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42화 (142/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42화

49. 재회한 베른하르(2)

“퓨우우…….”

“와아. 신기하다.”

“후모?”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약병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대충 겉으로 봤을 때는 평범한 약병처럼 보였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신비한 기운에 이 약병에 담긴 액체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정말 이 약병에 들어 있는 게 치료제인 건가요?”

“네가 사는 세계에서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는 확실한 치료제다. 만약 이 치료제가 통하지 않는다면, 내가 아는 치료법도 소용없을지도 모르지.”

“으음.”

사는 세계가 달라 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를 깔았어도, 확실히 기대감을 품게 했다.

“스승님. 그럼 치료법을 알려줄 게 아니라, 이 치료제 만드는 법을 알려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원하면 알려줄 수 있다. 치료제를 만드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으니까.”

“그럼 당장…….”

“대신 재료를 구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재료만 들어갔으니.”

“…….”

“직접 재료를 구하려면 대륙 곳곳을 몇 년 동안 샅샅이 뒤져도 모자랄지도.”

스승님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어야 했다.

“솔직히 네가 약속을 지킬 거라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혹시나 해서 귀하게 아껴두고 있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급하게 치료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이걸 가져가 사용하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쯧. 이제 너와 했던 약속은 어느 정도 지켰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너도 학파의 일원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나는 스승님께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내가 세 병의 치료제를 챙기려고 하자.

“잠깐. 한 병은 아르엘 님께 드릴 것이니. 두 병만 가져가도록 해라.”

“아…… 알겠습니다.”

세 병 모두 가져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지만, 두 병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 * *

“정말 잘 됐군요. 베른하르 님. 세진 님을 제자로 받아들이시다니.”

“허허. 그렇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제자를 찾지 못하셨는데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네요.”

내가 베른하르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아르엘은 크게 기뻐했다.

평소에 큰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 이곳에 머무르실 생각이신가요?”

“아닙니다. 급하게 제자로 받아들인 터라, 바깥의 일들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밖의 일이 정리되면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나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스승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르엘에게 물었다.

“아르엘 님. 몸 상태는 괜찮으신 겁니까?”

“후후. 괜찮습니다.”

“여기 제가 만들어온 치료제인데 드셔보시지요. 아마 몸 상태가 한결 가벼워지실 겁니다.”

스승님은 품속에서 우윳빛 치료제를 꺼내 아르엘에게 건넸다.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그 치료제를 거부했다.

“괜찮습니다. 베른하르 님. 저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 치료제는 받을 수 없습니다.”

“허허. 아르엘 님.”

“귀한 치료제인 것 같은데, 저보다는 더 필요하신 분들이 있을 거예요.”

부드러운 미소로 거절하는 아르엘의 모습에 스승님은 아쉬운 표정으로 치료제를 쉽사리 품 안으로 챙기지 못했다.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는 사이 아르엘은 피곤한 기색을 보였고, 나와 스승님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집을 빠져나와야 했다.

스승님은 아르엘의 상태가 마음에 계속 걸렸는지, 어두워진 표정을 쉽게 풀지 못했다.

“잠시 숲속으로 가야겠구나.”

“숲속이요?”

“쯧. 성질 고약한 나무 녀석이랑 이야기를 나눠봐야겠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찬 스승님은 성큼성큼 숲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는 약간 불안한 마음과 함께 그의 뒤를 따랐다.

스승님은 숲속 길이 익숙한지 거침없이 나무 정령을 향해 나아갔다.

-여기에는 무슨 일이냐? 교활한 마법사!

불쾌한듯한 나무 정령의 목소리가 숲속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쯧쯧. 그 되먹지 못한 성격은 여전하구려.”

-감히!

나무 정령과 스승님의 불같은 신경전에 나는 황급히 끼어들었다.

“오랜만입니다. 나무 정령님. 잘 지내셨습니까?”

-흐흠. 그래. 오랜만이구나.

다행히 나무 정령은 내 인사에 흥분한 기색을 가라앉히며 대답해 줬다.

“나보다 오래 보지도 않은 내 제자에게는 살갑게 구는구려.”

-제자? 설마 저 교활한 마법사의 제자가 된 것이냐?

“그렇게 되었습니다. 나무 정령님.”

내가 스승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나무 정령은 굉장히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그만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은 아르엘 님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진 것 같아서 왔다네.”

-…….

“혹시 결계에 문제가 생긴 것은?”

-결계에는 문제가 없다. 그저…….

“……?”

-얼마 전에 생명의 샘물을 조금 가져갔을 뿐이다.

“생명의 샘물을?”

스승님은 나무 정령으로부터 내가 생명의 샘물을 받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탄식을 흘렸다.

“허헛. 그렇게 된 거였군.”

-아르엘 님의 선택이었다.

“그렇겠지.”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나는 조용히 둘의 대화만 듣고 있었다.

“용케도 제자가 샘물을 가져가는 것을 허락했구려.”

-그래도 허튼 곳에 쓰지 않을 만한 인간이니까.

“허허허.”

나무 정령이 나에 대해 꽤 후한 평가를 하자 스승님은 소리높여 웃었다.

“그럼 나는 이만,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면 찾아오도록 하겠소.”

-안 와도 된다. 인간 마법사.

스승님과 나무 정령은 서로 툴툴거리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나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스승님을 따라 숲을 빠져나왔다.

“제자야.”

“네. 스승님.”

나는 아직 ‘제자’와 ‘스승님’이라는 호칭이 꽤 껄끄러웠지만, 공손하게 대답했다.

스승님은 품속에서 아르엘에게 주려던 약병을 나에게 건넸다.

“이걸 나 대신 좀 가지고 있거라.”

“이건 아르엘 님께 드리려던 게?”

“아르엘 님이 받지 않으시려고 하시니 어쩔 수 없구나. 대신 네가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한 때가 있으면 사용하도록 해라.”

나는 조심스럽게 스승님이 건넨 약병을 받아들었다.

“하아. 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르엘 님과 이엘은 나에게 굉장히 소중한 지인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그들을 잘 보살펴 줬으면 좋겠구나.”

“또 떠나시는 겁니까?”

“허허. 빨리 학파의 지식을 전하고 싶지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구나.”

스승님은 저번과는 달리 떠나기 아쉽다는 감정을 내비쳤다.

“제자야. 그리고 골렘의 핵도 네가 가지고 있도록 해라. 당분간은 연구하고 싶어도 시간이 없을 듯하구나.”

마지막으로 골렘의 핵까지 건넨 스승님은 쓸쓸한 표정으로 아르엘이 쉬고 있는 집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 * *

스승님이 다시 떠나가고.

나는 눈앞에서 영롱한 빛을 내뿜는 치료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리스의 저주’를 치료하는 치료제.

분명 스승님은 티머시 증후군의 증상을 듣고 이리스의 저주라는 병과 똑같다고 말했다.

‘정말 효과가 있는 걸까?’

스승님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누구도 치료하지 못한 불치병의 치료제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딱 세 병밖에 없는 치료제를 시험 삼아 마셔볼 수도 없는 노릇.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아저씨. 저 세진인데요. 아주머니는 요즘 어떠세요. 아…… 네. 드릴 말씀이 있는데 집에 한 번 찾아가도 될까요?”

* * *

오랜만에 정씨 가족의 집을 찾은 나는 아저씨와 남매의 환대를 받으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안방으로 들어가니 창백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세진이 왔구나.”

“안 일어나셔도 돼요. 편하게 있으세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는 아주머니를 억지로 눕히고,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주머니는 약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신지, 억지로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다를 떨기도 쉽지 않은지 얼굴에 피로함이 금방 드러났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나는 품속에서 스승님에게 받은 치료제를 꺼냈다.

“세진아. 그건 뭐냐?”

“제가 구한 치료제예요.”

“무슨……?”

“티머시 증후군의 치료제예요.”

내 말을 들은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살짝 멍한 표정을 지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아윤과 선우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호호. 세진아 어디서 사기당한 거 아니니? 갑자기 치료제라니.”

“에이. 오빠 장난치는 거예요?”

처음에는 정씨 가족 모두가 내 말을 믿지 않고, 장난을 치는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진지한 모습으로 침묵을 지키자 모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아저씨는 웃음기를 지우고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세진아. 정말이냐? 진짜 치료제야?”

“저도 효과가 확실한지는 몰라요. 하지만 꽤 믿을만한 사람에게서 전해 받은 귀한 치료 약이에요.”

“…….”

“솔직히 저도 조금 불안한데. 그래도 아주머니께 드리고 싶어서 가지고 왔어요.”

어렵게 가져다준 스승님에게는 죄송하지만, 솔직히 치료제의 약효가 확인된 것이 아니라 굉장히 불안했다.

만약에 아주머니가 털컥 치료제를 마셨다가 탈이 나버릴 수도 있는 상황.

아주머니를 포함한 정씨 가족이 복잡한 시선으로 영롱한 빛을 내뿜는 약병을 바라봤다.

“형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검증이 안 된 치료제라면 좀 더 고민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선우는 선뜻 치료제를 믿기 힘든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반면 아윤은.

“분명 세진 오빠가 믿을 만한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했으니까.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정말 위험한 약이었으면 오빠가 가지고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를 믿는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저씨는 쉽사리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약병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고민을 계속했다.

“세진아. 그거 줘봐.”

“네? 네.”

나머지 가족들이 심각하게 고민을 하는 사이, 아주머니는 가벼운 목소리로 약병을 달라며 손을 내밀었고.

나는 반사적으로 약병을 건넸다.

아주머니는 약병을 건네받자마자 곧바로 뚜껑을 개방해 버렸다.

-뽕!

경쾌하게 들려오는 소리.

그리고 우리들이 상황을 인지하기도 전에 아주머니는 약병을 그대로 원샷해 버렸다.

“으헉!!”

“엄마!!”

“…….”

“으으. 생각보다 쓰네. 애들아. 사탕 좀 가져와 봐.”

마치 평범한 한약이라도 먹은 것 같은 아주머니의 반응에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아주머니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뭘 그렇게 고민해. 어차피 방법이 없는데. 그나마 가능성이 있으면 시도해봐야지.”

틀리지 않은 말이었지만, 치료제를 가져온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과감한 행동이었다.

“으으음.”

“당신. 괜찮아?”

“엄마!!”

치료제를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머니는 어딘가 불편한지 살짝 인상을 쓰기 시작하셨고.

조금 더 시간이 흐르자 끙끙 앓기 시작하셨다.

“병원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 괜찮아?”

아저씨와 남매는 물론이고, 나 역시 굉장히 초조하게 아주머니의 상태를 지켜봤다.

아주머니는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끙끙 앓던 아주머니의 몸에서 은은한 마력의 파동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력의 파동이 점점 커질수록 아주머니의 신음이 심해졌고, 지켜보는 우리의 불안함도 켜졌다.

-우우우웅!

방을 울릴 정도로 커졌던 마력의 파동은 다시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고.

거칠었던 파동이 잔잔해졌을 때는 아주머니 역시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결 편안해진 아주머니의 표정에 아저씨가 불안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