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7화
53. 그냥 하나 만들까(4)
서율희, 윤동현, 김유미.
나는 세 사람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과 정씨 가족, 임진혁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미 골렘 균열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지라 세 사람도 어색하지 않게 인사를 나눴다.
얼떨결에 집까지 따라온 세 사람이었지만 표정은 그렇게 좋지 못했다.
나는 외부인이라 전혀 상관이 없어도 서율희나 윤동현은 직위도 그리 높지 않은데 회의를 뒤집어놓은 것이나 다름없었고.
김유미 역시 일련의 사건에 책임이 있다 보니 절대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불편해 보이는 세 사람에게 나는 일단 특단의 조취를 취했다.
-말랑. 말랑.
“…….”
“퓨우우우.”
가장 상태가 심각해 보였던 서율희의 무릎 위에는 퓨이를, 김유미는 티아, 윤동현은 모렛을 올려다 놓았다.
서율희는 멍한 표정으로 기분 좋게 퓨이를 만지작거리면서 힐링을 하는 시간을 가졌고. 김유미도 귀여운 티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수다를 떨었다.
“후모?”
“으음. 오늘은 맥주 안 가져왔는데.”
“후모…….”
“다음에는 꼭 가져올게.”
“후모! 후모!”
모렛은 윤동현이 저번과는 다르게 수제 맥주를 가져오지 않아 실망했지만, 다음에 꼭 가져오겠다는 약속을 받고 신난 표정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자! 여러분, 식사 준비 끝났으니. 식사하세요.”
“죄송하네요. 갑자기 찾아와서 식사도 대접받고.”
“어머. 별말씀을. 우리 가족도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이 정도는 당연히 대접해 드려야죠.”
“감사해요. 음식이 정말 맛있겠네요.”
“음식은 충분하게 있으니까. 마음껏 드세요.”
서율희는 식사를 준비해 준 아주머니에게 미안한 표정을 하면서도, 군침이 도는 향기와 먹음직스러운 음식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다.
김유미와 윤동현 역시 군침을 삼키며 식탁 위에 차려진 화려한 음식들을 둘러보기 바빴다.
“우리 이엘도 많이 먹고.”
“네. 고마워요.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이엘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한 명씩 챙기며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원이 많아서 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할 수는 없었지만,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아주머니가 준비한 음식들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음식점 못지않은 깔끔한 밑반찬들과 윤기 나게 지어진 쌀밥.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된장찌개와 고기반찬 그리고 손수 만든 잡채까지.
거의 잔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상차림이었다.
아주머니는 바람의 정령이 아니라 요리의 정령을 다루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고, 혼자서 준비했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푸짐한 상차림이었다.
처음 아주머니의 음식을 접한 세 사람.
모두 처음에는 부담스러운 듯 눈치를 보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굳어 있던 표정이 점점 풀리면서 아주 편안한 얼굴로 식사를 즐기기 시작했고.
밥그릇이 다 비워졌을 때쯤에는 얼굴에 걱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 뒤.
이어지는 엘프 차와 달콤한 과일들로 후식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손님인 세 사람과 고생한 아주머니는 잠시 쉬게 하고 설거지와 뒷정리를 끝냈다.
이제 주위가 완벽하게 어둑어둑해졌을 때쯤.
저번처럼 윤동현이 준비한 수제 맥주는 없었지만, 상시 준비되어 있는 맥주들을 꺼내 거실에서 조촐한 술자리가 열렸다.
아주머니는 간단한 안주만 준비해 주시고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하는 선우와 아이들을 데리고 윗방으로 향했다.
오성 길드의 세 사람, 아저씨와 아윤.
그리고 나와 임진혁이 참석한 술자리.
오늘은 저번에 거대 골렘을 해치우고 난 다음에 열렸던 술자리와 조금 다른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 * *
“으으. 정말 너무하지 않나요? 우리 조장님이 얼마나 길드를 위해 열심히 일하셨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아아. 너무하고말고. 오성 길드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하구먼.”
반쯤 혀가 풀린 김유미의 한탄에 아저씨가 찰지게 맞장구를 쳤다.
평소 같았으면 길드 내부의 이야기를 함부로 발설하면 안 된다며, 서율희나 윤동현이 그녀의 행동을 막았겠지만.
오늘은 둘 다 묵묵히 맥주를 마시며 그녀의 행동을 방관했다.
“그럼 율희 언니. 오늘 그 선배 조장인가 뭔가 하는 사람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냥 나온 거예요?”
“…….”
아윤의 물음에 서율희는 그때의 상황이 생각나는지 살짝 얼굴을 붉히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아윤은 동경의 감정이 담긴 눈길을 보냈고, 아저씨는 혀를 차며 불평했다.
“쯧쯧. 서율희 조장만큼 일 잘하고, 책임감 넘치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있는 사람이 더 하다고, 없어져 봐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안 그래?”
아저씨가 동의를 구하듯 윤동현에게 묻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있던 김유미도 덩달아 흥분해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임진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세 분 다 이제 어쩌실 생각인 겁니까?”
“…….”
“…….”
“…….”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조금은 현실적인 그의 질문에 세 사람 모두 표정을 흐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실 오늘 저지른 일들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행동들이라 앞으로의 계획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애초에 여기서 기분이 좋아졌다고 해서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된 상황은 아니니까.
김유미는 술기운 때문에 기분이 오락가락하는지, 이번에는 울상을 지으며 서율희 쪽을 바라보았다.
“조장님. 우리 다 잘리는 거예요?”
“걱정 말아요. 유미 씨. 오늘 있었던 일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니까. 제가 다 책임질 거에요. 동현이나 유미 씨는 아무런 잘못도 없잖아요.”
“하지만…….”
“…….”
서율희는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부드럽게 대답해 줬지만.
김유미의 눈동자에는 더욱 습기가 차올랐고 윤동현 역시 답답한 듯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아니. 서율희 조장이 뭘 잘못했다고 책임을 져! 딱 봐도 꼬장꼬장한 윗사람들이 잘못한 거구먼.”
“아빠 말이 맞아요. 언니. 그냥 길드 때려치우고 다른 데로 가면 안 돼요? 언니 정도 능력이면 얼마든지 다른 곳을 옮길 수 있잖아요.”
사실 아윤의 말은 꽤 현실성이 높은 이야기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능력도 뛰어나고, 균열에서 지휘한 경험도 많고, 거기다 실적도 빵빵하니.
거의 모든 길드에서 탐을 낼 만한 인재였다.
하지만 서율희는 난처한 표정만 지을 뿐.
아윤의 말에 어떠한 맞장구도 치지 않았다.
나는 서율희의 태도에 살짝 이상함을 느꼈다.
오늘 그녀의 행동을 보면 당장에라도 길드를 때려치워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는데, 아직 길드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실례가 되는 질문일 것 같았지만 술기운을 빌려 질문을 던졌다.
“혹시 오성 길드에서 계속 있어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
서율희는 내 질문에 몸을 흠칫 떨었고, 윤동현도 뭔가를 알고 있는지 눈동자를 어색하게 움직였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맥주를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더니, 결심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오성 길드가 어째서 오성 길드라는 이름이 됐는 줄 아세요?”
“……?”
“오성 길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5명의 파티를 기리기 위해 오성 길드라고 지었다고 해요. 지금 길드장과 부길드장 형제도 그 파티원이었고요.”
갑자기 시작된 오성 길드의 역사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다음으로 이어진 이야기를 듣고는 금방 이야기의 흐름을 알 수 있었다.
“나머지 3명 중에서 2명은 길드에서 간부로 일하다 지금은 다른 사업을 시작했고, 나머지 1명은 길드가 어려웠던 초창기에 전투를 치르다가 목숨을 잃었어요. 그게 제 아버지예요.”
“…….”
“어머니는 몸이 좋지 않아 제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고, 혼자 남은 저를 도훈 아저씨가 길러주셨어요.”
“설마 그 부길드장님?”
“네. 맞아요. 저한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시죠.”
생각지도 못하게 흘러나온 무거운 이야기에 다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서율희는 단단히 결심했는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도훈 아저씨 밑에서 자라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은혜를 갚아야겠다고 생각했고. 각성하자마자 곧바로 오성 길드에 가입했어요. 조금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게 조장 자리에 올랐고 지금까지 이르게 된 거죠.”
아저씨는 괜히 입맛이 쓴지 입을 쩝쩝거렸고, 아윤과 김유미는 어느새 이야기에 몰입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도훈 아저씨만큼은 아니더라도, 도균 아저씨도 정말 친삼촌처럼 생각했는데. 이번 일로 배신자 취급하는 것 같아서 조금 서럽긴 했어요.”
이야기를 마친 그녀는 다 털어놓으니, 오히려 속이 후련한지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아무리 길드장이라고 해도 그렇지…….’
나는 냉정하게 서율희를 노려보며 소리치던 길드장 김도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서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던 김도훈의 모습도.
아무리 길드장의 길드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하는 자리라고는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래도 관리 센터나, 협회처럼 어느 정도 관계를 이어나가던 길드였는데.
앞으로 계속 함께할 생각이 싹 사라지는 모습이었다.
만약 서율희가 오성 길드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와 오성 길드는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 것 같았다.
저번에 거대 골렘을 공략했을 때처럼, 언제 또 전투가 필요해질지 모르는데 살짝 아쉬워지는 마음이 들었다.
‘다른 길드와 관계를 시작해야 하나? 그건 또 그것대로 번거로울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대뜸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내뱉었다.
“그냥 내가 하나 만들까?”
“…….”
“…….”
“…….”
순간 주변은 아까와 다른 의미로 침묵이 흘렀다.
이전에는 말을 꺼내기 거북스러워 침묵이 흘렀다면, 이번에는 모든 사람이 나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나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에 나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조금은 횡설수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게…… 이제는 오성 길드랑 같이 일하기 힘들 것 같으니까. 그리고 거대 골렘을 공략할 때처럼 언제 또 사람이 필요해질지도 모르는데 그냥 하나 만드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오빠가 길드를 만들겠다고?”
“아니. 꼭 만들겠다는 말은 아니고.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고 말만 꺼내 본 거지.”
솔직히 조금은 진심이 섞여 있었지만, 반쯤은 술기운에 가벼운 마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대충 웃으며 지나갈 줄 알았는데, 저마다 뭔가를 고민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괜히 불안해진 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저기…… 여러분?”
“나는 찬성.”
“형……?”
“세진이가 그렇게 마음먹는다면. 나는 참여할 생각이야.”
대뜸 임진혁이 찬성 의사를 표했고, 사람들의 표정이 살짝 요동쳤다.
나는 이상하게 흘러가는 기류를 느끼고 당황하기 시작했다.
“길드 만드는 일이 그렇게 뚝딱 되는 것도 아니고.”
“오빠. 아까 언니 말 못 들었어요? 오성 길드도 5명으로 시작했다잖아요.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만 7명인데.”
아윤은 은근슬쩍 오성 길드의 인원까지 포함해 7명을 강조했는데. 또 웃기게도 세 사람 모두 반박하거나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경험도 없고, 모르는 것도 많은데. 길드를 만드는 건 웃긴 일이지. 오히려 율희 씨가 만드는 게…….”
“아뇨. 그렇지 않아요. 길드의 주인은 단순히 전투에 관련된 능력만 있어서는 불가능해요. 운영을 위한 자금이나 길드원에게 지급할 장비, 인맥도 어느 정도 받쳐줘야 해요.”
서율희의 진지한 대답에 잠시 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오빠는 충분하겠네.”
“내가 뭘 충분해. 내가 돈이 어딨다고?”
“오빠 미래 그룹이랑 친하잖아요.”
“장비는…….”
“지아 언니 아티팩트.”
“인맥…….”
“저번에 관리 센터, 각성자 협회에 아는 사람 있다고 이야기한 거 아직 기억하는데요. 이제 시작하는 단계면 그 정도면 충분할걸요?”
“…….”
이야기를 꺼내는 족족 내 입을 틀어막아 버리는 아윤의 철벽 수비.
그리고.
사람들은 이미 나의 의견은 상관이 없는지 서로 길드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뭔가 점점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의 생각이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