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04화
36. 뜻밖의 만남(4)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난 나는 숲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약초를 담을 가방과 도구를 챙기고, 간단하게 챙겨 먹을 수 있는 간식과 음료도 가방에 넣었다.
혹시나 생길 수 있는 위험한 사태에 대비해 오랜만에 아티팩트도 준비했다.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새벽부터 보이지 않던 베른하르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디 가셨어요? 안 보이시길래 먼저 떠나신 줄 알았습니다.”
“허허. 조금 일찍 일어나서 호숫가를 산책하고 오는 길이라네.”
“잠자리는 괜찮으셨어요?”
“오랜만에 푹 쉬었다네.”
잠시 나와 대화를 나눈 그는 가방에서 두꺼운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복잡한 문양과 알아볼 수 없는 글자로 이루어진 책이었다.
판타지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마법사가 현대식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은 꽤 기묘해 보이면서도 잘 어우러졌다.
아침 식사 준비가 끝나갈 때쯤, 2층에서 잠에 덜 깬 아이들이 하나, 둘씩 내려오기 시작했다.
“퓨우우…….”
“잘 잤어. 퓨이야?”
-폴짝!
가장 먼저 내려온 퓨이가 나를 발견하더니 폴짝 뛰어 내 품에 안겼다. 이불 속 온기를 그대로 가져왔는지, 부드럽고 따스한 느낌이 퓨이에게서 느껴졌다.
“퓨이.”
내 품에 비비적거리다 다시 눈을 감아버리는 퓨이.
오늘따라 어리광을 부리는 퓨이의 모습에 나는 난처한 듯 웃으며 부드럽게 쓰다듬어줬다.
“그 슬라임은 어떻게 기르게 된 건가?”
“퓨이요? 뭐, 우연히 만나게 된 녀석인데. 이야기하자면 좀 길겠네요.”
“그런가?”
베른하르는 나와 퓨이의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다가, 관심을 끊고 다시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퓨이를 따라 티아와 모렛도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왔다.
“잘 잤어?”
“후모!”
“응.”
모렛은 내 인사에 힘차게 대답했고, 티아는 아직 잠에서 덜 깬 표정으로 몽롱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쓰다듬어 주고, 차례로 들어 올려 식탁 의자에 앉혀주었다.
“베른하르 님. 아침 식사하시죠.”
아침은 간단하게 토스트와 베이컨, 달걀 프라이.
그리고 아이들 취향에 맞게 우유와 쥬스를 준비해줬다.
“베른하르 님. 커피도 준비해 뒀는데, 혹시 드시겠습니까?”
“커피? 그건 뭔가?”
“저쪽 세상에서 가져온 차의 종류인데. 저는 아침에 자주 마십니다.”
“그럼 나도 그걸로 부탁하네.”
나는 금방 베른하르의 몫까지 커피 두 잔을 준비해 식탁에 내왔다.
처음 커피를 본 베른하르는 차향이 나쁘지 않았는지, 몇 번이고 커피향을 음미하다가 찻잔에 입을 댔다.
“오! 차 맛이 꽤 좋아. 엘프차도 정말 좋지만, 이 커피라는 차도 나쁘지 않아.”
그는 식사가 끝나기 전에 한잔을 더 마실 정도로 커피를 마음에 들어 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대충 정리를 하고 있을 때, 여느 때와 같이 이엘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아저씨! 저 왔어요.”
출석 도장을 받는 초등학생처럼, 오늘도 나에게 달려온 이엘.
“토스트랑 베이컨 좀 남았는데, 먹을래?”
“네! 주세요.”
“잠시만 기다려.”
사실 남은 음식이 아니라 요즘에는 이엘이 올 것을 예상하고 미리 좀 더 만들어 둔 것이지만, 혹시 부담스러워할까 봐 매번 이렇게 물어본다.
이엘에게 막 아침을 챙겨줬을 때, 아이들과 TV를 보고 있던 베른하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세진. 슬슬 출발해야 할 것 같은데.”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나는 이엘과 아이들에게 점심으로 챙겨 먹어야 할 것을 알려주고, 저녁 전에는 돌아올 것이라 말해줬다.
이엘은 나와 베른하르 모두 나간다는 말에 아쉬워하며 따라오겠다고 했지만, 당연히 베른하르가 엄한 표정으로 거절했다.
아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이엘은 더는 떼를 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집을 나선 나와 베른하르는 호수 쪽을 등지고 숲속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한 곳을 지나서 조금씩 숲 깊숙한 곳으로 향하자 나도 모르게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베른하르는 숲속이 익숙한 것인지 여유로운 표정으로 길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종종 내게 궁금한 것들을 질문했는데.
대부분 내가 넘어온 저쪽 세상에 관한 것들과 내 능력에 관한 질문이었다.
능력에 관한 부분은 언급을 자제했지만, 현대 세상에 관한 것은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줬다.
“자네. 무슨 약초를 찾는다고 했었지?”
“네. 아스타나 약초를 찾고 있습니다.”
“저쪽에 하나 보이는데.”
“어디……. 아!”
긴장한 탓인지 알아보지 못했는데, 베른하르 덕분에 지나칠 뻔한 아스타나 약초를 캐낼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아스타나 약초를 얻은 탓에 내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 뒤로도, 베른하르는 약초에 꽤 지식이 풍부했는지 항상 나보다 먼저 아스타나 약초를 먼저 발견해 알려주었다.
그의 활약 덕분에 나는 다섯 뿌리나 되는 약초를 금방 가방에 채울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베른하르 님.”
내가 고개 숙여 인사를 하자 그는 별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감사 인사는 됐네. 늙은이가 밥값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는 밥값이라는 말로 내 감사 인사를 일축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 * *
어느새, 머리 꼭대기에 해가 올라서고.
별다른 사건 없이 목적지인 골렘의 유적지에 도착했다.
마치 고대 문명의 사원 같아 보이는 허물어진 구조물과 그 주변에 골렘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팔다리가 성한 골렘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들도 세월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볼품없이 변해버렸다.
조금 지친 내가 적당한 곳에 앉아 숨을 돌리는 와중에, 베른하르는 지치지도 않는지 곧바로 볼품없는 골렘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책을 꺼내 뭔가를 비교해 보기도 하고, 메모를 하는 그의 모습이 사뭇 진지해 보였다.
숲속을 걸어올 때는 수다스럽게 말을 붙이던 그는 입을 꾹 닫고 골렘에만 모든 신경을 쏟아부었다.
이미 아스타나 약초를 구하는 목적은 달성했으므로, 그의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가만히 자리에 앉아 최대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고.
“하아…….”
무섭게 집중을 유지하던 베른하르가 한숨을 내쉬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잘 안 풀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뭔가 미련이 남는 표정으로 골렘들을 둘러보다, 몸을 돌려 나에게 다가왔다.
“끝나셨습니까?”
“일단 내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다 확인했네. 물론 결과는 그렇게 좋지 못했지만.”
“이것 좀 드시죠. 점심으로 챙겨온 건데.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못 물어봤습니다.”
“고맙네.”
나는 가방에서 챙겨온 샌드위치를 꺼내 베른하르에게 건넸다. 직접 만든 샌드위치는 아니고, 집에 사둔 샌드위치를 챙겨온 것이었다.
그가 샌드위치를 조금씩 맛보는 사이.
나는 계속 가만히 있어 찌뿌둥해진 몸을 풀 겸, 자리에서 일어나 이곳저곳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무너진 사원을 중심으로 수많은 골렘이 널브러져 있는 모습은 꽤 기묘한 감상을 주는 모습이었다.
관광지에 온 느낌으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사원 반대편에 다른 골렘들과 다르게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골렘을 발견했다.
작은 골렘들과 마찬가지로 다리와 팔이 한 짝씩 밖에 남아 있지 않았고, 몸체 역시 반파 당하다시피 했다.
하지만 2층짜리 오두막집만 크기에, 쓰러져 있는데도 거대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와! 이런 거대한 물체가 움직인 건가?’
나는 약간의 경외감마저 느끼며 아무 생각 없이 골렘의 몸체에 손을 가져갔다.
골렘의 몸체의 내 손이 닿는 순간!
내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과 함께 골렘의 몸체 내부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현상에 나는 당황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생생하게 느껴지는 골렘 내부에 의식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복잡하지만 정교하게 골렘 내부를 이루고 있는 마력 회로.
그 실체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그 회로의 정체를 알아챘다.
‘아르키트 회로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아르키트 회로에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예전의 감각을 살리며 복잡한 회로에 계속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의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복잡한 회로의 구조와 형식을 해석하지 못해, 계속 수박 겉핥기를 하는 상황만 되풀이되었다.
“세진!”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집중했던 의식이 풀리며 정신을 되찾았다. 황급히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자 거대한 골렘의 몸체만 보일 뿐이었다.
내가 있는 곳까지 다가온 베른하르가 말했다.
“세진. 여기 있었군.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려면 그만 출발해야 할 것 같네.”
“아…… 예.”
“무슨 일 있었나?”
약간 멍한 내 표정에 그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다시 돌아갔다. 베른하르는 걱정스러운 표정은 거두고 나와 함께 무너진 사원을 빠져나갔다.
나는 걸으면서도 머릿속에 선명한 골렘의 회로를 떠올리며, 점점 멀어지는 거대 골렘을 몇 번이고 되돌아봤다.
* * *
점점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고.
나와 베른하르는 골렘 유적지를 떠나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었다.
“저기 약초가 있네.”
“감사합니다. 금방 캐오겠습니다.”
베른하르의 약초를 발견하는 귀신같은 능력 덕분에, 돌아가는 길에도 아스타나 약초를 몇 뿌리 더 캐낼 수 있었다.
뿌듯한 모습으로 약초를 캐내는 내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베른하르가 내게 물었다.
“흐음. 그 약초는 무슨 목적으로 구하는 건가?”
“예?”
“그 아스타나 약초 말일세. 그렇게 귀한 약초는 아닌 거로 알고 있는데. 위험한 이곳까지 따라와 구하려는 이유가 뭔가?”
나는 막 캐낸 약초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보관하며 질문에 대답했다.
“티머시 증후군이라는 불치병에 치료하는 약초로 쓰려고 합니다.”
“아스타나 약초에 그런 효능이 있었나? 티머시 증후군은 어떤 병인가?”
다시 호기심에 불이 붙었는지, 질문 세례를 이어가는 베른하르.
나는 차분하게 티머시 증후군에 관해 설명해줬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듣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에게 되물었다.
“티머시 증후군이라는 불치병이 ‘이리스의 저주’를 말하는 건가?”
“이리스의 저주?”
“들어보니 ‘이리스의 저주’와 증상이 거의 똑같네. 그런데 그 약초로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건가?”
“정확히는 치료가 아니라 증상을 완화하는 정도입니다. 아직 치료법이 없는 병이라…….”
내 대답에 베른하르는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이리스의 저주를 겨우 그 정도 약초로 치료할 수 있었다면 저주라고 하지 않았겠지.”
“네. 그래서 저쪽 세계에서는 이 약초가 꽤 비싸게 팔립니다. 워낙 구할 수 있는 약초에 비해 병에 걸린 사람이 많아서.”
“응? 병에 걸린 사람이 많다고?”
그는 다시한번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도대체 얼마나 있길래……?”
나는 베른하르의 물음에 있는 그대로 대답해줬다. 그러자 그는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아니?! ‘이리스의 저주’에 걸린 사람이 그렇게 많다고?”
“어엇. 예. 사실입니다. 제 지인 중에서도 그 병에 걸린 사람이 있습니다.”
“허허. 참으로 특이한 일이구나.”
그는 잠시 혀를 차며 탄식을 했다.
“그 병은 보통 자신의 재능을 몸이 이겨내지 못한 경우에 생기는 병일세. 그래서 축복의 여신인 이리스의 이름을 빌려 ‘이리스의 저주’라고 부른다네.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은 축복이지만, 그 때문에 단명하게 되니 저주나 다름없으니까.”
“아…….”
“그래서 내가 놀란 거라네. 보통은 뛰어난 천재에게 생겨나는 병인데 그렇게 많은 사람이 그 병에 걸렸다는 말을 믿기 힘들었으니.”
나는 처음 듣는 병의 원인에 놀라움을 표했다.
베른하르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다니. 치료법이 있어도 사용하기 힘들겠구먼.”
“예…… 잠깐, 지금 뭐라고 하셨죠?”
“치료법이 있어도 사용하기 힘들지 않겠냐고…….”
“치료법을 알고 계십니까?”
다급한 내 물음에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