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11화
39. 성덕이 된 그녀(1)
부조장 윤동현의 지시에 따라 일부 인원이 사원 쪽으로 진입해 균열핵을 제거했다.
[균열을 성공적으로 제거했습니다.]
[경험치 4,500 Exp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균열핵을 제거함과 동시에 클리어 알람이 떴고, 거대 골렘이 허물어지듯 땅 위로 쓰러졌다.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녀석치고는 꽤 허무한 결말이었다.
균열을 빠져나가기 위한 출구가 열리고.
조금 휴식을 취해 조금 안정을 되찾은 서율희가 다시 조원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 창백한 낯빛을 하고 있었지만,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조원들을 통솔하는 모습이 무척 대단해 보였다.
조장의 지시에 따라 조원들은 차례로 출구를 통해 균열을 빠져나갔다.
나는 곧바로 거대 골렘 쪽으로 뛰어가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안 그래도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에 단독행동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 꾹 참았다.
균열을 빠져나오기 전에 균열의 소유권 획득만 해놓고, 다른 일행을 따라 균열을 빠져나왔다.
균열 밖에서 마지막으로 인원 점검과 부상자 체크가 이어졌다.
원래라면 성공적인 균열 클리어에 모두 들뜬 분위기여야 했을 텐데.
마지막에 있었던 꺼림칙한 사건 때문에 일행의 분위기는 조금 미묘했다.
나 역시 서율희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돌며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복잡한 내 표정을 본 정 씨 가족은 또 어디가 안 좋은 게 아니냐며 걱정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걱정을 달래주기 위해 한동안 또 애를 먹어야 했다.
마지막 점검이 끝나면서 공식적으로 균열 제거 작업이 완료됐다.
해산 명령과 함께 일행들은 삼삼오오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정 씨 가족과 간단히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오늘 수고하셨어요. 아저씨. 너희들도 수고했어.”
“세진아. 병원 안 가봐도 되겠냐?”
“아이. 괜찮다니까요. 피곤하실 텐데 어서 들어가 보세요.”
“쩝. 알았다.”
“그럼 가볼게요. 오빠.”
“나중에 봐요. 형.”
걱정스러운 얼굴로 차에 올라타는 아저씨와 남매를 배웅하고, 나는 다시 균열로 들어가기 위해 적당한 장소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세진 씨.”
“조장님?”
그때 서율희와 윤동현이 나를 찾아왔다.
“파티원 분들과 같이 안 가시나요?”
“아…… 그게. 저는 따로 볼일이 있어서요.”
정 씨 가족을 찾는 두 사람에게 나는 볼일이 있다는 거짓말로 대충 둘러댔다. 다행히 두 사람도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세진 씨 덕분에 큰 사고를 피했어요. 다시 한번 정말 고맙습니다.”
서율희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고, 한 걸음 뒤에 있던 윤동현도 같이 고개를 숙였다.
나는 정중한 그들의 감사 인사에 굉장히 부담스러워서, 오히려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든 서율희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마치 나에게 한탄하듯 말했다.
“사실 오늘 세진 씨에게 오성 길드 가입 권유를 하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저희가 민폐만 끼친 것 같아서 말도 못 꺼내겠네요.”
“…….”
“그래도 세진 씨가 허락해 주신다면 다음에 한 번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겠는데. 가능할까요?”
최대한 낮은 자세로 부탁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보였다.
솔직히 오성 길드에는 딱히 가입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균열 일행에 참여한 것도, 오로지 골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내가 쉽게 대답을 하지 않자. 한걸음 뒤에 떨어져 있던 윤동현이 지원을 나섰다.
“단순히 가입 권유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도 말씀드릴 게 있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확실한 건 없지만, 저희도 가볍게 넘어갈 생각은 없으니까요.”
“맞아요. 그리고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길드 조장의 권한으로 들어드릴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들어드릴게요.”
약간 절박하게 요청하는 두 사람.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할 생각이었던 나는 두 사람의 이야기에 조금 생각을 바꿨다.
오늘 있었던 찝찝했던 사고도 그렇고, 오성 길드 조장인 그녀에게 부탁할 수 있다는 것은 나중에라도 꽤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거기다 서율희는 나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고 했지만, 사실 나를 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행동한 사람은 오히려 서율희였다.
거대 골렘의 무자비한 공격에도, 먼저 나서며 도망치라고 외치던 그녀의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내 허락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동시에 표정을 밝게 하며 살짝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서로의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최대한 빠르게 일정을 정리해서 만날 약속을 잡기로 했다.
“저기…… 세진 씨.”
“네?”
“이건 정말 제 개인적인 욕심이긴 한데…….”
이제 헤어지려 작별 인사를 하려는 타이밍에 서율희가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그녀는 윤동현은 잠시 멀리 보내고 나에게 바짝 다가서며 속삭였다.
속삭임을 끝낸 서율희는 아까보다 더욱 절박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허헛.”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 * *
서율희와 윤동현과 헤어지고.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균열 입구를 열어 다시 골렘 균열로 되돌아갔다.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과 마찬가지로, 거대 골렘은 거대한 몸을 땅바닥에 붙이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설레는 마음으로 거대 골렘에게 다가가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뭐야?”
거대 골렘의 내부를 살펴본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보고, 나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거대 골렘의 핵은 존재했지만, 가장 중요한 내부 핵의 회로가 모두 파괴된 상태였다.
당황한 나는 거대 골렘이 아닌 창과 방패를 들고 있던 골렘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아까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골렘의 핵이 모두 파괴돼 있었다.
베른하르가 원했던 실마리를 찾을 생각에 부풀어 올랐던 내 기대감은 순식간에 와장창 부서져 내렸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쓰러진 골렘의 팔에 걸터앉아, 이 현상의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분명 균열을 빠져나오기 전까지는 골렘의 핵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가장 빠르게 추측할 수 있는 가설은 딱 한 가지였다.
-균열 핵이 제거되면, 골렘의 핵도 파괴된다.
어렵지 않게 가설을 생각해낸 나는 복잡한 표정으로 누워 있는 거대 골렘을 바라보았다.
‘거대 골렘의 핵을 살펴보고 싶으면, 저 무지막지한 녀석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건가?’
생각보다 훨씬 어려워지는 상황에 나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 * *
이른 새벽.
서율희는 자신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아직 알람도 울리지 않은 이른 새벽이었지만,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화장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살짝 초췌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더없이 밝은 얼굴이었다.
깔끔하게 씻은 그녀는 오랜만에 정성 들여 화장하고, 옷장에서 옷들을 꺼내 무슨 옷을 입을지 고민했다.
저번에 소개팅을 나갔을 때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던 그녀였지만 오늘은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것처럼 심각하게 고민했다.
평소에 부지런히 쇼핑하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하면서.
조금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나마 가장 괜찮은 옷을 하나 골라 입었다.
완벽한 외출 준비를 하느라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도, 아직 약속까지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여유롭게 시계를 확인하고, 휴대폰과 지갑, 핸드백을 챙겨 오피스텔을 나섰다.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탄 그녀는 곧바로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까지 가는 길에 길드장과 부길드장에게서 문자가 날라왔다. 문자를 확인한 그녀의 인상이 조금 찌푸려졌지만, 대충 답장을 하고 운전에 집중했다.
백화점에 도착한 서율희는 매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음에 드는 물건 전부를 사고 싶었지만, 그녀는 스스로 흥분한 자신을 자제시키며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자제한다고 자제했지만, 꽤 많은 선물을 구매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백화점 푸드코트로 향했다.
“어떤 거로 드릴까요?”
“민트 초코 맛으로 많이 넣어주세요.”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선물을 가지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차 트렁크에 꽉 들어찬 선물들을 보며 그녀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많이 샀나?’
고민을 하던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 황급히 운전석에 올라탔다. 생각보다 오래 쇼핑을 한 탓에 약속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급히 백화점을 빠져나온 그녀의 차량은 거침없이 약속 장소로 나아갔다.
서율희는 다행히 약속 시각에 늦지 않게 도착했고, 멀리서 먼저 나와 있던 전세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근처에 차를 주차하고 운전석에서 내려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일찍 나와 계셨네요.”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그럼 갈까요?”
“잠시만요. 차에 선물 좀 꺼낼게요.”
“……?”
서율희는 차 트렁크를 열어 백화점에서 사 온 선물을 한가득 꺼내기 시작했다.
“저…… 이게 다 선물이라고요?”
“네.”
“너무 많이 준비하신 것 같은데…….”
전세진이 놀라다 못해, 약간 질린 표정으로 트렁크에 가득한 선물들을 바라보았다.
서율희는 그런 그의 반응에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오히려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별로 안 많아요.”
“…….”
전세진은 일단 그녀와 함께 선물을 나눠 들고 골목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향하자 서율희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우우우웅.
“들어가시면 돼요.”
“아…….”
막다른 골목 벽에 균열 입구를 만들어내는 전세진의 모습을 보며, 놀라움과 함께 이해한 표정을 지었다.
균열 입구에 발을 들여놓은 그녀는 곧이어 눈 앞에 펼쳐지는 전혀 다른 세상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도시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깨끗한 공기와 고요한 숲속 분위기에 마치 꿈속에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집은 저쪽이에요.”
멍하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전세진의 안내에 따라 멀리 보이는 호수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통나무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너튜브 영상으로 봤던 멋진 통나무 집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자 서율희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솟구쳐올랐다.
“여기가 영상에서 봤던 그곳이군요.”
“네. 그럼 들어갈까요?”
“자, 잠시만요.”
“……?”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현관문을 열려는 전세진을 제지하고 잠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동작을 반복하던 서율희는 결심한 표정으로 전세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긴장한듯한 그녀의 모습에 어색하게 웃은 전세진은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활짝 열린 현관문 너머에는 서율희가 그렇게 바라왔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