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4화
53. 그냥 하나 만들까?(1)
이엘이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된 뒤.
나는 되도록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집에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가졌다.
이엘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엄마에 대한 슬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신경을 써주기 위해서였다.
자주 놀러 오던 정씨 가족은 물론, 오연우에게도 잠시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정씨 가족, 특히 아주머니는 아르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크게 마음 아파하셨다.
치료 약을 전해준 것은 나였지만, 그때까지 버틸 수 있도록 도움을 줬던 것은 아르엘이였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이엘이 예전처럼 돌아온다면 꼭 먼저 연락을 달라는 말을 수차례 나에게 전했다.
그리고 방문은 하지 않더라도 임진혁을 통해서 계속 맛있는 반찬들을 보내줘 어려움을 덜게 해줬다.
당분간 너튜브 영상을 찍기 힘든 상황이라는 말에 오연우도 처음에는 반발했어도, 아르엘과 이엘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곧바로 수긍했다.
너튜브 운영은 자신이 알아서 할 테니, 빨리 이엘이 다시 예전처럼 영상에 나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했다.
예전과는 다르게 믿음직스러운 오연우의 모습에 너튜브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래저래 바쁜 일 때문에 만나지 못했던 신지아에게도 연락을 해줬다. 당연히 그녀도 이엘을 걱정하며 다음에 꼭 웃으며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전해왔다.
거대 골렘을 상대한 뒤 그녀와 제대로 만남을 가지지 못해 아쉬운 상황이었지만, 지금 이엘에게는 내가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집에서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내는 사이.
나는 이래저래 바쁜 일 때문에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씩 시도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로는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와 ‘골렘 제작 이론서’.
두 번째로는 최상급 마정석 광산.
마지막으로 ‘균열 관리자’로 각성 능력이 변경되면서 새로 얻은 능력들.
이 세 가지에 관한 연구와 시대였는데.
아이들과 집에서 머무는 동안 첫 번째, 두 이론서에 대한 연구를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했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는 거대 골렘을 잡기 직전에 스킬 습득을 완료한 상태였는데. 아직 그 기술들에 관한 연구는 거의 하지 않은 상태였고.
‘골렘 제작 이론서’는 중급 이론서를 익혔기 때문에 이제 습득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나는 편안한 마음으로 ‘골렘 제작 이론서’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끄응…….”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골렘 제작에 필요한 지식은 마력 회로뿐만 아니라.
골렘의 몸체를 이루는 부품에 대한 공학적 지식부터, 어떤 부품을 효율적으로 사용할지에 대한 경제적인 관념까지.
여러 가지 학문적 지식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공부였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를 익혀냈다는 자신감은 정말 얼마 가지 못했다.
‘급할 것 없어. 천천히 해보자.’
저번처럼 거대 골렘과 싸우러 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할 수 있는 만큼 하자는 생각으로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고.
“아빠. 아빠.”
“응. 왜 그래?”
이엘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데에 위화감이 없어지고, 나 역시 그 호칭에 익숙해졌을 때쯤.
우리는 완전히 예전처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자 얘들아. 간식 먹자!”
아주머니는 예쁘게 깎아낸 과일들과 음료수를 아이들 앞에 내려놓았다.
이미 아주머니가 준비해 준 맛있는 점심을 배불리 먹은 뒤였는데도, 이 귀여운 먹깨비들은 어느새 배가 꺼졌는지 간식에 달라붙어 먹기 시작했다.
아주머니는 아이들의 먹성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한 명 한 명씩 과일을 챙겨줬다.
“아빠. 이거 드세요.”
이엘이 사과 한 조각을 포크로 집어 나에게 가져왔다. 나는 살짝 주변 눈치를 보고 그 사과를 받아들었다.
아빠라는 호칭에는 꽤 익숙해졌어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직 그 호칭이 부끄럽기도 했다.
“으응? 고마워. 이엘.”
“헤헤.”
내가 사과를 받아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이엘은 기분 좋은 미소와 함께 큰 귀를 쫑긋거렸다.
“세진, 여기 내 것도 먹어!”
“퓨이! 퓨이!”
티아와 퓨이는 그 모습을 보고 샘이 났던지 먹던 과일을 가지고 막무가내로 나에게 들이밀었다.
나는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겨우 과일들을 다 입안으로 넣었고, 아이들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한편,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아저씨와 선우는 묘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어도.
스스럼없이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이엘과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내 모습이 꽤 신기한 모양이었다.
조금 그 눈길이 부담스럽기는 해도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르엘이 죽으면서 이엘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를 잃었다.
나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아르엘을 대신해 의지할 곳을 찾는 이엘의 본능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비로 아르엘의 대신일지라도 나는 아빠로서 이엘을 보호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아주머니는 이엘의 등을 쓰다듬어주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어머, 이엘은 아빠가 정말 좋은가 보네?”
“응. 아빠가 제일 좋아요.”
“호호. 세진이는 좋겠네. 이렇게 귀여운 딸이 생겨서.”
‘흠. 흐흠.”
아주머니의 물음에 나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기 위해 무던히 고생해야 했다.
이 모습을 부럽게 쳐다보던 아저씨가 한마디를 던졌다.
“하아. 우리 아윤이도 저랬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말끝을 흐린 아저씨의 시선이 향한 곳은 임진혁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과일을 건네주는 정아윤의 모습이 있었다.
임진혁은 그런 그녀의 행동을 부담스러워서 하면서도 아예 거부하지는 않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아저씨는 한숨을 푹 내쉬었고, 선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그래요. 진혁이 정도면 괜찮은데.”
“진혁이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야. 세진아. 너도 귀여운 딸이 생겼으니 알게 될 거다.”
“……?”
“아무리 괜찮은 남자를 데려와도 아버지 눈에는 아쉬울 수밖에 없는 거야. 이건 딸 있는 아빠라면 당연한 일이니까.”
아저씨의 푸념에 가까운 이야기에 나는 앞쪽에 앉아 있는 이엘에게 시선이 향했다.
다 자란 이엘이 남자친구를 데려오는 상상을 하니.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하면서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아직 아빠라는 자각이 별로 없는 편인데도, 아저씨의 말대로 꽤 불쾌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엘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까.’
나는 이엘과 보낼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내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확인하니 서율희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온 연락에 나는 살짝 의문을 떠올림과 동시에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네. 율희 씨. 오랜만이네요.”
-네. 세진 씨. 잘 지내셨어요?
간단한 안부 인사가 끝나고 서율희는 살짝 급하게 본격적인 용건을 꺼냈다.
-세진 씨. 죄송한데. 오늘 잠깐 시간 내줄 수 있어요?
“오늘이요?”
나는 자연스럽게 이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최근에 이엘을 혼자 두고 밖으로 나간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심했을 때는 화장실까지 따라오려고 했던 이엘이었기에, 상태가 많이 좋아진 지금도 약간 걱정이 되었다.
내가 곧바로 대답하지 않자 서율희는 조금 다급한 기색을 드러내며 다시 한번 부탁했다.
-저번 거대 골렘을 공략했던 일에 관련해서 문제가 좀 생겼는데, 세진 씨와 꼭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아서요.
“도대체 무슨 문제가……?”
-전화로 말씀드리기는 좀 그렇고. 오늘 잠시 만날 수 없을까요?
정중하게 만남을 부탁하는 그녀의 태도에 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거대 골렘을 공략했을 때.
서율희를 비롯한 윤동현과 김유미에게 신세를 졌던 일은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다.
물론 세 사람도 아주 귀한 아티팩트와 최상급 마정석을 챙겨 만족스러워했지만.
개인적으로 진 은혜는 언젠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율희 씨. 조금만 있다가 다시 연락해드려도 될까요? 조금이면 됩니다.”
-알겠어요.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나는 서율희에게 일단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아저씨는 내 통화 내용을 듣고 걱정과 궁금함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저번에 거대 골렘을 공략했던 일로 뭔가 문제가 있나 본데요.”
“으응?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 문제가 생길 일이 있나?”
나도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아저씨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했다.
그래도 서율희의 부탁을 아예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이엘에게 다가갔다.
“이엘.”
“왜요?”
“저번에 봤던 서율희 언니 기억하지?”
“네!”
“그 언니가 잠시 급한 일이 있어서, 아빠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잠시 나갔다 와도 될까?”
“…….”
내가 잠시 나갔다 온다는 말에 생글생글 웃던 이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눈동자에는 불안함이 떠오르고 반사적으로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그 반응에 나는 마음이 아팠지만, 이번에는 굳은 표정으로 이엘의 선택을 기다렸다.
“이엘. 아줌마도 같이 있으니까. 아빠는 빨리 일 다녀오라고 해주자.”
“…….”
“저녁에는 아줌마가 진짜 맛있는 요리 해줄게. 세진이도 저녁까지는 금방 돌아올 거지?”
“네. 저녁까지는 돌아올 거에요.”
부드러운 아주머니의 말이 통했는지 나를 붙잡던 이엘의 손이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아직 표정에는 불안함이 가득했지만 나를 보내줘야 한다고 마음을 먹은 듯했다.
불안함을 이겨낸 이엘의 모습이 뭉클하게 느껴졌다.
“금방 다녀올 테니까. 재미있게 놀고 있어.”
-끄덕. 끄덕.
고개를 끄덕이는 이엘을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나는 곧바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밖으로 나가는 거라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서율희에게 문자를 보내니 계속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바로 답장이 왔다.
나는 외출 준비를 끝내고 그녀가 보내준 약속 장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시간에 맞춰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나는 어렵지 않게 먼저 기다리고 있던 서율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윤동현과 김유미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모두 같이 나와계셨네요.”
“네. 그렇게 됐습니다.”
“안녕하세요…….”
나는 평범하게 인사를 건넸는데 윤동현은 살짝 씁쓸한 반응을 보였고, 김유미는 확 풀죽은 모습으로 인사를 받았다.
평소에 굉장히 활기찬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였는데, 평소 같지 않은 모습에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앉으세요. 세진 씨.”
그리고 굳은 표정의 서율희까지.
어렵지 않게 분위기가 정말 좋지 않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고 난 이후에도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서율희는 눈을 감고 뭔가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고, 김유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윤동현이 가장 평소와 같은 편안한 모습이었다. 물론 얼굴에 염려하는 표정을 완전 숨길 수는 없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눈을 감고 있던 서율희가 눈을 뜨고 나에게 말을 건넸다.
“일단 죄송해요. 세진 씨. 갑자기 불러내서.”
“아뇨. 괜찮습니다. 남 일도 아니고.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려야죠.”
내 대답에 서율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번에 거대 골렘을 공략하고 나온 최상급 마정석, 저희에게 모두 나눠주셨던 것 기억하시죠.”
“네. 당연히 기억하죠. 혹시 돈을 못 받으셨나요?”
“아뇨. 미래 그룹에서 빠르게 처리해 줘서 깔끔하게 입금받았습니다.”
“그럼 뭣 때문에……?”
내 조심스러운 물음에 서율희는 푹 한숨을 내쉬었고, 김유미의 고개도 함께 내려갔다.
“최상급 마정석 때문에 오성 길드에서 약간 문제가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