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9화
54. 새로운 능력(1)
점심 식사가 끝난 이후.
나와 임진혁은 식사 뒷정리와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거실에서 TV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자주 보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채널에서 신나는 멜로디와 함께 광고가 흘러나왔다.
-빰빠밤! 빠밤!
-신비한 요정들과 함께 즐거운 축제를 함께하세요.
-가족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
-네버랜드로 오세요!
부엌까지도 신나는 광고 음악과 멘트가 들려왔어도, 다른 광고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식사 뒷정리를 마치고 나와 임진혁이 아이들이 있는 거실로 나왔을 때는, 방송이 끝나고 다시 광고가 시작되고 있었다.
캐릭터 운동화 광고, 소꿉놀이 장난감 광고, 애니메이션 극장판 광고 등등.
그렇게 수많은 광고가 지나가던 중.
아까 부엌에서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와 멘트가 다시 TV에서 흘러나왔다.
-빰빠밤! 빠밤!
-신비한 요정들과 함께 즐거운 축제를 함께하세요.
-가족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
-네버랜드로 오세요!
아이들은 광고 속의 화려한 축제 장면과 재미있어 보이는 요정들의 모습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내 광고가 끝나고 아이들은 내 눈치만 볼뿐 축제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TV나 너튜브를 통해 아이들은 바깥세상을 자주 구경하지만, 그곳으로 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들 모두 이런 광고를 볼 때마다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관심을 드러내더라도 절대 나에게 떼를 쓰거나 억지를 부리지는 않았다.
나는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기특하게 느껴지면서 동시에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이엘?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런데 오늘따라 TV의 광고가 끝나자 이엘이 눈에 띌 정도로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당연히 걱정스러운 마음에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엘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화면에 나오는 엘프들을 보니까 엄마 생각이 나서요.”
“…….”
처연한 표정으로 엄마 이야기를 꺼내는 이엘의 모습에 나는 순간 가슴이 아릿하게 저며왔다.
광고 속에 나온 요정들의 모습이 엘프와 닮아 있어서 자연스럽게 아르엘의 모습을 떠올린 듯했다.
“아빠. 저기에 가면 엄마랑 같은 엘프들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어…….”
눈동자에 한 줄기 희망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이엘.
나는 그 눈동자를 보며, 도저히 화면 속 요정들이 분장을 한 채 연기하는 가짜라고 설명할 수 없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나는 옆에 앉아 있던 임진혁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런데.
“흠흠.”
“…….”
정말 어려운 순간마다, 항상 먼저 나서서 믿음직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형이었는데.
이런 임진혁마저도 이엘의 눈동자를 마주 볼 용기는 없었는지 자연스럽게 내 시선을 피했다.
내가 당황하며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에 이엘의 귀가 축 늘어지며 더욱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변하려 할 때.
“당연하지. 저기 가면 당연히 만날 수 있지. 형. 맞죠?”
“으. 응? 어. 맞아.”
살짝 어색하긴 했어도 나와 임진혁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엘의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다.
이엘은 우리의 대답에 잠시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어두워졌다.
광고에 나오는 축제에 자신은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엘은 다른 아이들이 그러는 것처럼 떼를 쓰거나, 크게 슬퍼하지 않았다.
아마도 아르엘을 떠나보낸 슬픔이, 어린 엘프 소녀의 내면을 성장시키게 만든 것 같았다.
하지만 지켜보는 나로서는 그 모습마저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이엘. TV 속에 나오는 축제에 가고 싶어?”
“…….”
-끄덕.
이엘은 내 물음에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결심했다는 표정과 함께 말했다.
“그럼 우리 저 축제에 가볼까?”
“……?!”
“세진! 축제에 갈 수 있어?!”
“퓨이? 퓨이?!”
“후모!”
축제에 가자는 물음에 이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안 듣는 척 대화를 몰래 듣고 있던 아이들이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앙큼한 아이들의 태도에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다시 한번 이엘에게 질문했다.
“우리 같이 축제에 갈까?”
“정말 갈 수 있어요?”
“그럼. 아빠만 믿고 있어. 다 같이 축제에 갈 수 있도록 해볼 테니까.”
-와락!
이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품에 안겨들었다.
“고마워요. 아빠.”
“후후.”
나는 기뻐하는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 이엘의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세진. 나도 데려갈 거지?”
“퓨이!”
“후모. 후모!”
“물론이지. 모두 기대하고 있으라고.”
-와아!
나머지 아이들도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며 비어 있는 내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뿌듯한 마음과 동시에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졌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미소 짓는 내 모습을 임진혁이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
마치.
-방법이 있는 거냐?
라고 묻는 듯했다.
임진혁 역시 아이들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일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나도 아직 확신이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생각해둔 것을 떠올리며.
임진혁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평범한 사람에게 균열은 입구만 열려 있다면 언제든지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지만.
균열 내에 있는 괴물들의 경우는 보통의 경우 절대 입구를 통과할 수 없다.
아직 그 이유를 명확히 밝혀낸 사람은 없어도, 원래 균열에 존재하던 생명체는 입구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게 절대적인 법칙이었다.
단.
균열이 클리어되지 않고 오랫동안 방치되어 미궁으로 변했을 때만 예외적인 상황이 발생한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원래 균열에 존재했던 퓨이, 티아, 모렛, 이엘 뿐만 아니라, 아르엘이나 스승님 역시 평범한 균열 입구를 통해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하지만!
아르키트 왕가의 선조로부터 새로운 능력을 얻게 되면서 이 법칙을 깰 만한 가능성이 생겨났다.
바로 ‘균열 노숙자’에서 ‘균열 관리자’로 새롭게 각성하면서 생긴 능력.
[균열 창조]와 [균열 관리]였다.
[균열 관리]는 아직 등급이 낮다며 능력이 밝혀진 바가 없고, 현재는 [균열 창조] 능력만 사용할 수 있었는데.
능력은 굉장히 간단했다.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곳에 새로운 균열을 창조해 낼 수 있었다.
이전에는 불규칙하게 생성된 균열들의 소유권을 얻어 내가 사용하는 방식이었다면, 이 능력은 말 그대로 내가 원하는 곳에 원하는 용도의 균열을 만들어 내는 능력.
그와 동시에 만들어진 균열 내에서는 내가 원하는 법칙을 적용할 수 있었다.
물론 신처럼 균열 내에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새로운 능력의 이름처럼 말 그대로 관리자 정도의 권한은 가지고 있는 정도.
나는 이 능력을 사용해서 아이들과 함께 바깥세상으로 나올 수 있는 새로운 문을 만들 생각이었다.
아직 능력의 제한이 있어 아주 작은 크기의 균열 1개만을 창조할 수 있어서 신중하게 일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먼저 시작한 일은…….
* * *
“여긴 위치가 좀 별로인 것 같은데.”
“이곳은 너무 교통편이 불편해 보이네요.”
“아. 여기는 너무 외곽지역이다.”
나를 따라 나온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꼼꼼하게 주변 환경을 따져보았다.
“더 좋은 매물 없어요? 괜히 이상한 곳 먼저 보여주지 말고, 빨리 숨겨놓은 것부터 보여줘 봐요.”
특히 아주머니는 중개업자가 쩔쩔맬 정도로 세세하게 확인하며 압박감을 심어주고 있었다.
물론 덕분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집을 둘러보고 있었다.
“근데 세진아. 갑자기 집은 뭐하러 구하는 거냐? 통나무집에 문제라도 생겼어?”
“아뇨. 그건 아닌데. 조금 사정이 있어서요.”
아저씨의 물음에 나는 일단 대충 둘러댔다.
새로운 문 역할을 할 균열을 창조하기 위해서 따로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을 위해 집을 구매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아저씨 가족에게는 나중에 다 밝히더라도, 지금은 복잡한 설명을 접어두기로 했다.
중개업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아주머니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세진아. 무조건 주택을 생각하고 있는 거지?”
“네. 되도록 좀 한적한 곳이었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새롭게 문을 열고, 아이들이 드나들다 보면 주변의 이웃이 많은 곳은 불편할 것 같았다.
돈이 엄청 많아서 부자들이 사는 곳처럼 높은 담장이 있는 곳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세대가 모여 사는 아파트나 빌라 같은 곳은 피하고 싶었다.
문득 강유환 회장에게 부탁했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으리으리한 집을 내놨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당연히 부담스럽기 때문에 그런 생각은 접어뒀다.
무엇보다 내 돈으로 내 집을 마련하는 게 또 한국 사람의 꿈 아니겠는가?
아저씨, 아주머니와 함께 이곳저곳 둘러보다가 마음에 드는 2층 주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금 도시에서 떨어진 외곽지역이었지만.
한적하고 조용한 분위기에 주변 이웃도 많지 않아 보이고. 주변 시설도 썩 나쁘지 않아 보였다.
무엇보다 정씨 가족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조금 가산점을 받았다.
아주머니와 아저씨 역시 그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 내심 흡족해하는 것 같았다.
“여기로 하죠.”
내가 드디어 결정을 내리자, 온종일 아주머니에게 시달렸던 중개업자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매매계약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아저씨는 조금 서두르는 게 아니냐는 걱정을 하셨지만.
지금도 집에서 축제에 갈 날만을 기다리며, 기대감에 부풀어 오른 아이들을 생각하면 조금도 지체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도움으로 계약은 꼼꼼하게 빠진 부분 없이 잘 진행되었다.
은행에서 대출을 조금 받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금액이 대출이 가능해서 깜짝 놀랐다.
아저씨의 말에 따르면.
젊은 각성자이면서 꾸준히 활동을 유지하면, 거의 사업자급으로 대출을 땡길 수 있다고 한다.
거의 수도권 외곽 쪽 집은 대출로도 충분히 구매할 만큼의 한도였지만.
무리해서 대출을 받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적절히 대출을 받아 구매 계약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정식으로 계약이 완료되고.
이제는 완벽하게 내 집이 된 주택으로 들어갔다.
집 안의 모든 가구가 빠져나가 쓸쓸한 분위기의 집 안 내부.
분위기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곧바로 집을 구경하면서 미리 봐두었던 방으로 향했다.
흔히 아버지 서재 방으로 쓰일 것 같은 크기와 위치의 1층 방이었다.
“후우우.”
나는 아무것도 없는 방안에서 벽면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능력을 사용하기 위해 집중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방안에 신비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하고.
내가 더 깊이 집중할수록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무거운 기운들이 나를 중심으로 가득해져 갔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온몸이 조금씩 떨려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쉽게 감을 잡기 힘들 정도로 오랫동안 집중을 유지한 끝에.
나는 메말라 텁텁한 목소리로 외쳤다.
-균열 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