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33화
46. 준비(1)
아르엘을 통해 생명의 샘물을 얻은 뒤,
나는 다음날 곧바로 아스타나 약초에 샘물을 주기 시작했다.
유리병 안에 들어 있는 샘물의 양이 워낙 많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의 약초에 한두 방울씩만 줬는데도, 전부 주기 모자랐다.
가장 상태가 좋아 보이는 약초들만 골라서 생명의 샘물을 나눠준 다음, 어르신께 도움을 요청해 그 약초들을 집중적으로 관리했다.
매일 상태를 확인하고, 벌레나 잡초가 가까이할 수 없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섰다.
생명의 샘물을 받은 아스타나 약초들은 다른 약초들과는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수확할 수 있을 정도까지 자라나게 되었다.
“허. 정말 대단하구나.”
나보다 약초에 대해 많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는 어르신도, 생명의 샘물 효능에 놀라움을 표했다.
이렇게 빨리 자란 약초들은 단순히 빨리 자란 것만이 아니었다.
다른 약초들과는 다르게 생기가 넘쳤고, 내가 생명의 샘에서 느꼈던 그 신비한 기운이 약초에서 은은하게 느껴졌다.
‘이거다. 이거면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나와 어르신은 잘 자라난 약초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생명의 샘물로 자라난 약초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수확해 절반을 아저씨에게 전해줬다.
“세진아. 이건?”
“이 약초로 아주머니에게 빨리 약을 만들어 드리세요.”
“아스타나 약초는 아직 남아 있는데.”
“이건 달라요. 무조건 이 약초 먼저 사용해 보세요.”
아저씨는 대충 보기에는 평범한 아스타나 약초와 다를 것 없어 보여 잠깐 의아함을 표했지만, 내 진지한 모습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후.
아저씨는 내게 전화를 걸어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진아. 그 약초 어디서 구한 거냐?!
“아주머니 좀 괜찮아지셨어요?”
-그래. 정말 많이 좋아졌다. 의사 선생님도 오늘 검사 결과 확인해 보시고 엄청나게 놀라시더라.
“다행이에요.”
-정말 고맙다. 세진아.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흥분한 아저씨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저씨. 다른 생각은 나중에 하시고. 제가 드린 약초 최대한 아껴서 아주머니께 챙겨드리세요.”
-그래. 알았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아저씨는 통화가 끊어지기 직전까지 내게 고맙다는 말을 끊임없이 계속 되풀이했다.
통화가 종료되고.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약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의 상태가 좋아졌다는 사실을 듣고 나니, 며칠 동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시원해졌다.
‘그래도 아직 끝이 아니다.’
아무리 약초의 효능이 좋아도 잠시 증상을 완화해줄 뿐.
병의 완전한 치료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미 생명의 샘물은 전부 사용해 버린 상황이라, 그런 효과의 약초를 더 길러낼 수도 없다.
아저씨에게 전해준 약초를 다 사용하고 나면 아주머니는 또 위험한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나는 잠시 풀려 있던 마음을 다잡으며.
휴대폰을 화면을 켜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 * *
낯선 카페에서 나는 살짝 초조한 마음으로 약속 상대를 기다렸다.
먼저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식어갈 때쯤.
낯익은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카페 입구로 들어와 매장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 여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제가 조금 늦었죠? 죄송해요. 길드의 일을 잠시 마무리하느라.”
서율희는 급하게 왔는지 살짝 거친 숨을 내쉬며 내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아닙니다. 갑자기 시간 내달라고 했는데, 이렇게 나와주신 것만으로도 고맙죠.”
“그 신기한 던전을 클리어한 뒤로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네요.”
“하하. 그런가요?”
중간에 연락은 몇 번 주고받았지만, 얼굴을 직접 보는 것은 핀테일 던전을 클리어한 뒤로 처음이었다.
“저기 엘프 차를 조금 가져왔어요.”
“어멋. 이런 건 준비 안 해주셔도 되는데.”
내가 준비한 엘프 차를 보고 서율희는 입으로는 사양하는 듯한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굉장히 밝게 변했다.
“이렇게 구하기 힘든 걸 또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네요.”
“괜찮습니다. 많은 분에게 판매할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에 고마운 분들에게 나눠 드릴 정도는 충분히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고맙네요. 엘프 차 잘 마실게요.”
준비한 엘프 차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살짝 조성하고, 나는 본격적으로 그녀를 불러낸 용건에 대해 꺼내기 시작했다.
“저 오늘 서율희 조장님을 불러낸 것은…….”
“그냥 편하게 이름 부르셔도 돼요.”
“아. 네. 오늘 율희 씨를 불러낸 것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일단 편하게 말씀해 보세요.”
서율희는 부탁이라는 말에 살짝 표정이 변했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내가 편하게 말할 수 있도록 해줬다.
“저번에 함께 했던 골렘 균열 기억하시죠?”
“네. 기억하죠.”
“그곳에 사원을 지키고 있는 거대 골렘을 사냥할 생각입니다. 혹시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
거대 골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살짝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녀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자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입가에 가져갔다.
“부탁에 대한 대답을 드리기 전에, 세진 씨에게 두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요.”
“네?”
“먼저 무슨 이유로 그 거대 골렘을 공략하려는지 알 수 있을까요?”
거대 골렘을 공략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 녀석을 잡아 베른하르와 부탁했던 골렘 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골렘 제작 이론서’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볼 생각도 했지만, 남은 시간이 별로 없었다.
골렘 제작 이론서를 익히는 게 더 안전할지 몰라도.
조금 더 확실한 방법, 거대 골렘을 공략하는 선택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른하르에 대해, 티머시 증후군을 치료할 방법을 얻기 위한 목적이라고.
섣불리 서율희에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죄송합니다. 그건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만 말씀드릴게요.”
“좋아요. 그럼 두 번째로, 제 개인적인 도움을 원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오성 길드에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하시는 건가요?”
“가능하면 오성 길드에 도움을 좋지만, 대신 공략한 거대 골렘의 소유권은 제가 가지고 싶은데…….”
“하아…….”
내 대답에 서율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진 씨. 그 무지막지한 거대 골렘. 지금까지 한 번도 공략 안 된 거 아시죠?”
“네. 잘 알고 있죠.”
“그런 위험을 감수하는데, 공략한 거대 골렘의 소유권을 온전히 양도할 길드가 얼마나 있을까요?”
“…….”
나 역시 어이없는 부탁임을 알고 있기에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만약 오성 길드에서 도움을 주더라도 저번에 도움을 드린 것과는 달리, 그에 맞는 대가를 지급하셔야 할 거예요.”
그녀는 냉정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일단 길드에 이야기는 해볼게요. 하지만 큰 기대는 안 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나는 진심을 담아 그녀에게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힘든 부탁인데도, 길드에 이야기라도 전해주려는 그녀의 배려가 정말 고마웠다.
“근데 정말 왜 거대 골렘을 잡으시려고 하는 건지 이야기 안 해주실 거에요?”
“네?”
“그래도 저는 세진 씨랑 꽤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세진 씨는 아닌가 보네요.”
약간 서운한 표정으로 불만을 토로하는 서율희의 모습에 나는 크게 당황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아뇨.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설명하기 힘든 일이라.”
“…….”
“아저씨 가족한테도 아직 말 안 했습니다.”
“그런가요?”
정 씨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
서율희는 불만스럽던 표정을 풀고 살짝 미소 지었다.
* * *
서율희와의 만남을 끝내고.
나는 곧바로 다음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번에는 평소 자주 다니던 익숙한 카페에 도착하고.
“오빠. 여기야.”
이혜린의 부름에 따라 그녀가 있는 자리로 향했다.
“일찍 왔네?”
“아냐. 나도 금방 왔어.”
그녀는 방긋 웃으며 자리에 앉는 나를 맞아줬다.
“내가 보낸 아스타나 약초 어땠어?”
“정말 효과가 좋았어. 회장님 컨디션도 좋아지고, 검사 결과도 많이 좋아졌어. 오빠한테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어.”
“다행이네.”
아저씨에게 전해주지 않은 나머지 아스타나 약초는 이혜린을 통해 미래 그룹 회장에게 전달되었다.
생명의 샘물로 키워낸 약초 모두를 아주머니를 위해 사용할까 했지만,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절반은 이혜린에게 전달했다.
“약초값은 저번에 그 계좌로 보내주면 되지?”
“아니. 약초값은 괜찮고, 대신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 무슨 부탁?”
나는 이혜린에게 거대 골렘 공략 계획에 관해 설명해줬다.
“으음. 혹시 무슨 이유로 그 골렘을 잡으려고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이혜린도 서율희와 똑같은 질문을 내게 물었다.
“미안. 설명하기 힘든 일이라. 하지만 이 일이 성공하면 미래 그룹 회장님에게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미래 그룹 회장에게 좋은 일이 있을 거란 이야기에 이혜린의 눈빛이 조용히 빛났다.
아무래도 회장이 앓고 있는 불치병, 티머시 증후군과 관련 있는 일이라는 것을 빠르게 눈치챈 모양이었다.
“일단 알겠어. 오빠. 대신 지금 당장 확답은 못 해줘. 회장님 그리고 실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거든.”
“그래. 잘 좀 부탁할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회장님도 실장님도 오빠한테는 굉장히 고마워하고 있거든.”
그녀의 말에 살짝 내 마음이 놓이는 듯했다.
“어…… 그리고 이건 좀 개인적인 부탁인데.”
“뭔데?”
“너 지아 씨 연락처 알고 있지?”
“신지아 씨? 알고 있지. 근데 오빠도 연락처 알고 있잖아.”
“어. 그런데 나 대신해서 지아 씨한테 말 좀 전해줄래?”
“……??”
이혜린은 내 부탁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 * *
집으로 돌아온 나는 이혜린의 연락을 받고,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바라봤다.
-신지아 씨랑 통화했어. 아마 좀 있으면 연락 갈 거야.
-그리고 오빠가 너무 했어. 지아 씨한테 제대로 사과해!
“퓨이?”
내가 불안한 모습을 보이자,
퓨이가 내 곁으로 다가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 퓨이를 무릎 위에 올리고, 마치 인형을 끌어안는 것처럼 퓨이를 끌어안았다.
“퓨우우.”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퓨이를 껴안고 있자 초조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퓨이를 귀찮게 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을 때.
-♩∼♬∼♪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의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꿀꺽.
나는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여보세요. 지아 씨?”
-무슨 일이에요?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휴대폰을 통해 냉랭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저…… 아직 화났어요?”
-화 안 났는데요?
“…….”
누가 들어도 화난 목소리였지만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할 수 없었다.
“퓨이?”
-어머! 퓨이 맞지?
“퓨이.”
신지아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퓨이가 반가운 듯 휴대폰을 향해 울음소리를 냈다.
그녀도 나와 이야기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퓨이를 반겼다.
-너무 오랜만이다. 나 안 보고 싶어?
“퓨이! 퓨이!”
-그래. 퓨이는 무신경한 누구랑은 다르게 정말 상냥하네.
“퓨이?”
“…….”
그녀의 웃음 섞인 말 속에 돋아난 가시.
그 가시가 내 마음을 가차 없이 찔러댔다.
‘아…… 그때 내가 왜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