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44화
50. 소중한 일상(2)
평범한 오전.
임진혁과 함께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주방을 기웃거리던 티아는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세진. 오늘 점심은 뭐야?”
“어제 아주머니가 가져다주신 갈비찜이야.”
“흐흥. 맛있겠다.”
요즘 지치지 않는 아주머니의 반찬 폭격 덕분에 우리 집 식탁이 매우 풍족해졌다.
아이들도 아주머니의 반찬을 굉장히 좋아해서, 이렇게 식사 때만 되면 눈동자를 반짝이며 부엌을 기웃거렸다.
“금방 되니까. 다른 애들 불러와.”
“응. 알았어.”
티아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당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러 쪼르르 뛰어갔다.
그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짓는 와중에, 식탁에 올려두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세진아. 너한테 전화 왔다.”
“형. 잠시만요. 누구한테서 온 건지 좀 봐주실래요. 지금 냄비를 놓을 수가 없어서.”
“으음…… 이혜린?”
“그러면 저 대신 받아주실래요. 이것만 옮기면 끝이에요.”
나는 들고 있던 뜨거운 냄비를 옮기며 임진혁에게 부탁했다.
그는 휴대폰을 받아들고 나 대신 전화를 받아주었다.
잠시 후, 나는 최대한 빠르게 냄비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임진혁에게서 전화를 넘겨받았다.
“고마워요. 형. 여보세요?”
-세진 오빠?
“어. 혜린아. 무슨 일이야?”
-혹시 지금 바쁜 일 있어?
“아니. 바쁜 일은 아니고. 이제 가족들이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준비 중이었지.”
-그러면 시간 내줄 수 있어?
약간 다급함이 느껴지는 이혜린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지만, 일단은 평범하게 대답했다.
“오늘 뒤에 일정은 따로 없으니까. 괜찮아. 가족들이랑 점심 먹고…….”
-오빠. 미안한데. 지금 당장 나와줘.
“지금? 점심 이제 다 차렸는데.”
-식사는 나중에 따로 챙겨줄 테니까. 바로 나와. 부탁할게.
다급하게 부탁까지 하는 이혜린의 태도를 보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기도 힘든 분위기였다.
“으음. 알았어.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나갈게.”
-내가 근처로 가고 있으니까. 나오면 다시 연락해줘. 그리고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말해봐 봐.”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줘.
“……?”
뒤에 이어진 이혜린의 또 다른 부탁을 듣자마자 내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 * *
-스으으윽.
검은색이 어울리는 고급 세단이 멀리서 다가와 부드럽게 내 앞에 멈춰 섰다.
차량 뒷좌석의 문이 열리더니 이혜린이 내려 나를 맞이했다.
“오빠. 왔어?”
“그래. 일단 오긴 왔는데.”
“가면서 설명해 줄게. 일단 차에 타.”
“…….”
“나중에 다 설명해 줄 테니까. 제발 나 한 번만 믿어줘.”
“후우. 일단 알겠다.”
애절한 눈빛과 울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이혜린은 차량에 타자마자 앞에 있던 운전사에게 바로 지시했다.
“바로 회장님에게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태운 차량은 낮은 진동음과 함께 어디론가 나아가기 시작했다.
차량은 도시 중심부 쪽에서 점점 외곽으로 벗어났다.
차에 올라탄 이후로 나와 이혜린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했다.
계속 내 눈치를 살피던 이혜린은 조심스럽게 내게 말을 꺼냈다.
“오빠…… 화났어?”
“화는 안 났는데. 기분은 별로 안 좋네.”
“미안해. 오빠. 그런데 정말 너무 급해서…….”
“하아. 도대체 어떻게 안 거야?”
내 질문에 이혜린은 부모님 앞에 잘못한 어린애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입을 오물거렸다.
“조금 상황이 급해서…….”
그녀의 두 번째 부탁은 간단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티머시 증후군의 치료제를 가지고 나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내가 티머시 증후군 치료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아주머니가 치료제를 마시고 병이 다 나았을 때.
나는 주변인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었다.
아직 치료된 적이 없는 티머시 증후군이 깔끔하게 치료되었다는 사실이 퍼져나가게 되면, 어떤 후폭풍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씨 가족도 이미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절대 주변에 말하지 않겠다고 나에게 몇 번이나 뜻을 전했었다.
실제로 아주머니는 병이 다 나은 지금까지도 외부 출입을 자제하면서, 어느 정도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척 연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이혜린은 대뜸 나에게 치료제를 가지고 나와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솔직히 처음 그 부탁을 들었을 때, 굉장한 거부감과 불쾌감이 들었다.
일부러 숨기고 있던 사실을 이렇게 빨리 알아냈다는 것은 평소에 그들이 나를 감시하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했으니까.
아마 이혜린이 내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짐작했다.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차량은 이제 도시 외곽을 벗어나, 높은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으로 향했다.
그제야 안 사실이지만.
내가 타고 있는 차량의 앞뒤로 다른 검은색 세단 차량이 마치 호위하듯 따라오고 있었다.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던 이혜린은 다시 한번 정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빠. 근데 내가 말한 거 가져오긴 한 거지?”
“…….”
-찔끔.
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바라보자 이혜린은 몸을 떨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더욱 안절부절못한 상태를 보였다.
‘에휴. 내가 뭐 하는 짓이냐.’
괜히 여동생 같은 이혜린에게 괜히 심술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순간 스스로가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가져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으응. 알았어.”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조금 안심이 되는지 편안한 모습으로 변했다.
나는 그 모습이 조금 귀엽게 보여 몰래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차피 가기로 했으니 편하게 생각하자. 설마 치료제 때문에 해코지하기야 하겠어?’
찝찝했던 마음은 떨쳐버리고 최대한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은 나였으니까.
* * *
한적한 곳을 달리던 차량은 어느 깊은 산골 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꽤 큰 별장 같은 곳에 도착했다.
대충 둘러봐도 꽤 높은 담벼락에 CCTV가 쫙 깔려 있었고, 경비원들이 삼엄하게 별장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별장 입구에서 검은색 양복을 입은 건장한 남자 한 명이 차량을 막아 세웠다.
그리고 창문을 내린 이혜린에게 말을 걸었다.
“이혜린 씨? 외부인은 바로 들여보낼 수 없습니다. 일단 내려주시죠. 몸수색을 해야 하니까.”
“강 팀장님. 제가 손님으로 모셔온 분입니다. 몸수색은 필요 없어요.”
“그건 이혜린 씨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곳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잊으셨습니까? 괜히 시간 끌지 마시고 내리시죠.”
“계속 이러실 거예요?”
이혜린은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차가운 모습으로 남자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를 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려 할 때.
누군가 건장한 남성에게 다가가 말을 전했다.
말을 전해 들은 남자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더니 차량에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이혜린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창문을 올리고 운전사에게 다시 출발할 것을 지시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차량은 별장 아래쪽 개폐형식의 주차장으로 진입했다.
주차장 안쪽에서 내린 나와 이혜린은 또 다른 양복을 입은 남자의 안내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주차장에서 위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익숙한 얼굴의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세진 님.”
“아티팩트 경연대회에서 뵀었던?”
“기억해 주셨군요. 최인환 비서실장입니다.”
지난번에 신지아와 참여했던 아티팩트 경연대회에서 만났었던 그 남자였다.
그때와 같이 나에게 정중한 인사를 건넨 그는 바로 우리를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밖에서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별장은 내부는 생각보다 엄청 넓었다.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커다란 식당도 보였고, 널찍한 거실도 보였다.
최인환을 따라 다시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간 우리는 어느 방 앞에 도착했다.
방문 옆에는 보안 요원 두 명이 딱 버티고 서서 위압감을 보였다.
두 명의 보안 요원에게 인사를 받은 최인환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렸다.
-똑. 똑. 똑.
-들어오셔도 됩니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우리는 최인환을 필두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죽음의 기운이 짙게 느껴졌다.
방 한가운데는 힘겨운 얼굴을 한 남자가 큰 병원에서 볼법한 의료 기계들에 둘러싸여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 곁을 지키고 있던 안경을 낀 의사가 다가왔다.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지금은 다시 괜찮아지셨습니다.”
“대화를 나눠도 괜찮겠습니까?”
“조금이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체력이 많이 떨어져 계셔서 긴 대화는 힘드실 겁니다.”
조용히 눈빛을 교환한 의사가 자리를 비켜주고, 최인환은 나와 이혜린을 침대 곁으로 인도했다.
끊어질 듯한 가는 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워 있는 중년인.
TV에서 얼굴을 본 적 있는 미래 그룹의 회장.
사실 이혜린이 급하게 나를 찾았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
미래 그룹의 수장, 강유환 회장이 티머시 증후군을 앓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사실이었고.
아스타나 약초를 급하게 구하는 이혜린을 통해서 그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치료제를 팔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올랐을 사람이 강유환 회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이 치료제를 팔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었다.
이혜린의 부탁 때문에 따라온 것도 있고, 어느 정도 미래그룹에 신세를 진 일도 있었기 때문에 거절하지 않은 것뿐이다.
강유환 회장은 우리가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꼈는지 천천히 눈을 떴다.
눈동자를 천천히 움직이던 그는 우리를 발견했는지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혜린이 왔느냐?”
“네. 회장님.”
“옆에는?”
“세진 씨를 데리고 왔습니다.”
“허허. 자네가 전세진인가?”
“네. 반갑습니다.”
내 쪽을 보며 힘겨운 웃음을 짓는 강유환 회장.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한 번 얼굴을 직접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되는구먼. 지금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도 함께 봤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허허.”
“…….”
“혜린이가 자네를 보고 싶다고 했던 죽어가는 늙은이 소원이라도 이뤄주려고 바쁜 자네를 불렀는 모양이네. 미안하구먼.”
“……?”
강유환 회장이 이야기를 들을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에 이혜린 쪽을 쳐다봤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회장님은 치료제에 대해 모르셔.
“……?!”
나는 당연히 강유환 회장의 지시로 나를 이곳으로 데려오게 한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아주 당황스러웠다.
강유환 회장은 이런 내 상황도 모르고 힘겹게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가 나오는 영상을 보는데. 아이들이 참 귀엽더군. 낚시도 재미있어 보이고 말이야. 예전처럼 같이 낚시를 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엇??”
나는 연이어 생겨나는 당황스러운 상황에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하고 입을 달싹거렸다.
강유환 회장은 이런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어울리지 않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나는 사실의 확인을 위해 이혜린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내 시선의 뜻을 읽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낚시꾼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