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32화
45. 생명의 샘(2)
아주머니의 병문안을 끝내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다.
집에는 어르신이 먼저 돌아가고, 임진혁과 아이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아주머니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데도, 본능적으로 무거운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평소와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서로 큰소리로 떠들거나, 신나게 웃지도 않고.
최대한 조용히 시간을 보내면서 내 눈치를 봤다.
아이들 특유의 쾌활한 분위기가 사라지자, 나는 여러 가지 의미로 슬퍼졌다.
“이엘. 오늘은 일찍 집에 돌아갈래?”
“네. 아저씨.”
보통 이엘은 어두워지기 직전까지 우리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았는데, 오늘은 일찍 집에 데려다주기로 했다.
손을 잡고 이엘의 집으로 향하는 길.
평소에는 옆 호숫가의 물고기가 놀랄 정도로 재잘재잘 떠들었는데, 오늘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길을 걸었다.
이엘은 한참을 내 눈치를 보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윤 언니, 엄마가 아프신 거예요?”
“응. 조금 아프시데.”
“얼마나 아프신데요?”
“…….”
이엘의 질문에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다. 이 마음 여린 엘프 소녀에게 도저히 진실을 말해줄 수는 없었으니까.
잠시 침묵을 하던 나는 뒤늦게 말을 이었다.
“괜찮아. 금방 괜찮아지실 거야. 이엘은 걱정 안 해도 돼.”
“…….”
이엘을 안심시키기 위해 진실보다는 내 바람을 이야기해 줬다.
내 대답에도 이엘은 입을 꾹 다물고 더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손을 잡고 집 앞에 도착했다.
“어서오세요. 세진 님. 이엘도 어서 오렴.”
“안녕하세요. 아르엘 님.”
평소보다 상태가 좋아 보이는 아르엘이 침대에 기대앉아,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나는 최대한 평소와 같은 모습을 보이려 했지만, 아르엘은 바로 우리의 상태를 눈치챘다.
“혹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요?”
“…….”
“…….”
아르엘의 질문에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고, 이엘은 슬쩍 내 쪽을 바라보았다.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걱정거리가 있으시다면 이야기해 주실래요?”
마치 엄마가 아이를 달래는 듯한 아르엘의 어조.
그 말을 듣고 계속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정 씨 가족에 관한 이야기와 오늘 있었던 불행한 일에 대해 그녀에게 말해줬다.
오늘 의사에게 들었던 많이 위험한 상황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아르엘은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듯했다.
“큰일이네요. 그 가족분들은 이엘에게도 많이 잘해주셨다고 들었는데.”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말투와 함께 그녀는 곁에 있던 이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혹시 도와드릴 방법이 없을까요?”
“…….”
전 세계의 그 누구도 아직 치료법을 찾지 못한 불치병.
베른하르가 치료법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그가 돌아오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올 때까지 아무 일이 없다고 해도, 골렘 핵에 대한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치료법 또한 얻을 수 없었다.
그나마 시간이라도 벌어줄 방법은 이전에 이혜린이 부탁했던, 특별한 아스타나 약초밖에 없었는데.
그 약초를 구할 방법이 지금으로써는 없는 상황.
잠시 망설이던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특별한 아스타나 약초에 관해 이야기했다.
아르엘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더니, 어려운 표정으로 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고민을 이어가던 그녀는
갑자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을 딛고 일어서려 했다.
어렵게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굉장히 위태로워 보여
나는 곧바로 그녀의 한쪽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고맙습니다. 세진 님.”
“갑자기 왜?”
“나무 정령님께 가야겠어요. 죄송하지만 같이 가주시겠어요?”
뜬금없이 나무 정령에게 가야겠다는 아르엘.
잡고 있는 팔을 통해서 느껴지는 아르엘의 연약함에 당장에라도 말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쉽게 뜯을 굽힐 것 같지 않아 보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이엘과 나는 아르엘을 부축해 집을 나와 나무 정령이 있는 숲속으로 향했다.
* * *
-아니. 아르엘 님?!
불안한 걸음걸이의 아르엘을 본 나무 정령은
엄청나게 놀란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와 이엘도 함께 있었지만, 나무 정령은 이쪽은 전혀 눈길을 주지 않고 오직 아르엘에게만 시선을 뒀다.
“오랜만이네요. 나무 정령님.”
-그렇습니다. 아르엘 님. 이곳까지는 무슨 일로?
“생명의 샘에 잠시 들어가고 싶어서요.”
-……?!?!
‘생명의 샘?’
생명의 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나무 정령은 더더욱 놀란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다.
-아르엘 님! 생명의 샘에서 무얼 하실 생각입니까?
“샘물이 조금 필요하신 분들이 생겨서요. 조금만 가져갈게요.”
-허허허. 안됩니다. 절대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시종일관 아르엘에게 공손한 태도를 보이던 나무 정령은
생명의 샘 이야기에 완고한 태도로 아르엘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무 정령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아르엘 역시 쉽게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나무 정령님. 부탁드릴게요.”
-아르엘 님. 지금 그 샘물을 사용하시면…….
나무 정령이 뭔가 이야기를 꺼내려다, 나와 이엘의 눈치를 보더니 황급히 뒷말을 집어삼켰다.
결국,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르엘 님. 대신 아주 조금이어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정령님.”
-뿌드드드득.
-파파팍!
나무 정령 아래에서
나무뿌리가 갈라지는 소리와 땅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바닥에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생성되었다.
나는 물론이고 이엘도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지 놀란 표정으로 통로를 바라봤다.
“세진 님.”
“아! 예.”
나는 아르엘을 부축하고 땅바닥에 생겨난 통로를 향해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엘도 우리 뒤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땅속 통로는 어떤 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방이 신비한 빛으로 매우 밝게 빛나고 있었고.
통로 내부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신비한 기운이 가득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을 느끼며 통로를 나아가다 보니, 멀지 않은 통로 끝에서 무엇인가 보이기 시작했다.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주 작은 샘이었다.
아르엘이 아까 생명의 샘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샘이 아니라 물웅덩이라 생각할 정도로 작았다.
아르엘은 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내더니 나에게 건넸다.
“세진 님. 이걸로 샘물을 받아오세요.”
“제가요?”
“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아르엘이 건네는 유리병을 받아 작은 샘으로 다가갔다.
샘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통로에서 느껴지던 신비한 기운이 강하게 느껴졌다.
“꿀꺽.”
왠지 모를 긴장감에 마른 침을 한번 삼키고, 유리병의 뚜껑을 열어 아주 조심스럽게 샘물을 받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유리병이었는데도, 워낙 샘의 크기가 작아 샘물의 양이 줄어드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천천히 유리병을 채우던 와중,
손가락 끝이 차가운 샘물에 살짝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의식은 순식간에 샘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엇?!’
샘으로 빨려 들어간 내 의식은 샘물을 타고, 땅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샘 주변에서부터 그리고 점점 그 범위를 넓혀나가더니.
나무 정령의 굳건한 뿌리부터, 숲을 빠져나와 보이는 넓은 호수와 그 안에 수많은 물고기, 높은 언덕 위에 모여 있는 작은 슬라임들까지.
마치 숲과 호수의 모든 생명체와 연결되는 기분을 느꼈다.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나조차 자연 일부분으로 스며드는 것 같은 기묘하고 편안한 느낌.
“아앗!”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순간은
유리병을 떨어뜨리기 직전에 깨어날 수 있었다.
[‘아르키트 회로 원리’에 대한 영감을 얻었습니다.]
[새로운 문양을 발견했습니다.]
[스킬 레벨이 낮아 불완전한 해석에 성공합니다.]
[C◎◇▽☆ 문양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떨어뜨릴 뻔한 유리병의 뚜껑을 재빨리 닫으며 샘에서 멀리 떨어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세진 님?”
이엘과 아르엘이 내 이상한 움직임을 보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유리병에 샘물은 다 채웠습니다.”
“그럼. 이제 나가요.”
나는 다시 한번 아르엘을 부축하고 이엘과 함께 들어왔던 통로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통로를 빠져나가기 직전,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신비한 기운을 가진 샘을 바라보다 통로를 빠져나갔다.
-돌아오셨습니까?
“네. 나무 정령님. 감사합니다.
나무 정령은 아르엘을 바라보다가 내 손에 들린 유리병을 보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 * *
“그 유리병에 담긴 샘물을 기르시는 아스타나 약초에 몇 방울 뿌려주시면, 원하시는 약초를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아르엘의 설명에 나는 살짝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엘 님. 아까 생명의 샘이라고 하셨는데. 이 샘물이 도대체 뭐길래…….”
“세진 님. 생명의 샘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닿으면 설명해 드릴게요. 지금은 그 샘물을 가지고 도움이 필요한 분들에게 사용하세요.”
나는 궁금한 것이 너무 많았지만, 아르엘에게는 아무것도 들을 수 없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 피곤한 모습에 아르엘, 그런 엄마를 걱정하는 이엘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임진혁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바로 2층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까 덮어놓았던 아르키트 이론서와 공책을 꺼내 들고 처음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앞부분은 며칠 동안 노력한 결과로 쉽게 읽어나갔다.
-사락. 사락.
조용한 방안에는 책장을 넘기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안정된 집중력으로 책을 읽다 보니 어느새 마의 구간,
90% 지점에 도달했다.
오늘 아침만 하더라도 이 지옥 같은 구간이 머리를 복잡하고 어지럽게 만들었지만.
아까 생명의 샘을 만지고 난 뒤부터는 이 난해한 부분이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책에 쓰인 한 줄 한 줄을 읽어나갔다.
“으음.”
어려운 부분에 막혀 잠시 침음이 흘러나오고.
[집중 유지에 실패하셨습니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의 습득이 중단됩니다.]
[최종 진행률 92%]
마지막 순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끝까지 책을 읽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며칠 동안 전혀 넘을 수 없었던 마의 90% 구간을 결국 돌파해냈다.
지금은 비록 진행률 100%에 실패했어도.
벽에 막혀 있던 이전과는 달리, 조금만 더 노력하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 습득이 눈 앞에 있는데도.
이전에 초급 이론서를 익혔을 때처럼, 크게 기쁘다거나 엄청난 성취감이 생겨나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가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명의 샘’, ‘아스타나 약초’, ‘병원의 아주머니’ 그리고 ‘골렘의 핵’까지.
마치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이 모든 상황을 정리할 방법에 대해서,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고민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