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6화
53. 그냥 하나 만들까(3)
처음 오성 길드의 건물에 도착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길드의 규모에 따라 건물도 대단히 컸고, 지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지 외관도 무척 깔끔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도 이렇게 직접 방문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조금은 신기한 기분도 들었다.
내가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1층에서 손님 출입증을 발급받으려 하는데.
서율희가 직접 나서서니 직원이 상당히 정중하고 신속하게 일을 처리해 줬다.
평소에 자주 얼굴을 봐서 까먹게 되지만, 서율희의 지위와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이런 큰 건물을 유지할 정도로 많은 각성자들을 거느린 길드에서.
길드장과 부길드장 바로 아래 위치인 조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으니. 나와 상대적으로 얼마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에 엄청난 성과라고 할만했다.
출입증을 발급받고 향한 곳은 서율희의 개인 업무를 보는 방이었다.
아직 회의에 참석할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어서 잠시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기다리는 동안 윤동현과 김유미가 따뜻한 차와 과자를 대접받으며, 서율희에게 회의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대충 설명을 들었다.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거대 골렘을 잡는 과정에서 내가 했던 일을 설명해 주고, 몇 가지 질문만 받으면 끝.
서율희는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나, 말할 수 없는 부분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좋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물론 말해달라고 부탁해도 말해줄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흘러 회의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김유미는 회의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의실 앞까지 따라왔다.
나는 온통 모르는 사람밖에 없는 길드 건물 안에서 처음으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 한창호 조장님?”
살짝 반가운 마음에 멀리 있던 그를 불렀는데.
한창호 조장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서율희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가까이 다가온 그에게 인사를 건넸고, 윤동현과 김유미도 한걸음 뒤에서 같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한창호 조장님.”
“네. 안녕하세요.”
일단 그는 서율희의 인사를 받아 준 뒤, 애매한 눈초리로 나를 힐끔거리며 질문했다.
“설마. 이 친구를 서율희 조장님께서 데려오신 겁니까?”
“네. 장본인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는 게 확실할 테니까요.”
“흐음…….”
단호함이 느껴지는 서율희의 태도에 한창호는 복잡한 표정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게 해결되기를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그럼…….”
그는 서율희에게 덕담을 건네고, 나와 나머지 사람에게도 격려의 눈빛을 보낸 뒤 먼저 회의실로 입장했다.
“우리도 들어가죠.”
“수고하세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김유미의 격려를 받으며 우리도 회의실로 들어섰다.
커다란 회의실에는 대부분의 자리가 아직 빈 자리였다.
서율희는 성큼성큼 회의실을 가로질러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았다. 나와 윤동현도 그녀의 뒤편에 자리를 잡았다.
반대편에 혼자 자리에 앉아 있는 한창호 조장의 모습이 보였는데.
두 조장 모두 상석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에 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각자의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 듯했다.
회의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을 즈음에 빈자리에 주인들이 한 명씩 회의실로 입장하기 시작했다.
조장의 직위로 보이는 대부분 사람이 서율희보다 연배가 훨씬 높았고, 심지어 한창호 조장도 굉장히 젊은 축에 속했다.
윤동현과 같은 부조장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도 서율희보다 어린 사람을 찾기 힘들었다.
다시 한번 서율희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아무래도 외부인이다 보니 회의실에 입장한 사람들로부터 많은 눈길을 받았다.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채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시간이 흘러 빈자리가 거의 다 채워지고.
회의 시작시각을 조금 넘어서 마지막 상석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명의 중년 남성과 그 뒤를 따르는 무리가 회의실로 입장했다.
한 명은 이미 얼굴을 본 적 있는 김도훈 부길드장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오성 길드의 길드장인 듯했다.
잡담을 나누며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의 입장을 맞이했다.
두 명의 남자가 가장 상석인 자리에 앉자, 나머지 모든 사람이 뒤따라 다시 자리에 앉았다.
뒤에 시립해 있던 안경 쓴 남자가 회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조금 지루한 내용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고, 나는 대충 흘려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회의를 진행하던 안경 쓴 남자는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을 힐끔거리더니, 길드장에게 다가가 뭔가를 귀엣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길드장님. 잠시…….”
“흐음.”
뭔가를 전해 들은 길드장은 나와 서율희 쪽으로 시선을 두더니 이윽고 안경 쓴 남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본격적인 회의에 앞서서. 저번에 문제가 제기됐던 안건에 대해서 서율희 조장이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웅성웅성.
안경 쓴 남자의 이야기에 회의실에 작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이미 알만한 분은 아실 텐데. 아티팩트 제작에 관련해 계시고, 최근에 거대 골렘을 공략하신 전세진 님이십니다.”
-웅성웅성.
내 이름이 소개되자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확 쏠리면서 조금 더 큰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전세진 님.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자의 부탁에 나는 살짝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어색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으음.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옆에 있는 서율희 조장의 요청을 받아 여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내 소개에 사람들의 눈빛이 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흥미로움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고, 누군가는 이유 모를 적대심이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조금 잦아질 때쯤 서율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길드 내에서 저와 몇몇 길드원이 참여한 거대 골렘 공략에 대해 말이 많은 것 같아, 이번 회의 자리에 어렵게 세진 씨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서율희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길드장을 향해 눈빛을 보냈고, 길드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본 안경을 쓴 남자가 다시 나를 향해 말을 건넸다.
“세진 님. 가능하시면 거대 골렘을 공략했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뭐…….”
나는 남자의 요청대로 기억나는 그때의 상황을 천천히 풀어놨다.
딱히 숨길 내용도 없어서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최상급 마정석을 얻게 되었고. 함께 참여해 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나눠드렸습니다.”
조금은 길었던 내 설명이 끝나고.
누군가 내 쪽을 바라보며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안경 쓴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 급하게 나를 향해 물었다.
“세진 님. 가능하면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상관없습니다.”
내 허락이 떨어지자 손을 들었던 사람이 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설명은 잘 들었습니다. 궁금한 점이 있는데 그 마법도 물리적인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는 거대한 구슬을, 세진 씨의 능력으로 제압한 겁니까?”
“네.”
“원리는 설명해 주실 수 없는 겁니까?”
“그건 제 능력과 연관된 일이라 힘들 것 같습니다.”
“흐음. 알겠습니다.”
그 뒤로 몇 명이 더 손을 들고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쓸데없는 질문이더라도 나는 말해줄 수 있는 범위에서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했다.
질문과 대답이 이어지는 와중에 누군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전부 쓸데없는 이야기뿐이구먼.”
“네?”
“저번에 서율희 조장이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말이야.”
“…….”
대뜸 반말을 찍찍 내뱉는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까놓고 말해서. 저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다면, 왜 적극적으로 거대 골렘을 공략하지 않는 거지?”
“이준호 조장님. 도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반말을 찍찍 내뱉으며 의혹을 제시하는 이준호 조장의 모습에 서율희가 가시 돋친 말투로 대응했다.
“아니. 거대 골렘을 잡고 최상급 마정석을 얻었다면서? 그럼 왜 또 잡으러 안 가냐 이 말이야. 저 사람 말 대로라면 가서 또 공략하면 최상급 마정석이 쏟아질 텐데.”
이 말을 들은 몇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나로서는 당연히 어이없는 주장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거대 골렘을 공략하고 난 뒤 굉장히 바빴고, 중요한 일들이 많았다.
스승님께 치료제를 받아 아주머니와 강유환 회장님을 치료한 일부터, 아르엘을 떠나보내고 이엘을 위로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초에 나는 그렇게 위험한 거대 골렘과 다시 싸울 이유가 없었다. 이미 최상급 마정석 광산이 생겼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이런 사정들을 이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그건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피식.
“개인적인 사정? 개인적인 사정이 아니라 숨기고 싶은 게 있으니 그렇겠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길드는 나 몰라라 하고, 자기들끼리 붙어먹어서 이득을 취할 속셈이지.”
“이준호 조장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참기 힘든 그의 비아냥거림에 지금껏 조용히 있던 윤동현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어딜 부조장 따위가 조장에게 목소리를 높여! 이거 완전 길드가 거꾸로 돌아가는구먼.”
서율희도 입술을 꽉 깨물며 뭔가를 소리치려는 순간.
“그만! 손님도 계시는데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
“…….”
부길드장인 김도훈의 일갈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준호를 비롯한 몇몇 조장들은 서율희와 윤동현은 물론 나까지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하아. 이런 식이구나.’
나는 서율희와 윤동현이 이 길드에서 어떤 위치인지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조장들 밑에서 젊다는 이유로 불합리한 상황을 받아들여야 하는 존재였다.
김도훈의 일갈로 회의장에 잠시 침묵이 찾아오고.
조용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길드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세진 씨. 어렵게 자리해 주셨는데 딱히 쓸모 있는 이야기는 못 들은 것 같군요.”
“…….”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만약에 우리 오성 길드가 고대 골렘 공략에 나선다면 세진 씨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길드장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위험천만한 구슬 위에 올라서서 마력 회로를 조작하는 일을 또 경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어쩔 수 없죠. 하지만 서율희 조장이나 관련된 길드원들의 처벌은 불가피할 겁니다.”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그렇게 느끼셨다면 유감입니다. 하지만 길드 내부의 일에 외부인은 관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길드장의 말에 내가 입을 다물고 있을 때, 서율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도균 아저씨. 정말 이러실 거에요?”
“사적인 사리가 아니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어떻게 저를 두고…….”
그녀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길드장을 바라봤지만, 그는 냉정한 얼굴로 어떠한 흔들림도 없었다.
“쯧쯧. 이래서 어린 것들은.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마음껏 날뛰는 모습이 가관이네.”
“……입 다무시죠.”
“뭣. 뭐라고?”
“능력도 모자라서 길드에 민폐만 끼치는 늙은이는 빠지시라고요.”
“아니! 저년이!!”
서율희의 냉기가 철철 흐르는 독설에 이준호는 크게 당황해 소리쳤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갔다.
“율희야!”
“이게 무슨 행동이냐!”
부길드장은 안타깝게 서율희를 바라봤고, 길드장은 격노한 표정으로 서율희에게 소리쳤다.
반대편의 한창호 조장 역시 씁쓸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요. 세진 씨.”
“어? 엇. 네.”
서율희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팔을 붙잡고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자연스럽게 윤동현도 우리의 뒤를 따랐다.
“저, 저, 저것들이.”
“하아…….”
회의실을 빠져나오데. 문틈으로 사람들의 탄식과 한숨 소리가 크게 흘러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유미는 회의 도중에 튀어나온 우리를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일단 뒤를 따랐다.
우리는 무표정한 얼굴의 서율희가 이끄는 대로, 곧장 건물 입구를 빠져나왔다.
건물 옆 나무가 심겨 있는 화단에 털썩 주저앉은 서율희는 처참한 표정을 숨기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윤동현은 씁쓸한 미소를, 김유미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당황한 표정을 했다.
서율희가 정확히 어떤 길드 생활을 이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녀라면 이렇게 쉽게 화를 낼 성격이 아니었다.
‘아마 오랫동안 꾹꾹 참아왔겠지.’
솔직히 나는 오늘 하루 회의에 참석했을 뿐인데,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려니 그렇게 고역일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안쓰럽게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율희 씨?”
“…….”
“퓨이 보러 갈래요?”
“…….”
퓨이 이야기에 고개를 들어 올린 서율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