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34화
46. 준비(2)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핀테일 던전의 클리어를 도전했을 때.
마지막 보스로 등장한 거대 골렘을 쓰러뜨리기 위해, 신지아가 만들어준 아트팩트를 한계까지 사용하고.
마지막에는 아티팩트에 장착된 마정석까지 뜯어내면서 마력 회로를 박살 내버렸다.
핀테일 던전 여러 도전 과정에서 아티팩트의 활약이 컸고, 마지막 거대 골렘과 싸울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아마 신지아가 신경을 써서 아티팩트를 만들어주지 않았다면 클리어하기 굉장히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을 당시에.
나는 힘들게 얻은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에 정신이 팔려 다른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도움을 주었던 신지아에게 고마움을 전하기는커녕,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 거대 골렘을 다시 공략하기 위해 신지아에게 도움을 얻고자 연락을 했는데.
-무슨 일이에요?
전화를 받는 그녀의 첫마디를 듣고 싸늘한 목소리를 눈치챘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눈치도 없이 저번 던전에서 아티팩트가 부서졌다는 이야기와 함께 다시 아티팩트를 부탁했다.
-아아. 세진 씨한테 저는 단순히 아티팩트를 만들어주는 사람이군요?
“에?”
-아티팩트가 부서질 정도로 위험한 던전을 다녀와 놓고, 걱정하는 사람에게 연락도 없다가. 대뜸 연락 와서 한다는 첫마디가 다시 아티팩트를 만들어 달라는 이야기네요?
“어…… 지아 씨?”
-죄송해요.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끊을게요.
-뚝!
신지아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제야 나의 무신경함을 깨닫고, 뒤늦게 그녀에게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답장을 해주지 않았다.
이혜린에게 이상한 눈초리를 받으면서까지 신지아에게 말을 전달해 달라고 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지아 씨. 그때는 정말 제가 잘못했어요.”
-…….
“그 던전에서도 지아 씨가 만들어준 아티팩트 때문에 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어요. 늦었지만 정말 고마워요.”
나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미안함과 고마운 마음을 전달했다.
-흐음. 정말이에요?
“진짜예요. 지금 옆에 있는 퓨이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요.”
“퓨이?”
보통 부모님을 걸고 하는 맹세에 나는 약간 어색하지만 퓨이의 이름을 가져다 사용했다.
그래도 신지아에게는 그럴듯하게 통했는지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
-일단 알겠어요. 하지만 절대 아직 화가 다 풀린 건 아니에요.
“아까는 화 안 났다고…….”
-뭐라고요?
“아앗! 퓨이야! 통화하는데 가만히 있어야지. 죄송해요. 퓨이가 갑자기 방해해서.”
“퓨이! 퓨이!”
아차 했던 나는 다급히 화제를 돌리기 위해 얌전히 있던 퓨이를 팔아넘겼고.
퓨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들썩거리며 항의했다.
나는 그런 퓨이를 쓰다듬어 진정시키면서, 신지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아 씨. 그럼 내일 시간 괜찮으시면 만날 수 있을까요?”
-……일단 좀 생각해 보고요.
그녀는 내 제의에 대답을 망설였다.
-바빠서 전화는 이만 끊을게요.
통화가 종료되고.
나는 아쉬운 마음에 멍하니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퓨이. 퓨이.”
살짝 허탈한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퓨이가 내 품에서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괜찮아. 퓨이야.”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기특한 슬라임을 쓰다듬어 주었다.
-♩∼♬∼♪
아직 들고있던 휴대폰에서 메시지 착신음이 들렸다.
‘지아 씨한테서 메시지?’
재빨리 화면을 켜서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내일 시간에 맞춰서 보내준 주소로 찾아오세요. 늦으면 못 만날 줄 알아요.
메시지에는 만날 시간과 함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 내용을 확인하고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 * *
다음 날.
나는 신지아가 메시지로 보내준 주소를 따라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연구소들이 모여 있는 연구 단지였다.
그리고 내가 바라보고 있는 건물 앞에는 ‘미래 아티팩트 연구소’라고 적혀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원이 내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누구를 만나러 왔는데. 신지아 씨라고.”
“아아. 부소장님 손님이시군요.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부소장님?’
경비원은 친절하게 내가 가야 할 곳을 안내해 주었다.
“저쪽 건물 1층으로 들어가시면 보안 직원이 있는데, 직원에게 부소장님을 만나러 왔다고 말씀하시면 외부인 출입증을 내줄 겁니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경비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알려준 건물 입구로 향했다. 그가 알려준 대로 보안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전세진 씨 맞으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 외부인 출입증 목에 걸어주시고요.”
“아. 네.”
“부소장님 손님이시니 몸수색은 따로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건물 내부에서 사진을 찍으시거나 촬영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1층에 있던 3명의 보안 직원 중, 건장한 남자 직원 한 명이 직접 나를 안내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보안 직원에게 말했다.
“저기. 저는 부소장님이라는 분이 아니라 신지아 씨를 만나러 왔는데요.”
“하하하. 부소장님 성함이 신지아 님입니다.”
“예?!”
내가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이자 보안 직원이 오히려 당황하는 모습으로 되물었다.
“정말 모르시고 찾아오신 겁니까?”
“그냥 여기서 일한다는 이야기만 들어서.”
“허헛. 부소장님이 들어오신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직원 모두에게 인정받으시는 분입니다. 벌써 차기 연구소장으로도 거론될 정도니까요.”
나는 새로운 정보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가 운영하던 공방이 불타고, 미래 그룹의 연구소에 들어간 것이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부소장 자리에 올랐다니.
속으로 놀라는 사이.
보안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상층부로 향했다. 그리고.
-신지아 부소장.
방 옆에 걸린 이름과 직책을 보니 다시금 그녀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었다.
-똑. 똑. 똑.
-네.
“부소장님. 손님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달칵.
직원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가니, 신지아는 넓은 책상 앞에 앉아 수많은 서류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아. 왔네요. 세진 씨.”
그녀는 나를 발견하고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부소장님.”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럼.”
보안 직원은 나와 신지아에게 고개를 숙인 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내가 아직 멍한 표정을 짓고 있자 신지아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뭐에요? 표정이 왜 그래요?”
“지아 씨. 그냥 연구소 직원이었던 거 아니에요?”
“네. 처음에는 연구소 직원으로 시작했죠. 근데 점점 맡는 일이 많아지다 보니까 어느새 부소장 자리에 오르더라고요.”
“하하하.”
마치 교과서를 읽다 보니 명문대에 입학했다는 말처럼 괴리감이 느껴지는 설명이었다.
나는 허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부러 말 안 한 거죠?”
“뭐. 조금은요.”
새침한 표정으로 대답한 그녀는 내 팔을 잡고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어디 가요?”
“이야기는 나중에. 또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 있거든요.”
나는 신지아에게 이끌려 그녀의 방을 빠져나와 다른 방문 앞에 도착했다.
방문 옆에는
-이연수 연구소장.
이라고 적혀 있었다.
-똑. 똑. 똑.
“연구소장님. 저예요. 손님 모시고 왔어요.”
-들어오세요.
방 안쪽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신지아와 나는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세진 씨.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까 신지아의 방보다 조금 더 넓은 방 안에, 안경을 쓴 지적인 이미지의 중년 여성이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그녀의 안내에 따라 나와 신지아는 3개의 의자가 놓인 테이블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우리 맞은편에 앉은 중년 여성은 푸근한 미소로 자신을 먼저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연구소에서 소장직을 맡은 이연수라고 해요.”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호호. 지아 씨에게 듣던 대로 듬직하신 분이네요.”
“아. 감사합니다.”
나는 왠지 여자 친구와 장모님을 만나러 온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쉽사리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연수 연구소장은 이곳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와 신지아에 대한 이야기를 내게 해줬는데.
신지아를 언급할 때마다, 눈빛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서 얼마나 그녀가 신지아를 아끼고 있는지 전해졌다.
그리고 신지아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이 연구소에서 많은 일을 해내는 중이었다.
연구에 관한 일들은 거의 다 그녀의 손을 거치고 있었고, 최근에는 생산 쪽으로 일을 넓힌다고 한다.
이연수의 칭찬 세례가 살짝 민망했는지 신지아가 나서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소장님. 그만하세요.”
“호호. 세진 씨 앞이라서 창피하세요?”
“소장니임!”
“알았어요. 알았어요.”
그녀는 귀여운 딸을 보는 눈빛으로 신지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마 전에 이혜린 씨를 만나셨죠?”
“네.”
“정확히 무슨 일을 하시려는지는 전해 듣지 못했지만, 회장님께서 이 연구소에서 지원 가능한 모든 것을 세진 씨에게 지원해 주라는 지시가 내려왔어요.”
“헉!”
나는 생각보다 훨씬 더 통 큰 지원에 얼굴에 놀라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필요하신 아티팩트나 재료가 있으시면, 비용에 상관없이 연구소에서 구해다 쓰시면 됩니다. 자세한 내용은 지아 씨에게 전부 일임했으니 두 분이 상의하시면 될 것 같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소장님.”
“후후. 아무쪼록 우리 지아 씨 잘 부탁드릴게요.”
우리는 이연수의 자상한 어머니 같은 배웅을 받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다시 신지아의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방 안의 의자에 마주 앉았다.
그녀는 약간 불만인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또 위험한 일을 하는 거예요?”
“…….”
위험하지 않다고 그녀를 안심시키고 싶었지만,
그 무지막지한 거대 골렘을 다시 상대하는 일이 위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침묵을 유지하자 이번엔 그녀는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그냥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안 돼요? 좋은 아티팩트 많이 만들어줄 테니까.”
걱정이 섞인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거대 골렘을 공략하고.
골렘의 핵에 관한 실마리를 찾는 일은 내가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꼭 해야 하는 일이에요.”
내가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지아 씨.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지아 씨가 응원해 줬으면 좋겠어요.”
내 진지한 말에 그녀는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피이. 제가 만들어 드리는 아티팩트 때문에요?”
나는 뭔가 울컥 올라오는 마음에 그녀의 작은 두 손을 내 손으로 덥석 잡았다.
“어맛!”
“아뇨. 아티팩트 때문이 아니라, 지아 씨가 절 응원해 주는 게 중요해요.”
“으음…….”
진심이 담긴 외침에 그녀는 얼굴을 붉히며 내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내 손에 잡힌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면서 몸을 움찔거렸다.
신지아를 처음 만났을 때는 빚을 갚기 위해, 돈을 이어진 계약 관계를 이어나갔지만.
이제는 그런 계약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빚도 다 갚았고, 나도 어느 정도 당당하게 그녀의 앞에 나설 만큼 기반을 쌓았다.
“지아 씨. 이번 일이 완벽하게 다 끝내고 나면, 그때는 정식으로…….”
“정식으로?”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기대감과 들뜬 설렘이 느껴졌다.
나는 목구멍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으려는데.
-똑. 똑. 똑.
-부소장님. 소장님께서 커피랑 간식 보내셨습니다.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화들짝 놀란 우리는 파닥거리면서 동시에 떨어졌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 직원은 나와 신지아 사이에 커피와 간식을 내려놓았다.
여직원은 나와 신지아를 잠시 번갈아 쳐다보더니 뭔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방을 나서기 전에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뭔가 미묘한 말을 남기고 방을 빠져나갔다.
“흠. 흠.”
“…….”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딴청을 피웠고, 신지아는 상기된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