치까지는 아니고. 정대훈 아우에게 들었다.
“아저씨가요?”
-저번에 양주 몇 병 보내줬더니 아주 좋아하더구나.
“이런.”
아저씨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유환 회장은 사실상 술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도청 장치를 심어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가 이런 정보들을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매번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다.
“네. 갑니다. 놀이공원. 설마 회장님도 따라오시려고요?”
-허허. 내가 그 정도로 눈치가 없지는 않아. 다 늙은 사람이 따라가봤자 분위기만 처지지.
“…….”
강유환 회장이 저런 식으로 대답을 하니까 괜스레 살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것 때문에 전화한 것이 아니라. 내일 어떻게 움직일 생각이냐?
“네? 뭐. 그냥 아저씨가 렌트해 온 차량 타고 움직이려고 했는데요.”
-그것 말고.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가는데, 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지 생각해 뒀느냐 묻는 것이다. 이미 남산 타워에서 한번 홍역을 치렀다고 들었는데.
“으음……. 그냥 최대한 조심히 움직이려고…….”
-이잉. 쯧쯧쯧.
자신 없는 내 대답에 강유환 회장은 말을 끊으면서 혀를 찼다. 나도 조금은 무책임한 대답이라는 것을 알기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내일 혜린이를 통해 타고 이동할 차량이랑 경호 팀을 보내줄 테니. 그렇게 알고 있어라.
“경호 팀까지요?”
-걱정하지 말아라. 괜히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정도로 유난을 떨지는 않은 테니. 혹시 일어날 불편한 상황을 통제하는 수준으로 주변을 지켜줄 거다.
강유환 회장의 말에도 나는 조금 과한 게 아니냐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이어지는 그의 일침에 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네가 아이들과 균열에 있을 때는 상관없었지만. 바깥세상으로 나온 이상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설마 거대 골렘에게 습격을 받았던 일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
과거 누군가의 공작으로 거대 골렘에게 공격을 받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런 일들이 아이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알았으면 긴말 말고 경호 팀의 도움을 받도록 해라.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쯧. 그리고 혜린이도 좀 챙겨주거라. 그래도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여동생이지 않으냐?
마지막 이혜린을 챙겨달라는 회장의 말을 끝으로, 나는 경호 팀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 * *
어제 아저씨가 렌트해왔던 차량보다 좀 더 많은 인원이 탈 수 있는 미니버스였다.
이혜린의 안내에 따라 올라탄 차량에는 이미 운전기사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이혜린과 준비된 차량을 보며 감탄했다.
“이야. 그러니까 이게 미래 그룹 회장님이 준비해 주셨다는 거죠?”
“네. 맞습니다.”
이혜린이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아저씨는 팔꿈치로 내 팔을 툭툭 치며 말했다.
“세진아. 너 대단하다. 미래 그룹 회장님한테 이런 대접도 받고. 언제 우리가 놀이동산에 간다고 말씀드린 거야?”
“…….”
나는 눈치 없는 도청 장치를 바라보며, 모든 진실을 까발리고 싶다는 마음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부릉!
차량이 출발하고.
차 안은 곧바로 어제와 같이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했다.
아이들은 창밖을 구경하기도 하고, 미리 준비해온 과자를 꺼내먹으며 웃음을 터뜨렸다.
한편 이혜린은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내 옆자리에 앉아 조금 뻣뻣한 자세와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가 먼저 말을 걸었다.
“혜린씨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혹시 세진이랑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혜린은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담담하게 과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간략하게 꺼내놓았다.
시설에서 함께 자란 여동생과 오빠같은 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사람들은 잠시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이혜린과 반대편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엘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럼 저 언니가 아빠 여동생이에요?”
“아빠??”
이혜린은 이엘의 입에서 튀어나온 아빠라는 단어에 크게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아. 혜린이한테는 아직 설명을 안 했었나?’
나는 눈으로 이혜린에게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는 눈짓을 보내고, 이엘의 질문에 대답해줬다.
“응. 맞아. 아빠랑 어렸을 적에 같이 자랐던 여동생이야.”
“으음.”
이엘은 큰귀를 움찔거릴 정도로 뭔가를 깊게 고민하더니, 밝은 표정과 함께 귀를 쫑긋거리며 외쳤다.
“기억났어요. 고모! 이 언니가 고모 맞죠?”
“고……모?”
“아니에요?”
이혜린은 고모라는 호칭을 듣고, 평소에 무표정한 표정이 순식간에 깨어졌다.
당황, 혼란 그리고 복잡미묘한 감정까지.
그녀는 마치 도움을 구하듯 내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나는 그 모습이 재미있게 느껴져, 이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줬다.
“맞아. 이엘. 한글 공부를 정말 많이 했구나.”
“헤헤.”
이엘은 내 칭찬에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이혜린은 귀여운 엘프 소녀에게 ‘고모’라는 호칭과 함께 질문 세례를 받아야 했다.
“고모!”
그녀는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자신을 고모라 부르는 존재 때문에 원래의 임무는 잊을 정도로 정신이 없어졌다.
그 덕분인지 딱딱하던 이혜린의 표정은 점점 부드러워졌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가에는 조그마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도 흐뭇하게 이 모습을 바라보는 와중에, 대뜸 오연우가 뒷좌석에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잠깐. 그러면 나도 형 동생이니까. 삼촌이네. 이엘 나도 삼촌하고 불러봐.”
꽤 그럴듯한 주장과 함께 오연우는 기대감 넘치는 표정으로 이엘에게 말했다.
하지만.
“…….”
“……?”
-도리도리.
이엘은 멀뚱히 오연우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엘의 단호한 거부에 그는 충격받은 표정과 함께 침몰해버렸다.
“하하하하.”
“호호호호.”
그 표정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는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고, 이혜린마저도 입을 가리고 웃을 정도였다.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차량은 계속 달려 놀이공원을 향해 나아갔다.
* * *
“와아!!”
“퓨이!”
“후모!”
드디어 네버랜드에 입장한 아이들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정말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주변 경관, 형형색색 아름답게 피어 있는 꽃들이 정말 환상에 나라에 도착한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입장하는 과정에서 퓨이와 모렛 때문에 잠시 혼란이 있었지만, 이혜린이 나서서 직원과 몇 마디 나누더니 바로 통과되었다.
아무튼, 무사히 모두 입장한 일행들은 축제 이벤트를 위해 만들어진 커다란 기념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기로 했다.
“자자. 모이세요.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요.”
오늘의 공식 사진사 오연우가 기념 동상 앞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고모! 빨리 와요.”
“저기 나는…….”
“혜린아 너도 빨리 와.”
처음에 이혜린은 사진을 찍지 않으려 했지만, 나와 이엘의 부름에 어쩔 수 없이 쭈뼛쭈뼛 옆으로 다가왔다.
“그럼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찰칵!
사진을 찍고 난 뒤.
일행이 향한 곳은 대형 수족관이 있는 아쿠아리움이었다.
마치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은 거대한 수족관에 평소에는 보기 힘든 수많은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모습은,
아이들의 눈동자를 반짝이게 만들기 충분했다.
신난 아이들이 이리저리 수족관 유리에 붙어 구경하는 사이, 독특한 아이들의 모습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했다.
“잠시. 무단으로 사진 촬영하시면 안 됩니다.”
“무슨 용건입니까? 저분들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면 저에게 해주시면 됩니다.”
언제 따라붙었는지 모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의 주변을 맴돌며, 불편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주었다.
이혜린 역시 우리와 함께 움직이며 인이어 무전기로 계속 뭔가를 주고받으며 주변 상황을 지휘했다.
물론 몰려드는 사람들의 시선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남산 타워 때 보다는 편하게 아쿠아리움을 즐길 수 있었다.
“세진. 저것 좀 봐!”
들뜬 목소리의 티아가 내 손을 붙잡고 거대한 수족관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커다란 돌고래들이 우리 쪽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퓨우우우.”
“후모…….”
퓨이와 모렛은 돌고래의 모습이 신기한지 넋이 나간 듯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한편, 돌고래들도 아이들의 모습이 신기한지 계속 우리 앞을 맴돌며 수조 안에서 우리를 구경했다.
수조 전체의 모든 돌고래가 우리 앞으로 몰려드는 신비한 현상에 관람객들은 물론이고 아쿠아리움 직원까지도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끼익! 끼이익!
-끽! 끽!
돌고래들은 마치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울음 소리를 냈고, 티아와 이엘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표정을 흐렸다.
“왜 그래?”
“이 아이들은 여기가 너무 답답하데.”
“맞아요. 이 막혀 있는 수조에서 나가고 싶데요.”
“…….”
아이들은 돌고래를 보며 불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줬다.
“세진 오빠. 너무 사람들이 몰렸어요. 여길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몰려든 돌고래 덕분에 벌써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일단 이혜린의 말대로 아이들과 일행을 재촉해 아쿠아리움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경호 팀과 이혜린의 활약으로 사람들과의 마찰이나 불필요한 충돌은 피할 수 있었다.
전세진과 일행들이 아쿠아리움을 빠져나가는 사이.
그들을 따라가려는 사람들의 무리를 경호 팀이 나서서 가로막았다.
약간의 소란은 있었지만 큰 충돌이나 마찰 없이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전세진의 일행이 사라진 쪽을 응시하며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존재가 있었다.
그는 경호 팀의 눈을 피해, 이미 멀어진 전세진 일행의 뒤를 자연스럽게 뒤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