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25화 (125/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25화

43. 데뷔(1)

“…….”

-사락…… 사락…….

조용한 방안에 울려 퍼지는 책장 넘기는 소리.

나는 눈앞에 놓인 책에 마치 빨려 들어갈 것처럼 상체를 숙이고 두 눈에 힘을 줘 글자를 읽어 내려갔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은 시큰거렸지만.

어지러운 글자들을 두 눈으로 집요하게 쫓으며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에만 집중했다.

-사락…….

다시 또 넘어가는 책장.

그리고 이어지는 어려운 내용에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으로 변해버렸다.

“……흐윽.”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신음.

[집중 유지에 실패하셨습니다.]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의 습득이 중단됩니다.]

[최종 진행률 37%]

아주 잠깐 이론서의 내용을 따라가지 못했을 뿐인데.

가차 없이 실패했다는 알람이 떠올랐다.

“으아아아악!”

분노, 고통, 좌절, 슬픔.

이 모든 감정이 뒤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조금 고생하게 했던 후유증 증상이 완화되고.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의 습득을 시작한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처음에는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했지만, 지금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답답한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아오. 진짜. 왜 이렇게 어려운 거야.”

예전에 처음 아르키트 회로 이론서를 얻었을 때도 이렇게 고생을 했지만.

지금과는 조금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정말 아는 게 별로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도전했기 때문에 힘들었다면.

지금은 알고 있는 것은 많아졌는데, 도통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것을 모두 부정하는 궤변을 보고 있는 심정이었다.

예전처럼 신지아에게 물어볼 시간이라도 많았으면 도움이 많이 됐을지도 몰랐겠지만.

그녀는 요즘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섣불리 먼저 연락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어떻게든 혼자 헤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책상 위의 펼쳐진 아르키트 이론서를 덮고, 옆쪽 책장에 꽂혀 있는 ‘골렘 제작 이론서’로 눈길을 돌렸다.

‘시간 내에 모두 익힐 수 있을까?’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를 익혀야지만 골렘 제작 이론서를 익힐 수 있다.

베른하르와 약속했던 시간이 이제 절반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마음이 점점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와 약속했던 골렘 핵에 관한 실마리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기에.

지금 시도해 볼 수 있는 일은 모두 시도해 봐야 했다.

물끄러미 이론서를 응시하던 나는 다시 책장을 펼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상 옆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시간을 확인해서인지, 아니면 도망칠 구실이 필요했던 것인지. 갑자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책상을 대충 정리하고 방문을 열어 밖으로 향했다.

2층 계단을 내려와 1층으로 향하니, 거실에서 신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에 뒤풀이 때 아저씨가 놓고 간 노래방 기계를 가지고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퓨이. 퓨우퓨우! 퓨!”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꼬리로 야무지게 마이크를 잡고 열창을 하는 퓨이.

아마 퓨이가 세상에서 가장 노래를 잘 부르는 슬라임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유의 울음소리에 노래의 음정과 박자를 정확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허허. 우리 애들은 누굴 닮아서 이렇게 노래를 잘 부르는지 모르겠네.’

아이들을 모아서 아이돌 그룹을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허무맹랑한 상상을 하는 와중에 퓨이의 노래가 끝이 났다.

[빰빠밤 빰.빰.빰!]

[가수에 소질이 있군요. 92점!]

“와아! 퓨이가 92점 받았어.”

“퓨이! 퓨이!”

티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치자 퓨이도 기쁜 듯 몸을 통통 튕겼다.

옆에 있던 이엘과 모렛도 축하의 박수를 쳐줬다.

그리고 그 옆에서 임진혁도 함께하고 있었다.

“퓨이. 대단하네.”

“퓨이! 퓨이!”

나도 퓨이에게 다가가 감탄을 하니, 퓨이는 마치 나에게 자랑하듯 점수가 표시된 화면을 가리켰다.

“그래. 잘했어. 잘했어.”

“퓨이!”

나는 끌어안고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퓨이가 만족할 만큼 칭찬해 주었다.

“세진아. 위에서 하던 일은 다 끝났어?”

“끝난 건 아니고. 점심을 아직 안 먹어서 머리도 식힐 겸 내려왔어요.”

“기다리고 있어 봐. 점심 챙겨줄게.”

“괜찮아요. 제가 챙겨 먹으면 되는데…….”

“잠시 아이들이랑 놀고 있어. 최근에 계속 방안에만 틀어박혀서 아이들이 계속 너 보고 싶다고 했거든.”

임진혁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아이들이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며칠 동안 임진혁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이론서에만 몰두하다 보니 아이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미안해요. 형.”

임진혁은 피식 웃더니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애들아. 뭐 하고 놀까?”

“같이 노래 불러요!”

“카드 게임. 카드 게임하자!”

“퓨이. 퓨이.”

“후모!”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아이들은 나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어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말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내가 이론서에 집중하는 동안, 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꾹 참고 있었던 아이들이 대견스러우면서 너무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난처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이들과 함께 있으니 조금 전까지 머리를 어지럽히던 생각들이 모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

달라붙은 아이들을 달래고 있을 때.

휴대폰에서 메시지 착신음이 울렸다.

“애들아. 잠깐만.”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확인해 보니 오연우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였다.

별다른 생각 없이 확인한 문자 메시지는 짧은 두 문장만 적혀 있었다.

-형. 저 사고 쳤는데.

-어떻게 하죠?

“……??”

* * *

임진혁이 챙겨준 점심을 먹고,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 준 후.

오연우가 집에 도착했다.

“인사해. 여긴 임진혁 형이고. 잠시 나랑 같이 살게 됐어. 이쪽은 나랑 너튜브 일 같이하는 동생. 오연우예요.”

“아. 안녕하세요.”

“반가워.”

오늘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어색하게 인사를 나눴다.

임진혁의 위압적인 모습에 약간 기가 눌렸는지 슬금슬금 내 옆으로 다가와 눈치를 봤다.

“긴장 안 해도 돼. 이렇게 보여도 좋은 형이니까.”

“하하하하!”

“…….”

꽤 직설적인 내 설명에 임진혁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고, 오연우는 오히려 더 긴장한 표정을 했다.

임진혁은 둘이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라고 자리를 비켜줬고, 나와 오연우는 단둘이 거실에 앉았다.

“그래서. 갑자기 무슨 사고?”

“으음. 형 저번에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광고 찍었던 거 기억나세요?”

“기억나지.”

유명 제과 회사에서 찍었던 짧은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광고.

그때 광고 대신 티아의 콧노래 영상이 엄청 화제가 되어서, 광고 대신 그 콧노래 영상이 더 매출에 영향을 줬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 덕분에 광고비도 넉넉하게 받고, 제과 회사의 높으신 분에게 직접 감사 인사도 들었었지.’

나는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훈훈한 표정을 지었다.

“그쪽 회사에서 다시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 신제품 광고를 준비 중인데, 우리 채널에 광고 제의가 들어왔거든요.”

“응? 그럼 좋은 일 아냐?”

“예. 좋은 일이긴 한데. 형이 한동안 집중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하셔서 웬만한 일은 다 거절하라고 하셨잖아요.”

“얼마 전에 내가 그렇게 말했었지.”

채널 규모가 커지다 보니 이런저런 광고 제의나 협찬이 많이 들어오게 됐다.

그런데 최근에 내가 이론서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서, 웬만한 제의는 정중하게 거절해 달라고 오연우에게 부탁해놓은 상황이었다.

“근데 제가 실수로 광고 제의를 받아버린 것 같아요.”

“……?”

내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오연우는 가방 속에서 서류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제과 회사에서 보내온 광고의 계약 내용과 기획 설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부분이 있었는데.

“연우아. 이거. 숫자 잘못 쓰인 거 아니냐?”

“…….”

“……?”

“그거 맞아요. 제대로 표기된 거예요.”

나는 다시 한번 서류에 적힌 계약금 부분의 숫자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리 봐도 평소에 내가 자주 보던 숫자보다 훨씬 많은 0이 붙어 있는 상황.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그 뒤에 이어진 오연우의 설명은 이러했다.

제과 회사에서 저번과는 다르게 우리 채널 단독 광고 출현을 요청했고, 꽤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제시했다고 한다.

조건은 오연우의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웬만한 제의는 거절하라고 했던 내 지시 때문에 아까웠지만 정중하게 거절 답장을 보냈는데.

저쪽 제가 회사에서 끈질기게 계약을 요구해 왔고, 심지어 더 좋은 조건으로 다시 제의하기도 했단다.

끈질긴 광고 제의에 계속 거절하기 힘들었던 오연우는 상대가 거절할 수밖에 없을 만큼 높은 계약금을 제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대로 계약 협상은 끝날 줄 알았는데…….

“저쪽에서 이 금액을 받아들였다고?”

“네…….”

“아니. 그냥 바빠서 못 한다고 하면 되는걸.”

“당연히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변명했죠. 근데 신제품 출시를 늦춰서라도 기다리겠다는데 어떻게 해요.”

억울하다는 듯 소심하게 대답하는 오연우의 모습에 나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솔직히 이 정도 계약 조건이면 우리로서는 환영할 수밖에 없는 조건이긴 했다.

나는 일단 다시 한번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류에는 구체적인 광고 기획도 나와 있었는데, 이번에는 티아를 데리고 아예 광고 노래를 만들 계획인 것 같았다.

저번 티아 콧노래 영상이 의외의 대박이 나서 얻었던 효과가 회사 입장에서는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광고에 쓰일 노래 작곡가 섭외도 이미 끝나 있고, 계약 협의만 끝나면 바로 촬영에 들어갈 수 있게 준비된 상태였다.

“와. 저쪽도 단단히 마음먹었나 보네.”

“그쪽 담당자분이랑 이야기해 보니까, 위쪽에서 다이렉트로 지시가 내려왔다고 하더라고요.”

“잠깐. 티아 뿐만 아니라 이엘도 출현해야 해?”

“네. 그쪽에서 티아랑 이엘 두 명이 같이 광고에 출현했으면 좋겠다고.”

“흐음.”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면서 얼굴을 굳혔다.

‘촬영 장소를 여기 호숫가랑 숲으로 하고 싶다고? 거기다 노래 녹음은 스튜디오에서 해야 하고.’

회사에서 제안한 기획 중에는 쉽게 수락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거기다 이엘을 출현시키려면 먼저 보호자인 아르엘의 동의부터 필요할 것 같았다.

“이거 지금 와서 거절하겠다고 하기는 힘들겠지?”

“그건 좀…….”

저런 말도 안 되는 계약금까지 받아줬는데, 인제 와서 못 하겠다고 거절하기에는 너무 염치없는 행동인 것 같았다.

거기다 계약 조항에 다음 광고 모델 연장 조항도 있는 걸 보면, 그쪽 회사에서 얼마나 우리를 원하는지 절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아. 어쩔 수 없지.”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오연우는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슬쩍 미소를 지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