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05화
37. 새로운 목표(1)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베른하르의 모습에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겨우 만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사이지만, 이런 일로 베른하르가 거짓말을 하거나 헤세 부릴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알고 계시는 겁니까?”
다시 한번 내가 되묻자 이번에는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물론이네. 높은 수준의 신성력을 가진 성직자라면 충분히 치료할 수 있고, 약간 희귀한 재료가 필요하지만 치료약도 존재하지.”
“그렇군요.”
“거기다 마법을 사용해 치료하는 방법도 존재하지. 나도 치료법은 알고 있다네.”
“정말입니까?”
“자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마법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네.”
마치 내가 그의 말을 계속 의심하는 것처럼 되묻자, 베른하르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믿기 힘든 일이라…….”
“괜찮네. 그쪽 세상에서는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은 아닐세. 실제로 이리스의 저주를 치료한 기록도 남아 있으니.”
베른하르는 다행히 내 사과에 불편한 기색을 지우고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럼 혹시 그 치료법을 저에게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흐음. 그건 힘들겠군.”
“예?”
조금 전까지는 별일 아니라는 것처럼 설명해놓고, 치료법을 알려달라는 부탁은 빠르게 거절해버리는 베른하르.
그 모습에 나는 적잖이 당황스러워졌다.
“미안하지만 치료제 제작 방법이나 치료법은 내가 몸담은 마법 학파의 비전일세. 아무에게나 알려줄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네.”
“그럼 환자를 직접 치료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것도 힘들다네. 치료 방법은 알고 있지만, 실제로 사용해 본 적도 없고. 준비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걸린다네.”
“많은 사람이 목숨이 걸린 일인데.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그 사실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나에게도 사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네.”
꽤 완고한 태도로 내 부탁을 거절하는 베른하르.
나는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번 더 매달렸다.
“혹시 제가 그 마법 학파에 들어간다면 그 치료법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허허. 그건 더 어려운 부탁이군. 우리 학파는 1인 전승으로 이어져 왔다네. 내 제자가 곧 학파의 수장이 된다는 말이지. 미안하지만 자네에게서 그만한 재능은 보이지 않아.”
베른하르는 내 마지막 부탁을 오히려 더 냉정하게 거절했다.
나는 아쉬운 마음이 남았지만, 억지로 더 부탁했다가는 그나마 좋게 쌓았던 관계를 망칠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도 일방적으로 부탁을 거절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는지, 베른하르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너무 상심하지 말게. 여유가 생긴다면 자네에게 알려줄 방법을 한 번 찾아보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베른하르 님.”
“허허허. 그럼 다시 출발…… 잠시 가만히 있게.”
“……?”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나에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나는 얼떨결에 몸을 움찔거렸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베른하르를 따라 나도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으르르릉
-으르르.
거대한 몸집을 가진 늑대무리가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평범한 늑대와는 비교되지 않는 크기에 흉포한 기세를 마음껏 드러냈다.
내가 긴장하며 아티팩트를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베른하르는 오히려 김빠졌다는 표정으로 경계심을 풀어버렸다.
“쩝. 나도 늙었나 보군. 이런 녀석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다니. 세진. 자네는 가만히 있게.”
“…….”
그는 편안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한 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다가오던 늑대무리도 심상치 않은 베른하르의 모습에 이빨을 드러내며 경계했다.
베른하르의 중얼거림이 끝나고, 그가 손을 앞으로 뻗자 8마리 정도 되는 늑대들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커엉!
-깨갱!
늑대들은 미지의 힘에 묶여 당황한 모습으로 허공에 버둥거렸다.
-휘익!
베른하르가 손을 휘젓자, 허공의 떠오른 늑대들이 빠른 속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간 늑대들은 그대로 숲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하늘에서 늑대무리의 애처로운 울음소리가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피를 보기 싫어서 그냥 날려버렸네.”
“…….”
“그럼. 얼른 가지. 어두워지기 시작하면 이런 녀석들이 아마 계속 찾아올걸세.”
“아…… 예.”
놀랄 만한 그의 마법 실력을 선보인 베른하르는 다시 숲을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 * *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숲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잘 지내고 있었는지 확인하고, 나는 곧바로 저녁을 준비했다.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베른하르는 오늘 골렘 유적지에서 확인한 것들을 정리하고 싶다며 조용한 2층 손님방으로 향했고.
나는 오늘 놀아주지 않아 심심했다는 아이들에게 붙잡혀, 자기 전까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밤이 깊어가고.
졸린 표정의 아이들을 먼저 침대에 재운 뒤, 나는 부엌에서 오늘 채취한 약초를 씻어 손질했다.
약초를 손질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베른하르 님이 알고 계시는 치료법…… 어떻게 하면 그 치료법을 배울 수 있을까?’
지금 손질하는 아스타나 약초가 비싼 이유는 단 하나.
티머시 증후군을 치료할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 치명적인 불치병의 치료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아마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른하르 님의 태도를 보아서는 절대 쉽게 알려주시지 않을 거야. 그에 걸맞은 뭔가가 있어야 해.’
어제 베른하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골렘 유적지……. 중요한 실마리가 그 유적지에 있어.
나는 그 말을 생각함과 동시에 오늘 거대 골렘을 만졌을 때 느꼈던 아르키트 회로를 떠올렸다.
분명 베른하르는 평생 숙원의 실마리가 그 유적지에 있다고 했다.
‘만약에 내가 그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면?’
뭔가를 떠올린 나는 약초 손질을 빠르게 끝내고.
곧바로 방으로 뛰어가 노트와 필기구 그리고 회로 이론에 관한 책을 가지고 내려왔다.
나는 부엌에 불을 켜고 식탁에 앉아 유적지에서 봤던 아르키트 회로를 정리해나가기 시작했다.
‘으윽. 요즘 너무 약초에만 신경을 썼더니…….’
신지아의 아티팩트 공방이 불타고, 약초밭 관리에 신경을 쓰다 보니 아티팩트 회로에 관한 공부를 너무 소홀히 했다.
오랜만에 마력 회로를 짜려고 하니, 유적지에서 봤던 복잡한 회로가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마치 처음으로 마력 회로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계속 책을 뒤적거리며 머릿속의 복잡한 회로를 노트에 정리해나갔다.
바깥에서 새벽의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고, 오늘 숲을 가로질러 왕복한 피로가 몰려와도 꾹 참아냈다.
‘오늘 밤 안에 이걸 완성해야 해. 최소한 베른하르 님이 납득할 만한 증거가 필요해.’
* * *
아침이 밝아오고.
내 예상대로 베른하르는 새벽부터 떠날 준비를 마치고 나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신세를 많이 졌네. 자네 덕분에 이곳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었어.”
“지금 바로 떠나실 겁니까?”
“아마 아르엘 님에게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리고 떠날 것 같군.”
“언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글세…….”
그는 내 질문에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리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영원히 안 돌아올지도 모르겠구먼. 이번에도 유적지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니. 포기해야 할 지도…….”
“평생 숙원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이제 나에게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아직 제자도 구하지 못했으니 학파의 수장으로서 임무를 우선시해야겠지.”
말로는 포기하겠다고 하지만, 쓸쓸함이 느껴지는 표정에서 연구에 대한 미련이 느껴졌다.
“베른하르 님.”
“응?”
“혹시 이걸 한 번만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어제 밤새도록 붙잡고 있었던 노트를 그에게 건넸다.
베른하르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 노트를 받아들었다. 일단 노트를 넘겨보던 그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그리고 수많은 늑대무리 앞에서도 침착하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걸 도대체 어떻게!?”
“알아보시겠습니까?”
“물론! 골렘의 내부 회로를 나타내는 기호들이구먼. 그런데 내가 평생에 걸쳐 연구한 것을 어떻게 자네가 알아낸 건가?”
“어제 유적지에 갔을 때, 우연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거짓말! 그건 불가능해. 그 복잡한 회로를 그 짧은 시간에 해석해냈다는 말인가?!”
베른하르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오히려 나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차피 그 골렘의 회로는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침착한 한마디에 그는 허를 찔렸다는 표정으로 입을 뻥긋거렸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베른하르는 한숨을 내쉬더니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것까지 알아내다니. 정말인가 보군.”
“…….”
“맞네. 그 회로는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 중요한 건 회로의 중심부인 핵! 골렘의 핵이지.”
거대한 골렘의 내부 회로를 살펴보았을 때, 중앙의 한 부분이 비어 있는 상태였다. 아티팩트로 따지면 마정석이 위치해야 할 부분.
하지만 그 회로 중심부에 있어야 할 것은 단순한 마정석이 아니었다.
회로에 거대한 마력을 공급함과 동시에, 주인의 명령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뇌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마정석.
바로 골렘의 핵이 그곳에 있어야 했다.
어젯밤,
골렘의 회로를 노트에 옮기며 어렴풋이 골렘의 핵을 추측할 수 있었고. 베른하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골렘의 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흥분을 가라앉힌 베른하르가 조용히 나를 응시했다. 나는 그 눈빛의 의미를 알아채고 입을 열었다.
“만약에 제가 이 골렘의 핵에 대해 알아내서 베른하르 님께 알려드린다면, 어제 말씀하셨던 치료법! 알려주시겠습니까?”
“…….”
그는 내 제안을 먼저 예상했는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제와는 다르게 거칠게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오랫동안 고민을 이어나갔다.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찌푸렸던 미간을 풀고, 턱수염을 쓰다듬던 손을 내린 베른하르는 짧게 입을 열었다.
“3개월.”
“……?”
“만약에 3개월 안에 그 해답을 찾아준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네.”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3개월이라니…….”
3개월이라는 너무 짧은 기간에 내가 항의해 보았지만, 그는 완강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진. 이 늙은이에게는 두 가지의 해야 할 일이 있다네. 하나는 골렘의 핵에 관한 연구를 끝내는 것이고. 하나는 학파의 후계를 찾는 일이지.”
“…….”
“하지만 그 두 가지의 일을 모두 끝내기에는 늙은이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베른하르는 쓸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3개월 안에 그 실마리를 찾지 못한다면 나는 후계자 양성을 위해 남은 시간을 모두 쏟아부을 생각이라네. 무리한 이야기라는 것은 나도 알지만, 나는 대대로 내려져 온 학파의 수장으로서 의무를 수행해야 하네. 그러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나.”
“…….”
“3개월 뒤에 이곳에 다시 찾아올걸세. 그때까지 자네가 골렘의 핵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생각보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나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베른하르 님. 대신 제가 3개월 안에 실마리를 찾아온다면, 약속은 꼭 지켜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나 베른하르 마법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겠네.”
나와 베른하르는 그렇게 굳은 약속을 하며 시선을 교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