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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124화 (124/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24화

42. 뒤풀이

“어허! 거기 똑바로 정리 안 해? 이제 일 시작하는 놈보다 못하면 어쩌자는 거야!”

오늘도 이준석 어르신의 호통을 듣는 정대훈 아저씨.

“이 정도면 잘 정리한 거죠.”

“이놈이. 내가 꼭 일어나야겠어?”

“아아. 알겠습니다, 어르신. 다시 하겠습니다.”

아직도 아저씨의 밭일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어르신은 계속 언짢은 얼굴로 예의주시했다.

그러다 옆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어르신의 얼굴이 다시 편안해졌다.

“음, 잘하고 있네.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꼼꼼하게 잘하는구먼.”

어르신은 아저씨 근처에서 같이 밭일을 하고 있던 임진혁을 바라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밭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확실히 능숙하게 약초들을 돌보고 있었다.

아저씨는 그 모습을 보고 괜히 심술이 난 표정으로 외쳤다.

“야. 진혁아. 너 저쪽으로 가서 일해.”

“……?”

“네가 일을 너무 잘해서 계속 내가 비교당하잖아. 저리로 가.”

첫째 딸이 이제 대학생인 아저씨의 철없는 투정에 임진혁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근처에 일하던 선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본 어르신.

“아니. 일 잘하고 있는 사람을 왜 가라, 마라야!”

“어르신이 계속 못 한다고 구박하니까 일할 맛이 안 나니까 그러죠. 가끔은 칭찬도 해주고 그래야 힘이 나는데.”

“아이고. 일을 잘해야 칭찬을 해주지!”

어린아이처럼 투닥거리는 가장 연장자 두 사람을 보며 나는 실소를 지었다.

어르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내 쪽을 힐끔 쳐다봤다.

“너는 몸이 아프면 들어가서 쉴 것이지. 뭣 하러 여기 나왔어.”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많이 아픈 것도 아니고.”

나는 괜찮다는 듯 어르신께 웃어 보였다.

거대 골렘과 홀로 전투를 벌이면서 생긴 후유증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서, 나도 어르신과 함께 밭일을 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마정석의 마력을 직접 몸으로 받아 낸 것이 몸 내부에 무리를 줬던 것 같다.

“쯧쯧. 그냥 밭일이나 열심히 할 것이지. 무슨 좋은 꼴을 보겠다고 거기를 또 들어가누.”

“하하하.”

어르신은 내가 던전에서 다쳐서 돌아온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중얼거리듯 내게 불평했다.

그 불평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냥 웃어버렸다.

그때 멀리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희 왔어요. 잠시 쉬었다가 하세요!”

아이들과 함께 아윤이 새참을 가지고 왔다.

“약초 할아버지!”

“할아버지!”

“퓨이!”

“허허. 어서 오너라.”

어르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아이들을 맞이해 주었다.

아윤을 도와 새참을 꺼내 놓는 사이, 약초밭에서 일하던 세 사람이 땀을 닦으며 평상 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윤.

-호다닥!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나가, 가져온 시원한 물병을 임진혁에게 전했다.

“진혁 오빠. 여기 시원한 물 드세요.”

“어어? 고마워.”

임진혁은 약간 당황하면서 그 물병을 받아들었다.

아저씨와 선우는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윤은 아빠와 동생이 무슨 표정을 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임진혁의 모습만 살폈다.

“허허. 좋을 때구먼.”

어르신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핀테일 던전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고.

나는 원했던 ‘아르키트 회로 중급 이론서’와 더불어 ‘골렘 제작 이론서’도 얻을 수 있었다.

아저씨는 금화로 방패와 무기, 아윤은 화려한 활을, 선우는 정령의 힘이 깃든 지팡이.

마지막으로 서율희는 반지를 구매했다.

나에게 모든 금화를 넘겨줬던 임진혁은 마지막 뽑기 기계에서 운 좋게 ‘영웅 등급 아이템 교환권’을 얻어서 영웅 등급의 장갑을 하나 구할 수 있었다.

중간에 조금 힘들긴 했지만.

크게 다친 사람도 없고, 모두 만족할 만한 아이템도 얻을 수 있어서 무척 성공적인 던전 팀험이었다고 할 만했다.

그리고 던전에서 돌아온 뒤.

임진혁이 통나무 집에서 같이 살게 되었다.

금화를 모두 나에게 넘겨주며 부탁을 하겠다고 했었는데, 그 부탁이 바로 내 집에서 머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그 덕분에 이론서 2개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그 부탁을 수락했다.

그 결과 이렇게 약초밭에 모두 모여 일을 하게 된 것.

새참으로 가져온 두부, 김치.

그리고 막걸리까지 시원하게 넘긴 아저씨가 나를 보며 물었다.

“세진아. 오늘 뒤풀이 있는 거 알지?”

“네.”

“괜히 무리하지 마. 힘들면 힘들다고 하고.”

“이제는 괜찮아요.”

아저씨는 아직도 내 후유증이 걱정되는지 몇 번이고 괜찮은지 물었다.

“어휴. 아빠는 술 마시고 싶어서 세진 오빠한테 계속 괜찮냐고 물어보는 거지?”

“험. 험. 그냥 걱정돼서 그러는 거지. 뭘 또 술 때문에…….”

아윤이 한심한 듯 쳐다보자 아저씨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르신은 그런 아저씨의 모습을 한심한 듯 쳐다봤다.

그 모습에 임진혁이 웃으며 아저씨의 편을 들어줬다.

“세진이는 힘들어도, 제가 섭섭하지 않을 만큼 상대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흐흐. 진혁이가 뭘 좀 아네. 마음에 들어.”

아저씨는 임진혁의 말에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윤은 임진혁 때문에 더는 잔소리를 하지 못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어르신도 저녁에 뒤풀이 같이하시죠.”

“쯧. 젊은 사람들 노는데 나 같은 늙은이가 가서 뭐해. 너희들끼리 알아서 재미있게 놀아. 나는 빨리 임자 얼굴이나 보러 갈 테니까.”

옆에서 조용히 두부 김치를 먹던 선우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세진이 형. 그럼 오늘 율희 누나도 오는 거예요?”

“글쎄. 말은 해 뒀는데…….”

선우의 질문에 나는 대답의 끝을 흐렸다.

서율희도 던전에서 함께 고생했던 일행이니 당연히 뒤풀이에 초대했지만.

워낙 길드의 중요한 직책을 담당하는 사람이었고.

우리를 도와주느라 길드의 일이 밀려 있어 굉장히 바쁜 것 같았다.

-조금 늦더라도 꼭 참석할 수 있도록 해볼게요.

그래도 그녀는 뒤풀이 참석 의지를 보이며 가능하면 꼭 참석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주었다.

“율희 언니도 왔으면 좋겠다. 언니도 고생 많이 했는데.”

“그러게. 같이 던전 들어가 보니까, 생각보다 사람이 참 좋아 보이던데.”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함께 힘겨운 던전을 돌파하면서 그녀와 급격히 친해진 정 씨 가족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나와 임진혁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정 씨 가족과 비슷한 심정이었다.

잠시 이야기가 끊기며 분위기가 약간 처지자 아저씨가 일부러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뭐. 오늘 못 보면. 다음에 또 부르면 되지.”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쪽을 보고 말했다.

“세진아. 가자!”

“……?”

“오늘 같은 날에 그게 빠질 수 있겠어? 얼른 낚시하러 가야지.”

“아아.”

나는 아저씨의 말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집들이할 때 기가 막힌 생선구이 맛을 본 뒤로, 이렇게 같이 모이는 날이면 자연스럽게 호수로 낚시를 하러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순전히 낚시를 좋아하는 아저씨의 영향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들도 은근히 호수 물고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럼 저도 갈까요?”

“오오. 진혁이도 낚시할 줄 알아?”

“잘하지는 못하지만. 친구들 따라서 몇 번 해봤습니다.”

“이 친구 점점 마음에 드는데.”

임진혁도 낚시를 따라나서겠다고 하자, 아저씨는 입꼬리를 귀까지 올리며 즐거운 표정을 했다.

낚시 생각에 들뜬 아저씨가 먼저 앞장섰고, 나도 그 뒤를 따르려는데.

“흠흠.”

“……?”

어르신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헛기침을 했다.

“저번에 우리 임자가 호수 물고기 맛을 보고 참 좋아하더라고. 크흠.”

괜히 아저씨에게는 말을 못 꺼내고, 나에게 슬쩍 부탁하는 어르신의 모습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들이랑 놀고 계세요. 맛있는 녀석으로 몇 마리 잡아다 드릴게요.”

내 대답에 어르신은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내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 * *

어느새 통나무 집 주변이 어둑해졌다.

마당에 설치한 조명을 켜고, 저녁 식사를 위해 갖가지 반찬과 재료들이 테이블 위에 옮겨졌다.

그리고.

-치이이익!

아저씨가 챙겨온 바비큐 그릴이 마당 한가운데에서 맛있는 소리와 냄새를 동시에 내기 시작했다.

두툼한 고기와 소시지, 버섯이 구워지면서 내는 환상적인 향기에,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의 입가에 벌써 침이 고이기 시작했다.

능숙하게 고기를 구우며 소금을 뿌리는 아저씨의 모습이 꽤 그럴듯해 보였다.

다 구워진 고기와 소시지, 버섯들을 아이들도 먹기 좋게 자른 뒤, 테이블 위로 옮겨졌다.

“자! 완성이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아저씨.”

“퓨이!”

“후모!”

아이들의 활기찬 인사와 함께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하하하. 그래. 아직 많이 있으니까. 많이들 먹어라.”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너무 잘 구워진 고기에.

은은하게 숯불 향까지 배어들어서 다른 양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젓가락을 움직이고 있을 때.

내 휴대폰에 메시지 착신음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나는 아저씨와 임진혁에게 아이들을 부탁하고 균열 입구로 나섰다.

균열 입구를 나서 메시지에 적힌 장소로 향하자.

“아. 세진 씨.”

서율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못 오시는 줄 알았어요.”

“최대한 빨리 일 끝내고 바로 나왔어요. 너무 늦은 건 아니죠?”

“아뇨. 딱 맞춰서 왔어요. 손에 든 건 뭐에요?”

“아. 제가 좋아하는 포도주를 가져왔어요. 같이 나눠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

“딱 좋네요. 어서 가죠.”

나는 바로 그녀를 이끌고 집 마당으로 향했다.

마당에 서율희가 모습을 드러내자, 식사를 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어서 와요. 누나.”

“언니 못 오는 줄 알고 얼마나 아쉬웠는데요. 빨리 여기 앉아요.”

“으. 응.”

격렬한 환대에 서율희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조금 기쁜 것처럼 보였다.

“자. 자. 여기 고기 새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기다렸던 생선구이도 다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저씨. 잘 먹을게요.”

“많이 드세요. 조장님.”

그녀가 도착하고 더 즐거워진 분위기에서 식사 시간이 계속되었다.

“으음?! 이 생선구이 정말 맛있네요?”

“오늘 아저씨랑 진혁 형이랑 같이 호수에서 잡아 온 물고기예요.”

처음 호수 물고기 맛을 본 서율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 왠지 뿌듯해지는 기분이었다.

임진혁과 아저씨가 번갈아 가며, 그릴에서 계속 음식을 구워냈고.

먼저 배를 채운 아이들을 집으로 들여보낸 뒤.

서율희가 가져온 포도주를 한, 두 잔씩 곁들이면서 분위기가 점점 달아올랐다.

처음에는 약간 어색해하던 그녀도 술기운 덕분인지 조금씩 편안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준비했던 고기와 음식들을 모조리 비워내고, 만족스러운 저녁 식사를 끝냈을 때는 어느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마당 정리를 끝내고 집으로 들어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자! 빨리 번호 눌러. 예약 빨리 안 하면 노래 못 부른다.”

아저씨가 준비해 온 노래방 기계였다.

어디서 준비해 왔는지 노래방 탬버린과 노래 책자, 리모컨까지 있었다.

아저씨의 신나는 트로트를 시작으로 저마다 노래 실력을 뽐내기 시작했다.

그중 단연 돋보인 것은 던전에서 이미 실력을 보여줬던 임진혁.

작은 몸에서 폭발적인 가창력을 보여주는 티아.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엘이었다.

특히 이엘은 아직은 조금 서투른 한국어 실력으로 최신 음악을 소화해 내는 모습은 신기함을 넘어 대단해 보일 정도였다.

그 외에도 퓨이와 모렛이 함께 마이크를 잡고 어린이 애니메이션 주제가를 함께 부르는 모습은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단순히 음을 따라 부르는 정도였지만 의외로 잘 불러서 또 한 번 놀랐다.

그리고…….

“아니?! 이거 누가 예약했어요?”

“실력 한 번 더 보여줘요. 언니!”

“하하하하.”

서율희 차례에 맞춰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여자 아이돌 노래.

바로 핀테일의 던전에서 그녀가 불렀던 그 노래가 다시 한번 더 흘러나왔다.

마이크를 잡고 당황하는 그녀와 상관없이 전주가 끝나가기 시작했고.

“처음 널 본 순간…….♪”

서율희는 다시 한번 어색하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던전에서 해주지 못했던 뜨거운 호응을 보내주며 그녀를 응원했고, 결국 그녀는 끝까지 완창할 수 있었다.

의외로 그녀는 시키면 뭐든지 열심히 하는 타입인 것 같았다.

우리는 깊은 숲속까지 왁자지껄한 소리가 울릴 정도로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성공적인 던전 클리어를 기념하는 뒤풀이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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