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3화
52. 돕는다는 것(3)
친인척이 없었던 나에게 누군가의 죽음이란 꽤 먼 이야기였다.
가끔 건너 알던 사람의 장례식 소식이나 듣는 정도였지 아직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아르엘 님은 즐겁게 사진을 찍었던 다음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마치 동화 속에 잠든 아름다운 공주처럼 아름다웠지만.
동화와는 다르게 현실은 너무 잔인했다.
“흑흑. 엄마!”
“이엘. 이리와.”
“싫어요. 엄마한테 갈래요.”
“안 돼! 이엘, 제발…….”
나는 엄마의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이엘을 억지로 끌어안고 달래면서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남아 있던 스승님의 치료 약을 억지로라도 마시게 해야 했나? 결국 이런 결말밖에는 없었던 걸까?’
머릿속은 순식간에 후회와 죄책감으로 가득 찼다.
마지막까지 나의 잘못이 아니라며 미소 짓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마저도 이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내 품속 이엘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몰랐고.
나는 그저 이엘을 끌어안고 이 슬픔의 소나기가 얼른 지나가 주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 * *
나는 차가워진 아르엘의 몸을 깨끗한 천으로 감싸 나무 정령에게 데려갔다. 물론 그 뒤에는 아직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엘이 조용히 뒤따랐다.
기나긴 숲길을 지나 나무 정령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고.
나무 정령은 더는 움직이지 않는 아르엘 님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았다. 어쩌면 나무 정령이 먼 곳으로 떠난 아르엘 님을 마지막으로 배웅했을 존재였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죽음을 알고 있던 나무 정령도 눈앞에 나타난 아르엘 님의 모습을 보며 감정의 동요를 막기 어려워 보였다.
-아르엘 님을 내 앞으로…….
나는 나무 정령의 말 대로 천으로 감싼 아르엘 님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내가 뒤로 물러서자 별안간 푸른 빛이 그녀의 몸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에 이끌리듯 땅속에서 푸른 줄기가 솟아나 그녀의 몸을 천천히 휘감기 시작했다.
아주 조금씩 그녀의 몸을 뒤덮던 줄기는 어느새 그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꺼워졌다.
-스스스스.
포근한 바람이 불어와 주변을 감싸고, 푸른 빛은 숲속 곳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꼬옥.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이엘이 내 손을 붙잡았다.
아마 이엘은 본능적으로 지금이 엄마와의 마지막 이별의 순간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이엘의 몸을 끌어안으며 아르엘 님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아르엘 님을 휘감고 있던 줄기와 푸른빛은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이엘은 마지막 순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침묵을 유지하고 응시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의 푸른빛이 아르엘 님을 휘감고 있던 줄기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그 푸른빛들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이엘을 꽉 끌어안으며 그 장면을 눈을 크게 뜨고 집중해서 바라봤다.
-파아아앗!!
아르엘 님이 누워 있던 자리에 푸른빛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더니, 주변에는 온통 알 수 없는 신비한 기운이 가득해졌다.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르엘 님이 있던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이 숲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이 숲속에 남아 있게 됐음을.
* * *
-쌔액. 쌔액.
아르엘 님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뒤.
이엘은 울다가 지쳐, 쓰러지듯 내 품에 안겨 잠들었다.
얼굴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닦아주며, 나는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우리의 조용히 지켜보던 나무 정령이 대뜸 나에게 말했다.
-고맙다.
“…….”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아 그저 침묵을 유지했다.
그래도 나무 정령은 내가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원래 엘프들은 죽은 뒤에 자신이 나고, 자란 숲의 일부가 되는 것을 원한다. 아르엘 님도 원래 여기가 고향이 아니시지.
“…….”
-하지만 이곳에는 이엘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있던 곳이었어. 아르엘 님은 그분을 외롭게 두고 싶지 않아서 이곳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받아들이기로 하셨지.
“이엘의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내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나무 정령은 깊은 한숨과 함께 내 물음에 대답했다.
-하프 엘프였다네. 그것도 숲에서 나고 자란 평범한 엘프와는 다르게, 인간들 품에서 자란 존재였다네. 엘프 중에서도 고귀한 신분이었던 아르엘 님과는 태생부터 달랐지.
이엘의 아버지 역시 엘프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나무 정령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의외의 이야기에 나는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런 서로의 다른 모습에 끌려 그렇게 서로를 아꼈는지도 모르지. 자신이 자란 고향을 등지고 떠날 정도로 말이야.
“…….”
정확한 이야기는 알 수 없어도, 나무 정령이 들려주는 이야기 중간마다 무겁고 어려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항상 웃을 줄 알고. 아르엘 님을 끔찍이 아꼈지. 아마 이엘이 태어나는 것을 지켜봤다면 굉장히 기뻐했을 테지. 좋은 엘프였어.
“그런가요?”
-그 마음에 안 드는 인간 마법사와 절친한 사이였다는 것만 빼면은 말이지.
툴툴대는 목소리로 스승님을 언급하는 나무 정령의 모습에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때 품속에 잠들어 있던 이엘이 몸을 뒤척였다.
“으으음. 엄마.”
“…….”
잠을 자면서도 아르엘 님을 찾는 이엘.
나는 그 안쓰러운 모습에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이엘은 좀 더 편안해진 모습으로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인간…… 아니 세진.
“네. 말씀하세요.”
-이엘을 잘 돌봐줘.
“물론이죠. 아르엘 님과도 이미 약속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후후후.
나무 정령은 보기 드물게 웃음을 흘리며 자신의 나뭇가지를 뻗어 내 등을 감싸 안았다.
딱딱한 나뭇가지였지만 생각보다 편안하게 나를 휘감는 느낌에 나도 스르륵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엘을 품에 안은 채로 나무 정령의 나뭇가지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꿈속에서 아르엘 님과 그 옆에 처음 보는 남자 엘프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아르엘 님이 숲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떠나고 며칠이 지났다.
그녀가 우리 곁을 떠날 때만 해도 밥을 먹기 힘들 정도로 너무 슬펐는데.
지금은 생각보다 평범하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사람이란 참으로 멍청한 동물이라 그 슬픈 기억마저도 조금씩 잊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 책상 한쪽 편에 올려놓은 액자 속, 아르엘 님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볼 때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아직 이 사진을 추억이라 회상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아르엘 님이 떠나고.
나는 그날 바로 이엘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이미 예전부터 우리 집에 자주 놀았던 이엘이었기에 쉽게 적응했지만.
엄마를 잃은 슬픔은 쉽게 이겨내지 못했다.
한동안은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평소에 재미있어하던 놀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 내가 없으면 크게 불안해하면서 나를 애타게 찾았다.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그나마 편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밤이 찾아오면 엄마가 없다는 외로움에 온몸을 덜덜 떨면서 눈물을 흘렸다.
나는 그런 이엘을 밤마다 꼭 껴안아 주며 이엘이 편안히 잠들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었다.
이렇게 힘들어하는 이엘을 위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식구들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임진혁은 식사를 잘하지 못하는 이엘을 위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리를 준비한다거나, 구하기 힘든 과자를 멀리서 사 오기도 했다.
그런 임진혁의 노력이 무색하게 이엘은 준비한 대부분 입에 가져가지도 않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고 계속 새로운 것들을 준비해 왔다.
퓨이와 모렛은 슬퍼하는 이엘을 보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굴렀는데.
의외로 티아가 가장 어른스럽게 이엘을 위로했다.
섣불리 말을 걸거나 위로하지 않았고.
그저 이엘의 곁에 있으면서 항상 웃으려고 노력했다.
슬픈 표정의 이엘이 아무리 외면해도 티아는 지지않고 웃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노력 덕분인지.
이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 웃을 수 있게 되었고, 임진혁이 준비해 온 맛있는 음식들도 맛보기 시작했다.
아직 내가 옆에 없으면 불안해하는 것은 그대로였지만.
조금씩 웃음을 되찾는 모습에 나도 힘을 낼 수 있었다.
* * *
통나무집에 귀여운 엘프 소녀가 들어오고.
그 소녀는 자연스럽게 우리 사이에 녹아들었다.
조금씩 슬픔을 지워내 나가던 엘프 소녀는 어느새 통나무집에서 평범한 일상을 지내게 되었다.
예전처럼 복스럽게 밥을 먹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와 임진혁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생겨났다.
대신 한가지 변화가 생겼는데…….
“아토(Atto) 아토.”
“…….”
“아토!”
“으응? 이엘 불렀어?”
이엘이 나를 다른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아토. 저기 같이 언덕에 놀러 가요.”
“어…… 이엘. 그런데.”
“……?”
“예전처럼 그냥 아저씨라고 부르면 안 될까?”
“…….”
내가 눈을 맞추고 이엘에게 예전처럼 불러 달라고 하자, 그녀는 곧바로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울상을 짓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이엘의 모습에 크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이엘이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불러도 돼. 그러니까 울지 마.”
“헤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말에 이 앙증맞은 엘프 소녀는 배시시 웃음을 지으며 내 품에 안겼다.
나도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안아줬다.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이엘이 나를 부르는 호칭을 생각하며 난감한 표정을 지울 수 없었다.
아토(Atto).
그러니까 이 호칭은 엘프어로 아빠를 뜻하는 단어였다.
이엘은 이 집에서 생활한 뒤로 언제부턴가 나를 아빠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엄마를 잃은 상실감에 일시적으로 나를 그렇게 부르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느 정도 이곳에 익숙해지고,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음에도 나를 부르는 호칭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살짝 부담스러워 호칭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보려 노력했지만, 이엘은 그럴 때마다 크게 슬퍼하며 나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처음에는 임진혁이나 다른 아이들도 이엘의 호칭에 약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이제는 그 호칭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나는 아르엘 님의 마지막 부탁을 떠올리며 품에 안긴 이엘을 내려다봤다.
이엘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마주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었다.
‘에라. 호칭이야 뭐 어때. 귀여운 딸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면 되지.’
솔직히 이엘같이 귀엽고 착한 딸이라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나는 결심한 듯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이엘의 손을 붙잡았다.
“그럼 언덕으로 갈까?”
-끄덕끄덕.
이엘은 내 물음에 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티아, 퓨이, 모렛도 자연스럽게 우리의 뒤에 따라붙었다.
“형. 나 애들이랑 다녀올게요.”
임진혁은 나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줬다.
나는 현관문을 열고 따스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아이들을 이끌고 언덕으로 향했다.
아르엘 님이 떠나고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나는 아이들과 평소 같은 행복한 모습으로 지낼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