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26화
43. 데뷔(2)
제과 회사로부터 곡을 의뢰받은 작곡가 ‘박태민’은 기분이 굉장히 좋지 못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경력도 꽤 화려하고.
업계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고 존중받을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최근에 그에게 일어난 일은 굴욕의 연속이었다.
처음 의뢰를 받을 때만 해도 평소에 들어오던 의뢰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좋은 조건으로 제시를 받아 살짝 기분이 좋은 상황이었다.
노래 작사, 작곡은 회사에서 원하는 분위기와 컨셉에 맞춰 일사천리로 완성했다.
업계의 잔뼈가 굵은 박태민에게는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문제는 이 노래를 부를 가수 선정 과정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로듀싱까지 맡기로 되어 있던 박태민은 자신의 노래에 어울릴 만한 여자 아이돌 그룹을 추천했다.
비쥬얼은 물론 실력까지 겸비한, 최근에 인기를 얻고 있는 신인 아이돌 그룹이었는데.
그쪽 소속사와 사장과 인맥이 있어서, 약간의 사심이 들어간 추천이긴 했다.
물론 광고 제작의 모든 결정권은 광고를 의뢰한 의뢰주에게 있기 때문에 말 그대로 추천일 뿐이었다.
그래도 본인의 입지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고려는 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추천은 바로 거절당했다.
아니.
처음부터 가수 선정과정은 보여주기식이었고, 모든 것은 내정되어 있던 것처럼 후루룩 진행되었다.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했어도,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나는 할 일만 하고, 돈만 받으면 된다.’
하지만 자신이 작곡한 노래를 부를 사람이 누구인지 전해 듣고 나서부터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느 너튜브 채널에 나오는 아이들이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는 소식에 박태민은 어이가 없어졌다.
가수도 아니고 그냥 너튜브 영상에 출현하는 일반인이라니.
박태민은 당연히 어느 정도 실력이 있는 가수가 자신의 곡을 맡아 부를 줄 알았다.
광고에 쓰일 노래였으나, 처음 곡을 의뢰받았을 때부터 CM송이 아닌 완전한 하나의 곡을 의뢰받았기 때문이다.
그냥 일반인이 부를 줄 알았다면 이런 식으로 의뢰를 받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회사의 결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약은 계약이고 일은 일이었다.
돈을 받고 일을 맡은 이상 자신은 을의 입장에서 갑의 요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좋은 조건으로 계약했다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고 일을 진행하려는데.
또다시 어이없는 일이 발생했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작곡가님 입장은 저도 이해합니다만. 위쪽에서 그렇게 하라고 결정이 나서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박태민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곡 녹음을 숲에서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그렇게 준비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그는 순간 누군가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재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돈이 없어서 녹음실에 못 가는 것도 아닌데.
야외 녹음을 그것도 숲에서 녹음해야 하는 상황.
물론 곡의 분위기나 컨셉이 숲과 어울리는 부분이 있기는 했지만.
‘도대체 어떤 머저리가 노래에 숲 분위기가 난다고, 숲에서 녹음하냐고!!’
그는 당장 계약을 엎어버리고, 다른 프로듀서를 찾으라고 하려다 꾹 참았다.
그리고 반쯤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회사에서 원하는 대로 녹음을 진행하기로 했다.
곡의 완성도는 현저하게 떨어지더라도.
애초에 이런 요구사항이라면 어떤 결과물이 나와도 자신에게 책임이 돌아올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대충 해치우고 돈이나 챙기자.’
* * *
약속된 녹음 날.
박태민은 자신을 도와줄 엔지니어와 장비를 챙기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박태민 작곡가님?”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평범한 느낌의 남성이 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아. 혹시 전세진 씨?”
“네. 맞습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박태민은 전세진과 약간 심드렁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눴다.
딱히 악감정을 가지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호감이 생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를 따라온 엔지니어와도 인사를 나누고.
“작곡가님. 그럼 바로 가실까요?”
“저기. 차량으로 이동하는 거 아닙니까? 오늘 녹음을 숲에서 한다고 들었는데.”
“맞습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냥 따라오라는 전세진의 말에 박태민과 엔지니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 그들은 장비와 짐을 챙겨 그의 뒤를 따랐다.
사람의 인적이 없는 골목으로 들어간 전세진은 아무것도 없는 벽면에 갑자기 뭔가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헉?!”
“으헛!”
눈앞에 생겨난 균열 입구에 박태민과 엔지니어는 놀라 짧게 헛바람 소리를 냈다.
전세진은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은 모양인지, 편안한 미소로 그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들어가시죠.”
“어어…… 위험한 건 아니죠?”
“물론이죠. 제가 먼저 들어갈 테니 따라 들어오시면 됩니다.”
따라 들어오라는 말을 남기고 전세진은 훌쩍 균열 입구를 통과해 버렸다.
남은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의 뒤를 따라 차례로 균열 입구를 통과했다.
입구를 넘어서 눈 앞에 펼쳐지는 전혀 풍경.
두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그 풍경을 둘러봤다.
전세진은 이마저도 익숙하다는 듯 잠시 그들이 제정신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여유롭게 기다렸다.
“저쪽으로 가시죠.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도착한 곳은 어느 숲속의 조그마한 공터였다.
그리고 오늘 노래를 부를 두 아이들과 만날 수 있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의 작은 공주님과 수줍은 듯 인사를 건네는 엘프 소녀.
‘……엘프?’
박태민과 엔지니어는 눈앞에 귀여운 엘프를 보며 두 눈을 크게 끔뻑거렸다.
“저…… 엘프 맞죠?”
“아! 이야기 못 들으셨나요?”
너튜브 채널 주소를 받긴 했었는데.
그때는 어이없는 요구로 불쾌하기도 했었고, 관심이 생기지 않아 받아본 채널 주소를 열어보지 않았다.
박태민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전세진은 아이들의 소개를 시작했다.
“여기 공주님이 티아, 여기 엘프 소녀는 이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그러니까……. 으음, 노래를 가르쳐 주실 노래 선생님이야.”
“노래 선생님?”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
오늘따라 노래 선생님이라는 소개가 굉장히 어색했다.
그래도 기대감 가득한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니, 그렇게 나쁜 기분만은 아니었다.
“흠흠.”
아이들의 귀여운 인사에.
자신도 모르게 굳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며, 그는 본격적으로 녹음 준비를 시작했다.
엔지니어와 함께 장비를 준비하고 사전 음향 점검을 했다.
다행히 숲속에는 울창한 나무 덕분인지 바람이 불지 않았고, 잡음도 거의 들리지 않았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녹음 상태에 박태민은 곧바로 노래 녹음에 돌입했다.
아이들에게 먼저 가이드 녹음을 들려주고 어떤 부분에 어떤 느낌을 살려야 할지 설명하는데.
한가지 문제가 생겨났다.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나도.”
아이들의 국어 실력이 좋지 못했다.
특히 이엘이라는 엘프는 발음도 약간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보통 자신이 프로듀싱을 할 때, 가수가 이런 식으로 가사 숙지를 미흡하게 해온다면 바로 냉정하게 지적하면서 혼을 내지만.
“죄송해요. 제가 아직 한글을 잘 몰라서.”
귀를 축 늘어뜨리고 어쩔 줄 모르는 이엘의 모습을 보고 박태민은 절대 화를 낼 수 없었다.
오히려 옆에 있던 전세진에게 도움을 청하며 이엘이 의기소침하지 않도록 계속 기운을 북돋아 줬다.
이런 박태민 배려와 그의 지시를 열심히 따른 아이들의 노력 덕분에 어느 정도 멜로디와 가사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선생님. 저 이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도!”
자신감을 얻은 아이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박태민은 다시 처음부터 녹음을 시작하려 했다.
“저 잠시만요.”
“……?”
이엘은 옆에 떨어져 있는 나무에 다가가 뭔가를 속삭였다.
그러자.
-후우우웅!
“어……?”
박태민은 갑자기 주변 숲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정확히 무엇이 변했다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분명 뭔가 달라졌다.
“선생님. 우리 준비 끝났어.”
티아의 외침에 박태민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녹음을 재개했다.
그리고 아이들은 들려오는 노래 선율에 맞춰 침착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티아의 강한 목소리와 이엘의 부드럽고 은은한 목소리가 절묘하게 화음을 이루고.
마치 숲의 기운이 두 아이의 목소리를 떠받드는 것처럼, 노랫소리가 기분 좋게 퍼져나갔다.
박태민은 중간에 끊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아이들의 노래를 감상했다.
발랄하면서 힘찬 티아의 목소리, 수줍으면서도 풋풋함이 느껴지는 이엘의 목소리.
그리고 들리지는 않지만 느껴지는 숲의 소리까지 어울려 환상의 하모니를 이뤘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귀를 통해서 숲의 상쾌함과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신기한 경험.
그와 동시에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목소리와 숲의 싱그러움을 모두 담기에, 자신이 만들어온 곡의 부족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내가 완벽한 곡을 써왔다면.’
아이들은 완벽하게 곡을 소화해 내면서도 여유가 남아 있었다.
노래의 깊이를 끌어내는 것이 가수의 실력이듯.
가수의 깊이를 끌어내는 것은 프로듀서의 실력이었다.
박태민은 눈앞 아이들의 깊이를 확인하면서도, 자신이 작곡한 노래가 부족해 그 깊이를 끌어낼 수 없음이 너무 안타깝고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그 안타까움은 자연스럽게 욕심으로 변해갔다.
‘저 아이들이 모든 것을 쏟아낼 수 있도록, 더 완벽한 노래를 만들어주고 싶다.’
계약이나 금전적인 욕심이 아니었다.
순수하게 음악을 하는 작곡가로서, 프로듀서로서 욕심이었다.
한 번의 끊어짐 없이 아이들의 노래가 끝이 나고.
-짝. 짝. 짝.
박태민은 감격한 표정으로 진심을 담아 박수를 쳤다.
자신이 예상한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준 아이들의 대한 찬사였다.
그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티아와 이엘은 배시시 웃으며, 옆에 있던 전세진에게로 달려갔다.
“세진. 세진. 우리 노래 어땠어?”
“아저씨. 노래 안 이상했어요?”
“너무 잘 불렀어. 최고야. 최고!”
전세진이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칭찬해 주자, 아이들은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했다.
“세진 씨.”
“아, 선생님. 정말 좋은 노래였습니다.”
“아닙니다. 이 아이들이 대단한 거죠. 그런 의미에서…….”
“……?”
“티아와 이엘. 저한테 맡겨보시지 않겠습니까?”
“예?”
박태민은 전세진의 손을 꽉 잡으며, 열정적으로 두 눈을 불태웠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전세진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이엘과 티아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