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52화
52. 돕는다는 것(2)
“아르엘 님이?!”
내가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이엘은 울먹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급히 이엘에게 다가가 자세한 이야기를 물었다.
“아르엘 님은 지금 어디에 계셔?”
“침대에 누워 있어요.”
“알았어. 바로 가보자.”
나는 불안해하는 이엘을 안심시키며 바로 집을 나설 준비를 했다.
“아르엘이 아픈 거야?”
“퓨이?”
“이엘이랑 다녀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알았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을 집에 두고, 이엘과 함께 아르엘이 있는 곳으로 급히 걸음을 옮겼다.
-덜컥!
방문을 열자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누워 있는 아르엘의 모습이 보였다.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확인하니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혀 있었고,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가는 호흡을 이어나는 중이었다.
옆에 있는 이엘 때문에 겉으로는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크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119에 전화라도 해봐야 하나? 구급대원들을 이곳으로 데려올 수 있을까?’
휴대폰을 꺼내 뭐라도 하려는 순간.
침대에 누워 있던 아르엘의 눈꺼풀이 움찔거리더니,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엄마!”
“아르엘 님! 괜찮으세요?”
나와 이엘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아르엘의 눈동자가 우리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우리를 안심시키고 싶었던 건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셨…… 군요.”
마치 평소에 찾아왔을 때처럼 일상적인 말을 내게 건넸지만, 떨리는 목소리와 힘겨워 보이는 아르엘의 모습에 나는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왔다.
그나마 의식을 찾고 조금씩 상태가 호전되는 듯, 그녀의 표정이 아주 조금씩 편해지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굳이 찾아오셨네요.”
“아뇨. 아르엘 님.”
“엄마. 괜찮아요?”
“그래. 이제 괜찮단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낼 것 같은 이엘의 모습에 아르엘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시간이 지나고.
의식을 되찾았던 아르엘은 몇 마디 대화도 나누지 못한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침대 옆에 앉아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다행히 큰 고비는 넘겼는지 아르엘의 안색은 평온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옆에 있던 이엘도 이제 안심이되 긴장이 풀렸는지, 내 손을 잡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졸고 있는 이엘을 조심스럽게 침대에 눕혀주고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릴 겸 집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밤이 깊어 호수와 숲속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고, 하늘에는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화려한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밤하늘이긴 했지만 마음이 심란한 상태인 나에게는 그렇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하아…….”
가슴에 돌이 올라와 있는 것처럼 담담한 마음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밤하늘을 올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녹색 빛을 내뿜는 구체가 나에게 다가왔다.
“응?”
그 녹색 빛은 내 주변을 맴돌더니 어디론가 나를 이끌 듯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응시하다가 자연스럽게 그 빛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녹색 빛은 내가 어두운 숲속 길을 걸을 수 있게 앞을 밝혀주었고, 그 빛이 이끄는 익숙한 길을 따라 숲 깊숙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왔구나.
“네. 나무 정령님.”
녹색 빛을 따라 도착한 곳에서는 나무 정령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이해 주었다.
나를 불러낸 나무 정령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며 침중한 기색을 보였다.
아무래도 나무 정령 역시 눈에 띄게 나빠진 아르엘의 상태를 눈치채고 있는 듯했다.
“아르엘 님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고 있어요.”
-…….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
내 물음에 나무 정령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저 안타까운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무 정령님!”
-미안하지만 너무 늦었다.
“아! 스승님이 남겨두신 치료 약이 있어요.”
나는 저번에 아르엘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남겨두었던 치료 약 한 병을 생각해냈다.
‘다 죽어가던 강유환 회장도 되살려냈으니 분명 효과가 있을 거야.’
-그 마법사가 가져온 약이라면 소용없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르엘 님 스스로 그 약을 마시려 하지 않으실 거다.
“…….”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고 확언하는 나무 정령의 태도에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꺼내야만 했다.
“혹시 아르엘 님의 상태가 나빠진 것은 제가 가져갔던 생명의 샘물과 연관이 있는 건가요?”
-…….
“나무 정령님!”
-물론 네가 샘물을 가져가면서 아르엘 님에게 부담이 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다른 문제다. 애초에 아르엘 님의 상태는 계속 안 좋아지고 있었으니까.
“아아.”
사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아르엘이나 나무 정령, 스승님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샘물을 조금 가져감으로 인해서 아르엘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좌절하는 내 모습에 나무 정령이 위로를 건넸다.
-네 잘못이 아니다. 애초에 아르엘 님은 그런 상황까지 먼저 예상하시고 너에게 샘물을 전한 것이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일 뿐. 괜히 아르엘 님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만들지 말도록 해라.
“…….”
-이 말을 전하고 싶어서 불러낸 것이다. 밤이 늦었으니 얼른 돌아가거라.
나무 정령은 다시 녹색 불빛을 불러내 나에게 보냈다.
나는 뭔가 아쉬운 마음에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지만, 결국은 녹색 불빛을 따라 숲을 빠져나와야 했다.
* * *
“퓨이! 퓨이!”
“앗! 모렛이 걸렸어!”
“후모.”
“호호호.”
어제 매우 급했던 상황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아이들과 나, 그리고 아르엘까지 모여서 평소와 같이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엘은 평소보다 더 기운이 넘치는 모습으로 신나게 노는 아이들을 지켜봤다.
나는 아이들과 어울리면서도 계속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르엘의 상태를 살폈다.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이 나에게는 오히려 더 불안하게 느껴졌다.
아이들이 잠시 밖으로 놀러 나간 사이.
아르엘은 상냥한 미소와 함께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무 정령님에게 이야기를 들으셨나 보네요.”
“네.”
“너무 마음을 쓰시지 마세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이니까.”
“하지만 그 샘물 때문에 아르엘 님이…….”
“대신 다른 분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잖아요. 어차피 저에게는 원래 남아 있던 시간이 별로 없었어요.”
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아르엘의 모습에, 나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을 느꼈다.
“저는 아르엘 님에게 별로 해드린 것도 없는데…….”
“아니요. 이미 세진 님은 저에게 벌써 많은 일을 해주셨어요. 지금도 세진 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저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일이에요.”
“…….”
“제가 세진 님을 도와드린 것은 뭔가를 바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세진 님이 저와 이엘에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많은 것을 베푼 것처럼 말이에요.”
아르엘의 위로와 같은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따뜻한 위로가 오히려 나를 더 초라하고 힘겹게 만들었다.
아르엘은 이런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세진 님은 좋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좋은 놈이 아니에요.”
“아뇨. 맞아요. 세진 님은 스스로 생각하시는 것 보도 훨씬 좋은 사람이에요.”
“…….”
“그거 아세요? 저는 사실 세진 씨와 만나기 전부터 세진 씨가 이곳에 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
“저의 오랜 친구가 이야기해 줬거든요. 이 숲속 호숫가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저와 이엘을 도와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아르엘은 오래전 일을 회상하듯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세진 님을 만나자마자 세진 님이 친구가 말했던 그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어요.”
나는 아르엘의 오랜 친구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지만 들을 기회는 없었다.
밖에서 놀던 아이들이 다시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세진 님. 한 가지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하세요.”
“이엘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쳐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간절한 아르엘의 표정에 나는 뜨거워지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목이 부러질 정도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엘은 지금껏 보았던 미소 중에서 가장 환한 미소와 함께 내 손을 꼭 붙잡았다.
가녀린 그녀의 손에서 수많은 감정이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돌아오고 방안은 다시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했다.
나는 아까와는 다르게 최대한 밝은 표정을 지으며.
아르엘 그리고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무심코 지나가는 이 짧은 순간도 아르엘에게는 소중한 순간순간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심란한 표정으로 그녀의 소중한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 눈에 비친 환한 아이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아르엘의 모습이 마치 꿈속의 한 장면같이 느껴졌다.
너무 달콤해 깨기 싫은 꿈처럼.
“우리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사진이요?”
“네. 이렇게 다 같이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사진을 찍자는 내 제안에 아이들이 신난 반응을 보였다.
“퓨이!”
“사진 찍을래!”
“저도 좋아요.”
“후모!”
“자! 그러면 여기 아르엘 님 곁에 모여봐!”
나는 침대에 앉아 있는 아르엘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모았다. 그리고 팔을 쭉 뻗어 모두가 나올 수 있도록 사진을 찍었다.
-찰칵!
“잘 찍혔어? 나 보여줘!”
“퓨이!”
아이들은 자신이 나온 사진을 보며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아르엘도 사진이 마음에 드는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그 뒤에도 나는 아이들과 아르엘의 사진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평소에 더 많은 사진을 찍어 둘걸.’
살짝 후회가 생겼지만, 곧바로 마음속에서 지워냈다.
지금, 이 순간을 좀 더 소중히 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르엘은 휴대폰 속 수많은 사진을 둘러보다가.
그녀와 이엘 단둘이 나온 사진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참을 들여다봤다.
“이 사진. 마음에 드세요?”
“네.”
“여기에 올려 둘 수 있게 액자로 만들어 드릴까요?”
내가 아르엘에게 액자와 사진에 대해 설명을 해주자, 그녀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게 할 수도 있나요?”
“네. 별로 안 어려워요. 금방 해드릴 수 있어요. 내일이라도 당장.”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마워요. 세진 님.”
“아뇨. 뭘.”
단순히 액자를 만들어주는 일에.
그녀는 좀 더 일찍 해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크게 기뻐하며 감사함을 표했다.
나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살짝 뿌듯한 감정을 느꼈다. 이렇게라도 아르엘이 조금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 속 아르엘과 이엘의 모습을 보며, 내일이라도 당장 액자를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르엘은 그 사진으로 만들어진 액자를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