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45화
50. 소중한 일상(3)
내가 시설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1년에 한 번쯤 시설에 있는 모든 아이와 선생님들이 소풍을 가는 날이 있었다.
큰 버스를 빌려와 시설의 식구들을 태우고 한여름에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계곡으로 가곤 했다.
시원한 계곡에서 신나게 물놀이를 하고 나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친절한 아줌마들이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고, 다시 시설로 돌아갈 때쯤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을 하나씩 받았었다.
그때 시설의 아이들은 신나게 놀 수 있고, 맛있는 음식과 예쁜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소풍날을 손꼽아 기다렸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다른 아이들과는 조금 달랐다.
소풍 날이면 항상 따라오는 정체불명의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아저씨는 그냥 혼자 떨어져서 낚시를 즐기며, 멀찍이 보이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나는 친구들과 놀기보다는 그 낚시꾼 아저씨를 따라다녔다.
이유는 없었다.
그 당시에 어렸던 나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아저씨가 외로워 보였는지, 매년 그 아저씨를 따라다녔다.
나와 아저씨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확실했던 것은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는 아저씨가 내 눈에 굉장히 멋있게 보였다는 것.
지금 내가 낚시를 즐기는 이유도 그 시절의 기억 덕분이었다.
내가 조금 자라고 철이 들 무렵, 아저씨는 더 이상 소풍을 따라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저씨가 우리 시설의 모든 운영 비용을 지원해 주고, 매년 소풍을 갈 수 있도록 해주던 후원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미리 그 사실을 알지 못해서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 채, 아저씨와의 만남은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함께 기억 저편으로 흐릿해져 갔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어린 시절 추억 속, 낚시꾼 아저씨와 다시 만났다. 그것도 미래 그룹 회장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는 모습을 강유환 회장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기분 좋게 쳐다봤다.
잠시 어지러웠던 머릿속을 정리하고 말을 꺼내려는 순간.
“쿨럭, 쿨럭!”
“회장님!”
강유환 회장은 아주 심한 기침과 함께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최인환 비서실장이 잠시 자리를 비켰던 의사를 불렀고, 의사와 간호사가 신속하게 방으로 들어와 회장의 상태를 살폈다.
이혜린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나를 밖으로 이끌었다.
나는 그녀의 손에 조용히 이끌려 나가면서 의사와 간호사에게 둘러싸인 강유환 회장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이혜린과 나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서재 같은 느낌의 방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긴 나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많은 일들 때문에 복잡한 머리를 정리해 나갔다.
이혜린도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나를 기다려 주었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지아 씨랑 오빠가 아티팩트 경연대회에 나왔을 때. 정확히는 문제가 일어난 뒤지만.”
“하아. 그럼 미래 그룹 회장님이 정말로 우리를 후원해 주던 분이야?”
“응, 맞아.”
순순히 모든 것을 대답해 주는 그녀의 말에 나는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미래 그룹의 강유환 회장.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적 만났던 낚시꾼 아저씨의 진짜 정체.
‘그럼 어째서……?’
시설에서 자랄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후원을 해준 사람이니, 강유환 회장은 내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왜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티팩트 경연대회 때 그 사실을 알았다면 굉장히 오래전인데.
아스타나 약초를 부탁할 때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주었더라면 최대한 신경을 써서 협력했을 것이다.
“혜린아. 왜 숨긴 거야?”
“내가 숨기고 싶어서 숨긴 게 아니야. 회장님의 뜻이었어.”
“그러니까 도대체 왜?”
“정확한 사정은 다 이야기해 줄 수 없지만, 회장님은 시설에서 자란 우리가 회장님의 정체를 아는 것을 원치 않으셔.”
“…….”
“정확히는 우리가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고 싶은 거지만.”
그녀의 설명은 명확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생각을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럼 회장님은 내가 치료제를 가지고 있는 것도 모르시는 거야?”
“모르셔. 비서실장님과 내가 오빠에게 치료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회장님 몰래 오빠를 데려온 거야.”
“…….”
“회장님은 오빠가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아셨더라도 절대 그걸 구하려 하지 않으셨을 거야. 아니, 오히려 거부하셨겠지.”
쓸쓸한 표정을 짓던 이혜린은 내게 애원하듯 말했다.
“오빠. 지금은 말해줄 수 없지만, 회장님은 절대 지금 돌아가시면 안 돼. 제발 부탁이야. 회장님이 치료제를 마실 수 있도록 해줘.”
“…….”
진심이 느껴지는 그녀의 부탁에 나는 복잡한 표정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이혜린이 모든 걸 명확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강유환 회장이 내가 알던 낚시꾼 아저씨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품속의 약병을 만지작거리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낚시꾼 아저씨 옆에 붙어 앉아, 하염없이 물고기가 잡히기만을 기다리던 때.
아저씨는 이따금 두툼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부모님의 정을 느껴보지 못한 나에게는 굉장히 낯선 기분이 들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그 따스한 손길을 떠올리자 복잡했던 머리가 천천히 정리되어 갔다.
* * *
나와 이혜린이 다시 강유환 회장이 있는 방으로 되돌아간 것은 1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환 회장은 죽은 듯 생기 없는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나는 이혜린에게 눈짓을 보냈고, 이혜린은 비서실장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뭔가를 전했다.
그걸 들은 비서실장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결심한 듯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의료진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에게 절대 아무도 방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고 방문을 잠갔다.
방 안에 남은 사람은 나, 이혜린, 비서실장. 그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강유환 회장뿐이었다.
방 안에는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품 안에서 은은한 우윳빛의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자연스럽게 이혜린과 비서실장의 시선이 내 손의 약병으로 모여들었다.
약병을 든 내가 침대 곁으로 다가서자 나머지 둘도 따라붙었다.
-뽕!
약병 뚜껑을 여는 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기가 방 안에 확 퍼져 나갔다.
“약을 드실 수 있게 도와주세요.”
내 요청에 이혜린과 비서실장은 누워 있는 강유환 회장의 입을 살짝 열어주었다.
나는 열린 그의 입으로 아주 조금씩 우윳빛 약물을 흘려보냈다.
한 방울이라도 흘리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약병 안의 모든 약물은 그의 입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으으으.”
편안한 표정이던 강유환 회장은 신음을 흘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때와 마찬가지로 끙끙 앓기 시작하는 모습에 나는 침착하게 상태를 살폈지만, 이혜린과 비서실장은 그렇지 못했다.
“오빠. 뭔가 잘못된 거 아니에요?”
그녀의 걱정스러운 시선에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진정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비서실장 역시 최대한 침착하려 했지만, 회장이 신음을 크게 흘릴 때마다 두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주머니 때와 다르게 신음은 좀 더 오랫동안 이어졌고, 나도 조금씩 불안한 생각이 들 때쯤, 강유환 회장의 몸에서 웅혼한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때보다 훨씬 거세고 강렬한 파동이었다.
이혜린은 발을 동동 구르고, 비서실장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인중의 식은땀을 닦는 사이.
침대에 누워 있는 회장의 몸에서는 더욱 강렬한 파동이 흘러나왔고, 나중에는 침대 주변의 세 사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거세졌다.
그렇게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거침없이 흘러나오던 마력의 파동은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바다의 아주 거친 파도와 같던 파동은 잔잔한 호수의 물결처럼 변해 갔고, 그에 따라 강유환 회장의 표정도 편안해져 갔다.
생기 없던 얼굴에는 홍조가 피어났고, 가늘고 끊어질 것 같았던 숨소리에도 힘이 붙어 규칙적으로 변했다.
잔잔한 파동조차 사그라들었을 때, 강유환 회장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혜린과 비서실장은 소리를 내지 않는 선에서 큰 기쁨을 표했고, 나 역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자리를 비웠던 의료진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와 회장의 상태를 살폈다.
그들은 180도 변한 회장의 상태를 확인하고 매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살짝 흥분한 의료진의 이야기까지 들은 이혜린과 비서실장은 나를 향해 뜨거운 감사의 눈빛을 보내왔다.
* * *
“가시겠다고요? 좀 있으면 회장님이 깨어나실 텐데……. 그때까지 기다리시는 게.”
“아직 점심을 못 먹어서.”
“아아! 죄송합니다. 식사는 바로 준비해 드릴 테니 방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괜찮습니다. 여기서 먹는 건 좀 불편할 것 같아서요. 그냥 집에 가서 먹을게요.”
“허허. 그래도 회장님께서 많이 아쉬워하실 텐데.”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에 비서실장은 끝까지 나를 붙잡으려 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이혜린과 함께 아까의 주차장으로 가, 이곳으로 타고 왔던 차량에 다시 올라탔다.
비서실장은 주차장까지 따라내러 와서 몇 번이고 내게 고개를 숙이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차량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가 입구로 나아갔고, 아까와는 다르게 어떠한 제지도 없이 자연스럽게 통과할 수 있었다.
“회장님이 깨어나는 것까지 보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나 배고파. 그리고 나중에 애들 저녁도 챙겨야 하고.”
“집에 다른 사람도 있지 않아? 그리고 저기 있으면 요리사가 엄청 맛있는 요리도 해준다고.”
“맛있는 요리고 뭐고, 저런 분위기에서는 밥이 제대로 안 넘어가. 그냥 집에서 먹는 게 최고야.”
“피이…….”
이혜린도 내가 일찍 떠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아쉬운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
솔직히 배가 고픈 것은 핑계에 가까웠고, 그냥 왠지 쑥스럽다는 생각이 들어 그곳을 빠르게 빠져나왔다.
언젠가는 다시 이야기를 나눠야 하겠지만, 오늘은 별로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뭐. 다음에 또 만나면 되니까. 그렇죠? 낚시꾼 아저씨.’
* * *
침대에서 조용히 눈을 뜬 강유환 회장은 평소와 다른 개운한 몸 상태에 이상함을 느껴야 했다.
잠들기 전에는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태였는데, 지금은 아주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곁을 지키고 있던 비서실장이 몸을 일으킨 회장을 발견하고 침대 가까이 다가섰다.
“일어나셨습니까? 회장님.”
“그래.”
너무나도 좋은 몸 상태에 의문을 느낀 강유환 회장은 물끄러미 비서실장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건가?”
“그게…….”
비서실장은 강유환 회장이 잠든 사이 있었던 일을 차분하게 이야기해 줬다.
전세진이 가져온 치료제를 통해 자신의 병이 나았음을 알게 된 강유환 회장은 탄식을 터뜨렸다.
“허어. 자네가 결국에 내 명령을 어기고 말았구먼.”
“죄송합니다, 회장님.”
“그 아이는?”
“회장님의 상태가 괜찮아지신 걸 확인하고 떠났습니다.”
“허허허.”
치료제만 주고 전세진이 떠나 버렸다는 말에 강유환 회장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 아이에게 은혜를 받아버렸어. 그러면 안 됐는데 말이야.”
쓸쓸한 회장의 말에 비서실장이 위로를 전했다.
“회장님. 언제까지 그 일을 짊어지려 하시는 겁니까? 절대 그 아이들도 회장님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의 위로에도 회장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한동안 방안에는 침묵이 흘렀다.
“내 병이 치료됐다는 사실을 지금 누가 알고 있지?”
“저, 혜린, 전세진 님. 이렇게 3명입니다. 그리고 의료진이 회장님의 상태를 잠시 확인했는데 아직 눈치는 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
강유환 회장은 다시 비서실장에게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두 눈빛은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듯한 모습에 비서실장은 설레는 기분을 느꼈다.
“당분간은 환자 행세를 해야겠네. 최대한 비밀이 유지될 수 있도록 신경 좀 써주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달리 원하는 게 없던가?”
“물어봤지만 거절했습니다. 치료제의 대가로 돈 이야기를 꺼내면 오히려 실례가 될 것 같아서 그만뒀습니다.”
“잘했네. 천천히 갚아나가면 되는 일이니까. 그리고…….”
“네?”
“배가 좀 고픈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식욕을 드러내는 회장의 모습에 비서실장은 크게 기뻐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방 안에 혼자 남은 강유환 회장은
오래전 자신의 옆을 지키던 어린 소년과 진실을 알고 당황스러워하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