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8화
53. 그냥 하나 만들까?(5)
-퐁당.
-…….
“…….”
“…….”
강유환 회장과 나는 호숫가에 나란히 앉아 낚시하는 중이었다.
이 회장님도 대훈 아저씨 못지않은 낚시광인지 또 이렇게 호숫가에 찾아왔다.
“회장님.”
“왜 부르느냐?”
“대기업 회장님인데 이렇게 평일 오전부터 여유롭게 낚시하고 있으셔도 상관없어요? 보통은 일정이 굉장히 빡빡하다던데.”
“아직 회사 사람들은 내가 병상에 누워 있는 거로 되어 있어서 상관없다.”
“그래도 미래 그룹의 수장인데 빨리 일선으로 나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 하나 없다고 휘청거릴 회사였으면 애초에 이 자리까지 오지도 못했다. 거기다 병이 심각해지기 직전까지도 중요한 회사 일은 다 처리했으니 지금은 좀 여유롭게 지내야지.”
강유환 회장은 흐뭇한 미소와 함께 호수의 전경을 스윽 둘러보았다.
그는 저번이랑 비슷하게 비서실장을 통해 대뜸 연락을 보내 이곳을 찾아왔다.
단출하게 낚시 장비만 챙겨왔던 저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다른 짐들이 꽤 많았다.
-지난번에는 급하게 오느라 선물을 못 챙겼던 것 같아서 말이지. 아이들 선물도 좀 챙겨왔다.
강유환 회장은 아이들의 취향은 또 어떻게 알았는지 맞춤형으로 좋아할 만한 선물들을 잔뜩 가지고 왔다.
티아가 좋아하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부터, 모렛이 좋아하는 맥주, 이엘을 위한 귀여운 인형들, 마지막으로 퓨이를 위한 간식까지.
조금은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좋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또 거절할 수만은 없었다.
신난 아이들은 임진혁에게 맡겨두고,
지금 이렇게 단둘이 낚시를 나와 있게 된 것이다.
조용히 호수를 바라보던 강유환 회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재미있는 소식이 있던데.”
“……?”
“오성 길드에서 꽤 화려하게 일을 벌였다고 들었다.”
“…….”
당시의 일을 떠올린 나는 인상을 팍 찡그렸고, 껄끄러운 주제를 꺼낸 그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
“제 뒷조사하고 다니시는 거예요?”
“뭐. 아예 안 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소식은 워낙 많이 알려진 이야기라 자연스럽게 알게 된 거다. 너보다는 서율희 조장이던가? 그 사람 때문에 더 이야기가 퍼진 것도 있고.”
“저는 억울해요.”
솔직히 회의 분위기가 좀 불편하기는 했어도, 나는 꽤 성실하게 오성 길드의 요구에 따라줬다.
질문도 다 대답해 주고, 무리한 부탁에도 꾹 참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물론 그렇다고 회의를 뛰쳐나온 서율희가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서율희 조장이라는 사람이 그쪽 업계에서는 꽤 유명하더구나. 길드와 불화가 생겼다는 소식에 벌써 관심을 보이는 곳이 많을 정도로.”
“그렇긴 하겠죠. 워낙 뛰어난 인재라서.”
“너도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거다.”
“네?”
“돌아다니는 정보에 의하면 그 서율희 조장이라는 사람과 네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정보도 있으니까.”
“네에?!”
말도 안 되는 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강유환 회장은 오히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놀라느냐?”
“당연히 이상한 소문을 들었으니 놀라죠.”
“진짜는 아닐지 몰라도. 꽤 신빙성은 있어 보이던데. 꽤 어려운 개인적인 부탁을 길드의 반대를 무릅쓰고 들어줬고, 회의장을 뛰쳐나온 이유도 길드장이 너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기 때문이라던데?”
“맞긴 맞는데…….”
그가 늘어놓는 사실들에 나는 말끝을 흐리며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서율희가 나에게 꽤 많은 호의를 베푼 것은 사실이니까.
강유환 회장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우리 부소장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지아 씨요?”
“왜? 부소장도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말할 거냐?”
“…….”
“에잉. 한창 팔팔할 남자가 이렇게 자기 처신을 못 해서야.”
그의 쏟아내는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챙겨야 하는 식구도 많고, 할 일도 많은 건 알지만. 그렇다고 다른 중요한 일을 미루는 건 핑계에 불과하다. 좀 더 확실히 하도록 해라.”
“예. 조언 감사합니다.”
연륜이 느껴지는 회장의 충고에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고, 그는 조금은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낚싯대를 응시했다.
“그래서. 정말 길드라도 만들 생각이냐?”
“……그건 또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집에 도청 장치라도 설치하신 건 아니죠?”
“쯧쯧. 영화를 너무 많이 봤구나. 그런 짓 하지 않아도 들려오는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알만한 사실이다.”
도대체 어떤 소식을 들으면 얼마 전 술자리에서 한 이야기가 이 회장님 귀까지 흘러가는지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직 하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에요.”
“혹시 돈 문제로 걱정하는 거라면, 나한테 아주 많이 혼날 각오를 해야 할 거다.”
“그. 그건 아니고요.”
엄한 목소리로 말하는 강유환 회장의 모습에 나는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지만.
솔직히 속으로 조금 뜨끔했다.
길드를 유지하고 꾸려나가는 데도 돈이 많이 들지만.
단순히 길드를 만드는 일 자체에도 꽤 많은 돈이 필요하다.
문제가 생길 때를 대비해서 미리 정부 기관에 내야 하는 금액도 있고, 여러 가지 절차에 이래저래 돈이 들어간다.
지금 내가 모아둔 돈으로도 충분히 커버 가능한 액수라 상관은 없지만, 돈 문제 역시 아예 고민거리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돈 문제보다는. 기본적으로 제가 길드를 운영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더라고요.”
“하하하.”
“……?”
자신 없어 하는 내 모습을 본 강유환 회장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주변 사람들은 벌써 너를 인정하고 길드를 만들려 노력하는데. 정작 너는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구나.”
“…….”
“혹시 알고 있느냐? 그 뛰어난 서율희 조장만큼 너도 많은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있다는 사실을?”
“제가요?”
“그래. 네 녀석이 이 균열이라는 곳에 틀어박혀 살지만 않았더라도, 이미 수많은 사람이 너에게 접근했을 거다.”
그는 내 눈을 강하게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최근에 거대 골렘을 공략해서 엄청난 양의 최상급 마정석을 가져왔지, 또한 균열에서 사용된 아티팩트의 효과는 이미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건 전부 저 혼자 한 일이 아니라…….”
“네 말대로 너 혼자 한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그 사람들을 움직인 사람들은 누구였지?”
“…….”
“한 단체의 수장이 꼭 누구보다 뛰어날 필요는 없다. 나만 해도 지금 비서실장이 나보다 더 똑똑하고, 열정이 있는 사람이야.”
나는 어렴풋이 회장이 나에게 전하려는 의도를 알 것 같았다.
“혹시 이전에 사업에 실패했던 일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냐?”
“…….”
나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그의 질문에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실패를 두려워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한심한 일이 없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하지 말아라.”
다시 한번 회장의 뼈 있는 말에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벌써 오늘만 해도 두 번이나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
잠시 이야기가 끊어졌을 때, 마침 적절하게 내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확인해 보니 대훈 아저씨에게서 온 전화였다.
강유환 회장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연결했다.
“아저씨 무슨 일이세요?”
-어어. 세진아. 뭐하냐?
“낚시하고 있었어요.”
-혼자?
“혼자는 아니고…….”
옆에 있던 강유환 회장에게도 통화 내용이 들렸는지, 그는 대훈 아저씨가 들릴 정도로 크게 목소리를 높여 인사를 건넸다.
“아우. 잘 지냈는가?”
-아니? 강 형님? 형님, 언제 오셨습니까?
“오전에 시간이 나서 잠시 들렸네.
-형님. 섭섭합니다. 저만 쏙 빼놓고 둘이서 낚시를 가다니.
휴대폰을 통해 느껴지는 아저씨의 섭섭한 말투에 강유환 회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를 달래줬다.
“허허허. 미안허이. 다음에는 꼭 부를 테니 너무 화내지 말아.”
대훈 아저씨는 강유환 회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음에 꼭 같이 낚시를 가자는 말을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뭐지? 용건이 있어서 전화한 거 아닌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휴대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
“언제까지 속이실 생각이세요?”
내 물음에 강유환 회장은 다시 한번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며 시치미를 뗐다.
“뭘 말이냐?”
“이렇게 계속 형님, 아우 하실 생각이세요?”
“그럼 당연히 내가 나이가 많으니 형님이지. 뭐? 문제 있느냐?”
태연한 그의 반응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대훈 아저씨는 아직 눈앞의 낚시를 좋아하는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미래 그룹의 회장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는데 임진혁은 그의 정체를 바로 눈치챈 듯, 꽤 정중히 행동했는데.
대훈 아저씨는 아예 그런 생각도 못 하는 상황이었다.
‘이걸 말해줘야 하나…….’
내가 대훈 아저씨에 대해 고민을 하는 사이, 강유환 회장의 낚싯줄에 반응이 왔고.
그의 입가에는 진한 미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 * *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조장님.”
서율희는 평소와 같이 조원들과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일을 마무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언뜻 평범해 보이는 광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뭇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도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내색하지 않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려 노력했다.
일이 모두 끝나고 돌아가는 길.
평소에는 윤동현이 운전을 하고, 옆자리에 서율희가 자리했는데.
오늘은 서율희와 김유미가 뒷좌석에 함께 앉게 되었다.
세 사람 모두 이 상황이 달갑지만은 않은지 어색한 표정들이었다.
“미안해요. 유미 씨. 저 때문에.”
“아뇨. 조장님 잘못이 아닌걸요. 애초에 제가 조심했으면 이런 일도 안 생겼을 텐데.”
지금 이 차량에 타고 있는 세 사람은 조원들 사이에서. 아니 정확히는 오성 길드 내부에서 붕 떠 있는 상태였다.
회의실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따로 서율희에게 징계가 내려지거나, 특별한 조처가 내려온 것은 아니지만.
이미 회의실에서 있었던 일들이 길드에 파다하게 퍼져나갔고. 그와 관련된 세 사람 모두 길드에서 눈초리를 받는 중이었다.
특히 일반 조원의 신분인 김유미는 더욱 심했다.
평소에 거리낌 없이 어울리던 조원들이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고, 약간 따돌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세 사람 모두 태연하게 맡은 일들을 정상적으로 수행해내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괴소문들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저……. 조장님?”
“네?”
“혹시 길드에서 나가실 생각 있으세요?”
“…….”
“저번에 술자리에서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만약에 세진 씨가 정말로 길드를 만든다면. 어쩌실 생각이세요?”
“…….”
“…….”
김유미가 어렵게 질문을 꺼냈지만 서율희는 침묵을 유지한 채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앞에서 운전하고 있던 윤동현도 백미러로 힐끔거리며 뒤쪽을 주시했다.
침묵을 유지하던 서율희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에 마음이 심란했다.
오성 길드. 그리고 전세진과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
굉장히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그녀의 마음은 알게 모르게 한쪽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