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31화
45. 생명의 샘(1)
[집중 유지에 실패하셨습니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의 습득이 중단됩니다.]
[최종 진행률 89%]
“으아아악!!”
나는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고 이론서를 집어 던질뻔했다.
정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그 분노를 꾹 참아냈다.
몇 번째 시도인지도 모를 정도로 계속 책을 읽었지만, 아직도 이 이론서를 끝까지 읽어내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 책만 읽는 일이 쉽게 보일 수 있어도.
극도의 집중력을 유지하고 머리가 띵해질 것 같은 책 내용을 읽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지.’
지금 당장에라도 자리를 박차고 약초밭으로 나가 밭일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의 진행률 90%
얼마 전까지 진행률이 지속해서 상승하다가 딱 90%를 넘지 못하고 계속 좌절을 맛보고 있었다.
베른하르와 약속했던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마음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를 빨리 익혀내야 ‘골렘 제작 이론서’를 시작할 수 있는데.
90% 벽에 단단히 가로막혀 나아가질 못하는 상황.
지금 당장 ‘골렘 제작 이론서’를 익혀도 골렘 핵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라 초조한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
잠시 눈을 감고.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양손으로 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흥분했던 마음과 복잡해진 머리를 가다듬으려 하고 있을 때.
-똑. 똑. 똑.
-세진아! 점심 같이 안 먹을래?
밖에서 임진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민해진 탓인지 방해받은 것 같은 기분에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감정 상태를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일이 안 풀린다고 애꿎은 형한테 짜증을 내다니.’
속으로 짧게 반성을 하며 임진혁에게 대답했다.
“금방 나갈게요.”
-알았어. 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내 대답에 임진혁의 발걸음이 멀어지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를 정리했다.
정리할 것이라고 해봤자 아르키트 이론서와 공책, 간단한 필기도구 정도.
금방 정리를 끝내고 방을 나와 1층으로 향했다.
거실에는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선우가 TV를 보며 놀고 있었고, 부엌에서는 아저씨와 임진혁이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 세진이 내려왔냐?”
“네. 아저씨. 죄송해요. 밭일에 못 나가서.”
“괜찮아. 땅 주인은 쉬고 일은 소작농이 해야지.”
아저씨의 농담이 섞인 말에 나는 슬쩍 미소를 지었다.
“쯧쯧. 말하는 본새 보게.”
“어느 정도는 맞잖습니까. 어르신.”
“그래. 하는 일은 잘 되고?”
식탁에 앉아 있던 어르신은 평소처럼 아저씨를 한번 구박하고, 나에게 하는 일에 대해 툭 질문을 던졌다.
“하하. 생각만큼은 잘 안 되네요.”
나는 뒷머리를 긁으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너무 조급하게 할 필요 없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노력하면 다 되는 법이다.”
감정이 드러나지 않은 무덤덤한 어르신의 말이었어도, 그 안에서 은근히 따스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할게요.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의 위로에 복잡했던 마음이 살짝 풀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늘 아윤이는 안 왔나 보네요?”
“어. 오늘 약속이 있다고 안 왔어.”
어르신과 함께 식탁에 앉아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에 누군가의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세진아. 식탁 위에 내 휴대폰 좀 봐줄래?”
아저씨의 부탁을 받아 식탁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예쁜 딸’이라는 글자가 표시되고 있었다.
“이윤이한테서 전화 왔어요.”
“줘봐 봐.”
아저씨는 나에게서 휴대폰을 건네받아 통화를 연결했다.
“우리 딸. 왜 전화했어?”
-…….
“뭐? 지금 어디야?
-…….
“알았어. 금방 갈게.”
통화 내용은 못 들었어도, 급격하게 굳어지는 아저씨의 표정을 통해 짧지만 뭔가 심각한 대화가 오고 갔음을 알 수 있었다.
아저씨는 통화를 끊고, 잠시 말없이 안절부절못한 모습을 보이다가 거실의 선우를 큰 소리로 불렀다.
“선우야! 지금 당장 나갈 준비 해라!”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집사람이 지금 쓰러져서 병원이란다.”
“네?!”
“…….”
“흐음.”
웃음기가 싹 사라진 아저씨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고, 임진혁은 침묵을, 어르신은 짧게 침음을 흘렸다.
“집사람은 지금 병원이고, 아윤이가 먼저 연락을 받아 가는 중이래. 나도 선우랑 바로 가봐야 할 것 같다.”
“저도 갈게요. 아저씨.”
내 말에 아저씨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은 걱정하지 말아라. 나랑 진혁이가 잘 보고 있을 테니까.”
“그래. 다녀와 세진아.”
어르신과 임진혁의 말에 나는 눈빛으로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집에서 입던 편한 옷에 위에 겉옷만 대충 걸치고.
바로 아저씨, 선우와 함께 균열 밖으로 나섰다.
* * *
빠르게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아윤이가 보내준 메시지를 확인하고 병실을 찾아갔다.
5층의 복도 안쪽 4인실 병실에서
창가 쪽 침대에 누워 있는 아주머니와 그 옆에 앉아 있는 아윤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당신 괜찮아?”
“으응. 괜찮아. 어머, 세진이도 왔어?”
“네. 아주머니.”
“아유. 별일도 아닌데 당신은 뭐하러 세진이도 데리고 왔어요.”
아주머니는 나를 발견하고 살짝 민망한 듯 아저씨를 타박했다.
하지만 평소와 다름없는 말과 행동과는 다르게, 파리해진 안색과 살짝 떨리는 목소리에서 아주머니의 상태를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검사는 해 봤어?”
“응. 지금은 괜찮데. 나는 입원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의사 선생님이 며칠 입원해서 상황을 지켜보자고 하시네.”
아주머니는 계속 별일 아니라는 말투로 말했지만, 아저씨와 남매의 굳은 표정은 펴질 줄 몰랐다.
“서미정 환자 배우자분 되시죠?”
“네. 맞습니다.”
“잠깐만…….”
간호사 한 명이 아저씨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죄송해요. 아주머니. 급하게 온다고 뭐, 아무것도 못 사 왔네요.”
“우리 사이에 무슨. 됐어. 이렇게 와준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데.”
“맞아요. 오빠. 정말 고마워요.”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내 휴대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확인을 해보니 아저씨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세진아. 다른 가족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말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나와라.
나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잠시 멈칫했다.
이내 곧 평정을 되찾고 아무렇지 않은 듯 아주머니와 남매에게 말했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 핑계를 대고 나는 병실을 빠져나와 아저씨가 말한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아저씨. 무슨 일이에요?”
“일단 나랑 같이 가자.”
아저씨는 내 물음에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2층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2층의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그곳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우리는 한 의사의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오셨습니까? 앉으세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생님.”
방안의 의사와 아저씨는 이미 아는 사이였는지 짧게 인사를 나눴다.
나는 굉장히 이 자리가 어색했지만, 일단 아저씨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의사는 내 쪽을 슬쩍 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이쪽 분은……?”
“괜찮습니다. 선생님. 우리 가족에게 굉장히 중요한 친구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아저씨의 뭔가 확신에 찬 말에 의사는 쉽게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나는 아저씨의 말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감동과 함께, 엄청난 부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의사는 컴퓨터 화면에 표시된 차트를 진지한 표정으로 확인하더니, 쓰고 있던 안경을 벗어 한동안 만지작거렸다.
의사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옆에 있던 아저씨의 표정은 점점 초조하게 변했고, 나 역시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안경을 만지작거리던 의사는 다시 안경을 쓰고 무거운 눈빛과 함께 입을 뗐다.
“서미정 환자가 이전에 쓰러졌을 때 저랑 나눴던 이야기 기억하고 계십니까?”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안정을 취하면 상태가 크게 나빠지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만…….”
“……?”
“이제는 그런 말씀을 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선생님?”
불안함과 절박함이 뒤섞인 아저씨의 질문에 의사는 꿋꿋하게 대답을 이어나갔다.
“서미정 환자분의 상태는 이제 쉽사리 판단할 수 없습니다.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더 나빠진다는 말씀은?”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는 최대한 담담하게 이야기를 꺼냈지만, 나와 아저씨가 받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선생님. 오늘 아침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이럴 수가 있습니까?”
“보호자분께서도 아시겠지만, 이 병에 대해서는 저도 명확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학계에 보고된 자료와 경험을 통해 지금 상태를 판단해드릴 뿐입니다.”
무책임하다고 느껴질 만한 의사에 말에 아저씨는 다시 한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충격에 아저씨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내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더 큰 병원으로 가면 방법이 있을까요?”
“다른 병원으로 가신다면 제가 말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아마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게 되실 겁니다.”
“…….”
“일단 며칠 동안 입원하셔서 상황을 보자고 환자분께 말씀드렸는데. 지금 병원에서 해드릴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으니, 상태가 조금 호전되시면 내일이라도 퇴원하셔도 됩니다.”
“아무 방법이 없다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한에서는 딱히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
참담한 의사의 표정에 나 역시 말을 잃어버렸다.
잠시 후, 의사의 방을 나온 아저씨는 복도의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형. 화장실 간 거 아니에요?
선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어렵게 아저씨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꺼냈다.
“아저씨. 아주머니랑 아이들이 기다려요. 일단 올라가죠.”
“……알았다.”
“…….”
“미안하다. 세진아.”
“…….”
평소와 다른 아저씨의 모습에 나는 섣불리 위로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나와 아저씨는 1층 매점에 들러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사 병실로 돌아갔다.
“오빠. 어디 갔다가 이제 돌아와요?”
“아. 화장실에 있다가, 아저씨를 만나서 잠시 매점에 들렀다 왔어.”
나와 아저씨는 매점 핑계를 대며 사 온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풀어놓았다.
우리는 음료수와 간식을 먹으며 평소와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머니의 상태가 점점 좋아지는 모습에 남매의 굳어 있던 표정은 조금씩 평소처럼 변해갔지만, 아저씨의 굳은 표정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나도 최대한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억지로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고 있을 때.
“…….”
“…….”
아주머니와 정면으로 눈이 딱하고 마주쳤다.
속마음을 읽힐 것 같아 허둥지둥하고 있는데.
-싱긋.
아주머니는 그런 내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이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아…….’
나는 아주머니의 미소에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울컥 올라와 가슴이 답답해졌다.
“형. 왜 그래요?”
“으응?”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아아. 목이 좀 말라서.”
나는 변명과 함께 음료수 캔을 들어 허겁지겁 마셨다.
“컥. 크헉.‘
급하게 음료수를 마시던 나는 사레가 들려 기침을 토해냈다.
”오빠.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천천히 좀 마시지.“
아윤이는 걱정스러운 말과 함께 나에게 물티슈를 건네줬다.
나는 그 물티슈를 받아 빨개진 얼굴과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하지만 아무리 얼굴을 닦아내도, 마음속에 쌓인 끈적하고 무거운 감정은 닦아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