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08화
38. 골렘 균열(2)
골렘 균열에 들어온 나는 내부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분위기에 찬찬히 주변을 둘러봤다.
멀리 보이는 눈에 익은 듯한 산맥, 이제는 반가움마저 느껴지는 호수. 평범해 보이는 나무 하나하나까지.
베른하르와 골렘 유적지로 가면서 봤던 광경이 균열 내부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정 씨 가족도 균열 내부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의 친숙한 분위기를 느끼고 신기한 표정을 지었다.
“모두 미리 말씀드린 대로 진형 갖추세요. 오늘 참여하신 두 팀은 긴장해 주세요. 이제는 교육이 아니라 실전입니다.”
조장인 서율희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미리 전달받은 위치로 향했다.
이번 균열에서는 서율희 조장이 이끄는 조원들과 진짜로 한 팀이 된 것처럼 전투를 진행하게 될 예정이었다.
조금 어색하게 주변에 있는 조원들과 눈인사를 나누고, 일행은 본격적으로 균열 내부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 * *
이번 균열의 등급은 C등급 2단계.
정 씨 가족과 함께 교육을 받을 때는, 보통 C등급 1단계였는데. 오늘 진입한 균열은 한 단계 더 어려운 균열이었다.
하지만 1단계 높은 등급이 무색하게 튀어나오는 괴물들은 굉장히 손쉽게 정리되었다.
-크아앙!
-크헝!
숲속에서 튀어나온 괴물 늑대들과 싱거운 전투가 끝나고.
일행은 잠시 장비를 정비할 겸 휴식 시간을 부여받았다.
“오빠. 조금 싱겁다. 그지?”
아윤이도 밋밋한 전투에 약간 김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었다. 나도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고 있을 때. 옆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골렘과 전투가 벌어지지 않아서 그래요. 그 녀석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싱거운 녀석들이 나올 거에요.”
목소리의 주인은 우리와 비슷한 포지션에서 마법을 사용하던 여자 오성 길드원이었다.
“그럼 골렘은 어떤가요?”
“골렘은 훨씬 어려울 거예요. 방어력도 높은 주제에 마법 저항력도 가지고 있어서 잘 안 죽거든요.”
그녀는 아윤의 질문에 이것저것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옆에 있던 나와 선우도 흥미롭게 그 대화를 들었다.
휴식 시간 내내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나누더니, 순식간에 자기소개를 끝내고 말을 편하게 하는 친구 사이가 돼버렸다.
그리고 어느새 나와 선우와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세진 오빠. 오성 길드의 김유미라고 해요. 선우도 안녕! 유미 누나라고 편하게 부르면 돼.”
“어, 어. 안녕.”
“안녕하세요.”
김유미의 거리낌 없는 인사에 우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그녀는 오히려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능숙하게 우리와도 대화를 이끌어 나갔다.
그리고 정말 마법같이, 어느새 김유미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괴물 같은 친화력이네.‘
김유미와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휴식 시간은 종료되었다.
조장의 지시에 따라 다시 진형을 갖추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쉴새 없이 떠들던 김유미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입을 꾹 닫고 주변 상황에 집중했다.
쉬는 시간에 보여줬던 가벼운 이미지와는 달리, 진중하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완벽히 일에 집중하는 모습에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괜히 오성 길드 소속이 아닌 건가?‘
그녀의 모습을 본받아 나도 장착한 아티팩트에 집중하면서 언제든지 전투에 임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전방 탱커진에서 괴물을 발견했다는 외침과 함께 다시 전투가 진행되었다.
* * *
몇 번의 싱거운 전투가 끝난 뒤.
일행은 다시 휴식 시간을 부여받았다.
지금까지 조금 긴 준비운동이었다면, 이제부터가 메인 이벤트라고 할 수 있었다.
서율희는 지금까지의 전투와 앞으로 골렘들과 벌어질 전투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마치 시뮬레이션하듯 상황을 예상해 보았다.
다행히 새로 참가한 두 파티가 조원들과 호흡을 잘 맞추고 있었다.
생각보다 준수한 그들의 활약에 골렘들과의 전투도 잘해낼 거로 생각했다.
그녀는 오성 길드 조원들과 뒤섞여 휴식을 취하는 두 파티를 찬찬히 둘러보았다.
확실히 교육 때부터 점찍어 뒀던 사람들이라 그런지, 모두 실력이 나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당장 길드에 가입할 수 있을 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에 관한 생각을 차분하게 정리하던 그녀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정 씨 남매 그리고 김유미와 어울려 대화를 나누는 전세진의 모습을 발견하자, 서율희는 차분히 정리되던 머릿속이 뒤엉키는 듯했다.
균열에 진입하고 벌써 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전세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가 친화력이 좋은 사람도 아니었고, 오히려 대인 관계가 서툴다고 봐야 했다.
조원들을 관리하고 통솔하는 능력은 타고났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을 가지고 있는 조원은 정말 몇 명 되지 않았다.
길드장에게 직접 불려가 부탁 아닌 부탁까지 받은 상황에서 그녀의 마음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남몰래 불안한 행동을 보이는 서율희를 귀신같이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 * *
“저기 잠시만요.”
“……?”
김유미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에게 잠시 양해를 구하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우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김유미의 뒤를 쫓았고, 그녀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더니 김유미는 대화를 나누던 여자의 팔을 잡고, 거의 강제로 끌고 오다시피 우리에게 데려왔다.
“이분 누구인지 아시죠? 같이 이야기 나누면 좋을 것 같아서 모시고 왔어요.”
“……?!”
다짜고짜 조장인 서율희를 이곳으로 데려온 김유미의 행동에 나와 정 씨 남매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이쪽은 전세진 오빠. 그리고 이쪽은 정아윤, 정선우 남매. 모두 인사하세요.”
“아……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김유미의 소개에 우리는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고, 서율희 역시 어색한 모습으로 우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상황이야 어찌 됐든 김유미의 주도 아래 서율희도 같이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김유미의 대화를 이끄는 능력으로 하나둘 긴장을 풀고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윤이가 제일 먼저 서율희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걸기 시작했다.
“조장님은 언제부터 조장 일을 하신 거예요?”
“25살부터요. 그전까지는 부조장으로 계속 일하다가, 전임 조장님의 역할을 이어받아 조원들을 이끌게 됐어요.”
“우와. 그럼 저랑 비슷한 나이에 벌써 조장님이셨네요. 대단하다.”
“후후.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어요. 어차피 전임 조장님의 일을 그대로 따라 수행했을 뿐이었으니까요.”
서율희도 조금씩 불편한 기색을 풀고 대화에 참여하기 시작하자, 곧바로 세 여자를 중심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선우는 대화에서 약간 동떨어져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그녀들의 수다를 들어야 했다.
그래도 그녀들의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
“……?”
내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와중에, 서율희가 가끔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발견한 김유미가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고, 그녀를 따라 아윤도 뭔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내가 뭘 잘못했나?‘
갑자기 어색해지려는 분위기에 나는 옆에 앉아 있던 선우를 바라봤으나, 선우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점점 이상해지는 분위기를 정리해 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서율희를 찾아온 부조장 윤동현이었다.
“조장님. 이제 곧 출발할 시간입니다.”
“알았어.”
윤동현의 말에 서율희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신속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 잘 나눴어요.”
그녀는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잠시 눈이 마주친 윤동현은 나와 짧은 눈인사를 나눴고, 그 역시 곧바로 그녀를 따라 자리를 떠났다.
서율희와 윤동현이 자리를 떠나고, 곧바로 모든 일행은 다시 움직일 준비를 시작했다.
출발하기 직전.
서율희는 진지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섰다.
“이제 곧 골렘과의 전투가 있을 겁니다. 지금까지 만난 괴물들과는 전혀 다른 녀석들이니 전투에 집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골렘의 특징과 전투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며, 전투에 앞서 조원들의 집중을 끌어냈다.
방금 같이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눌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뿜어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출발 지시와 함께 일행은 천천히 숲을 지나기 시작했다.
숲을 빠져나오자 광활한 공터에 도착할 수 있었고, 아주 멀리서 오늘의 목적지인 골렘 사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행은 계속 골렘 사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숲을 빠져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앞쪽에서 골렘을 발견했다는 신호가 전해져왔다.
총 3마리의 골렘이 마치 우리의 길을 막는 것처럼 서 있었다.
’베른하르와 같이 봤던 녀석들!‘
나는 골렘 유적지에서 봤던 녀석들과 똑같은 모습을 한 3마리의 골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팔다리가 모두 성하게 붙어 있고, 비참하게 널브러져 있는 모습이 아니라 굳건하게 두 다리로 서 있다는 점이었다.
땅바닥에 누워 있을 때는 몰랐는데, 두 다리로 서 있는 모습을 직접 보니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제 지시에 따라 화력을 집중해 주세요. 그리고 탱커진은 설명한 대로 골렘의 어그로를 끌어주시면 됩니다. 절대 정면으로 부딪치면 안 됩니다.”
마지막 서율희의 지시와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그그긍!
-그그그긍!
쇠긁는 소리와 함께 골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육중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민첩한 몸놀림으로 일행을 향해 돌격해 왔다.
탱커진이 2마리의 골렘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고, 나머지 1마리의 골렘에게만 화력을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서율희의 몸 주변에서 특이한 마법진이 생겨나고, 일행 가까이 다가오던 골렘 몸 주변에 불길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지금이에요. 모두 공격!”
그녀의 공격 지시가 떨어지고.
나를 포함한 모든 딜러가 골렘을 향해 화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광!!
마법과 수많은 스킬들이 골렘의 몸에 적중하고,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골렘의 주변에는 자욱하게 먼지가 피어올랐다.
잠잠해진 골렘의 반응에 마음을 놓으려고 할 때.
“아직 안 끝났어요. 다시 공격할 준비!”
먼지 안에서 잠시 동작을 멈췄던 골렘이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딜러진은 다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고 몇 번의 화력집중이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녀석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와. 더럽게 안 죽네.‘
하지만 숨돌릴 틈이 없었다.
탱커진이 막고 있는 두 마리의 골렘이 더 남아 있었다.
다시 한번 서율희 앞에 특이한 마법진이 생겨나고, 이번에는 그녀의 주변에 크고 기다란 촉수가 생겨나더니 골렘 한 마리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나머지 골렘에게는 아까와 똑같이 불길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다시 딜러진의 화력집중이 이어지고.
두 마리의 골렘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다.
전투가 끝나고.
골렘을 계속 막아냈던 탱커진도, 계속해서 화력을 뿜어내야 했던 딜러진도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탱커진의 안정적인 저지와 서율희의 능력으로 꽤 안정적으로 전투가 끝났지만.
저런 무지막지한 녀석들이 몇 마리 더 튀어나와 진형을 헤집기 시작한다면, 정말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서율희 역시 약간 지친 기색을 보이며 일행의 휴식을 지시했고. 몇 명의 감시 역할만 두고 나머지 일행은 그 자리에서 숨을 돌리기 시작했다.
“형? 어디 가요?”
“잠시만. 앞쪽에 다녀올게.”
나는 선우에게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겨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일행을 빠져나와, 주변을 감시하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그중에 안면이 있는 윤동현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세진 씨?”
“안녕하세요. 부조장님.”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저기 쓰러진 골렘 녀석들 좀 살펴봐도 될까요?”
윤동현은 내 부탁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어. 뭐,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만. 아마 아이템이나 특별한 건 나오지 않을 겁니다.”
“아뇨. 살펴보기만 할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너무 앞쪽으로 나가지는 마시고요. 저는 계속 여기 있을 테니 무슨 일 있으면 부르세요.”
“감사합니다.”
나는 윤동현의 허락을 받고, 가장 가까이에 쓰러져 있는 골렘을 향해 다가갔다.
쓰러진 골렘은 엄청난 공격을 그대로 다 받아낸 탓인지, 온몸이 다 찌그러져 있었고 팔도 하나 뜯어져 나간 상태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골렘에게 다가가 손을 올렸다.
그리고
“Sanye(질서)”
오랜만에 사용하는 질서 문양의 힘으로 골렘 내부의 회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적지에 쓰러진 골렘과는 다르게 좀 더 생생하게 느껴지는 회로들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