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균열에 산다 103화
36. 뜻밖의 만남(3)
“누구냐고요?”
“그렇네. 이곳에서 인간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거기다 엘프어도 사용할 줄 알고. 복장도 굉장히 특이하구먼.”
노인은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구석구석 살펴보기 시작했다.
일단 나쁜 의도로 다가온 것은 아닌 것 같아 살짝 경계심을 내려놓고 인사를 했다.
“저는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저쪽 언덕 아래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살고 있다고?”
내가 여기서 산다는 말에 노인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과장된 그 반응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아직 얼마 전부터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흐음. 그 까탈스러운 나무 괴물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노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나무 괴물에 대해 언급했고, 누구를 말하는 건지 어느 정도 짐작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 혹시 나무 정령님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르엘 님에게도 말씀드렸고요.”
“오오. 아르엘 님을 알고 있었나? 그래서 엘프어를 구사할 수 있어나 보군.”
아르엘을 언급하자 노인은 찡그렸던 인상에서, 곧바로 화사한 웃음을 보이며 내 말에 맞장구쳤다.
“외부인이 쉽게 들어오지 못할 곳이라 생각해서, 걱정되는 마음에 접근한 것인데 괜한 오해를 한 것 같군. 놀라게 했다면 미안하네.”
정중한 노인의 사과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이곳에 손님이 찾아올 줄은 전혀 예상 못 해서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허허. 그렇게 말해준다면 이 늙은이가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겠네. 어이쿠. 그러고 보니 아직 내 소개도 하지 않았구먼. 나는 마법사 ‘베른하르’라고 하네.”
“저는 전세진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반갑습니다.”
그는 정중한 내 인사가 마음에 드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 아르엘 님이 계신 곳으로 갈 생각인데. 자네도 같이 가겠나?”
“저도요? 오랜만에 찾아오신 것 같은데 저 때문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어차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안부 인사를 전하러 방문하는 것뿐이야. 당장 급한 일이 없다면 자네도 함께하지. 개인적으로 자네에게 궁금한 것도 있고 말이야.”
베른하르의 계속된 권유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지금 당장 움직이지.”
* * *
“마법사 아저씨!”
“허허허. 이엘이구나. 정말 오랜만이야.”
엘프 모녀의 집에 도착하고.
베른하르를 발견한 이엘은 반가운 목소리로 그에게 달려갔다. 베른하르 역시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이엘을 품에 안았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마법사 아저씨.”
“미안하다. 아저씨가 일이 바빠서 자주 찾아오지 못했구나.”
투정을 부리는 이엘의 모습에 그는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변명했다. 나는 훈훈한 두 명의 모습을 보며 잠시 생뚱맞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데 아저씨보다는 할아버지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베른하르의 나이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아무리 봐도 이엘에게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잠시 딴생각을 하는 사이 베른하르는 이엘과 함께 아르엘이 있는 방으로 향했고, 나도 뒤늦게 그들을 뒤따랐다.
방 안으로 들어간 우리는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는 아르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베른하르는 아르엘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르엘 님.”
“죄송해요. 직접 나서서 맞이했어야 했는데.”
“허허. 괜찮습니다. 이엘이 맞아준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존대하며 조곤조곤 대화를 나눴다. 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 내용이었다.
“오다가 호숫가에서 이 친구를 만났는데, 이곳에서 산다고 하더군요.”
“네. 얼마 전부터 호수 건너편에서 살기 시작하셨어요.”
“허허. 정말이었군요. 솔직히 이곳에서 산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을 때 믿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그 나무…… 정령의 고집을 꺾기 힘들었을 텐데.”
“나무 정령님도 이제는 세진 씨를 인정하고 계세요.”
“그렇습니까? 그건 또 다른 의미로 놀라운 일이군요.”
베른하르는 정말 놀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살짝 민망해져서 시선을 돌리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한동안 두 사람은 나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계속 대화를 나눴다. 뒤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자니 굉장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유적지를 둘러보실 생각이신가요?”
“그렇습니다. 내일 아침 일찍 들러볼 생각입니다.”
“그렇군요. 쿨럭! 쿨럭!”
대화를 나누던 아르엘이 고통스러운 표정과 함께 심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한번 터져 나온 기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베른하르와 내가 당황하는 사이, 이엘이 빠르게 따뜻한 차를 내왔다.
“고마워. 이엘.”
아르엘은 이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천천히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다행히 따뜻한 차 덕분인지 기침은 잦아들었다.
“죄송해요. 베른하르 님. 몸 상태가 별로 안 좋아서…….”
“아닙니다.”
길지 않았던 대화에도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지는 아르엘의 모습에 베른하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의 눈빛에서 진한 안타까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럼 오늘은 이제 일어나봐야겠습니다.”
“베른하르 님. 잠자리를 준비해 드릴 테니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게…….”
“괜찮습니다. 제가 이곳에 있으면 싫어하는 분이 있지 않습니까? 오랜만에 그 친구와 여행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하룻밤 정도 노숙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노숙하겠다는 베른하르가 계속 마음에 걸리는지, 아르엘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뒤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내가 슬쩍 끼어들어 말했다.
“그럼 제 집에서 하룻밤 지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베른하르 님.”
“자네 집에서 말인가?”
“세진 씨. 그래 주시겠어요?”
아르엘은 내 제안에 기꺼운 표정으로 되물었고.
베른하르는 살짝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싫어한다기보다 예의상 망설이는 것 같았다.
“좋은 집은 아니어도 노숙을 하는 것보다는 괜찮을 겁니다. 방도 많이 있고, 괜찮으시다면 저녁도 대접해드리겠습니다.”
“허험.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너무 신세를 질 수는…….”
“아르엘 님의 손님이면 저에게도 귀한 분이시죠. 저도 아르엘 님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이 정도는 괜찮습니다.”
“흠흠. 그럼 하룻밤만 신세를 지도록 하겠네. 정말 고맙네.”
눈치를 보던 베른하르가 마지못한 척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아르엘도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편한 표정으로 내게 감사의 뜻을 보냈다.
* * *
이엘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베른하르는 호수 건너편의 통나무 집으로 향했다.
통나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베른하르는 이엘의 아빠, 아르엘의 남편이었던 사람과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엘프 모녀가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된 계기에 그의 도움이 컸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엘이 베른하르를 아저씨라고 불렀구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통나무집 앞에 도착했다. 처음 통나무 집을 본 베른하르는 작게 감탄을 터뜨리며 칭찬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썩 괜찮은 실력이야.”
“들어가시죠.”
나는 감탄하는 그를 이끌고 집 현관문으로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아이들이 뛰쳐나오는 소리가 집 안에서 들려왔다.
환한 표정으로 나를 맞이하려던 아이들은, 처음 보는 존재를 발견하고 곧바로 내 뒤에 숨으며 경계했다.
한편 아이들을 본 베른하르는 처음 나를 발견했을 때처럼,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아이들을 한 명씩 관찰했다.
“이분은 베른하르 님이고, 오늘 하룻밤 우리 집에서 지내실 손님이야. 베른하르 님. 이 아이가 티아, 그리고 퓨이, 모렛입니다.”
내가 소개를 하자 뒤에 숨어 있던 아이들이 슬쩍 몸을 내밀며 먼저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
“퓨이.”
“후모.”
어색한 아이들의 인사에도 베른하르는 인자한 미소로 퓨이와 모렛에게 화답했다.
“그래. 오늘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될 베른하르라고 한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티아에게 눈을 돌려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티아 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르엘 님과 비슷한 기운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맞아. 친척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군요. 저는 마법사 베른하르라고 합니다.”
그는 뭔가 궁금한 게 많은 듯 두 눈을 빛냈다.
“베른하르 님. 저쪽에 잠시 앉아 계세요. 저는 지금 저녁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럼 잠시 실례하겠네.”
“얘들아. 베른하르 님이랑 같이 있어. 금방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
나는 아이들에게 베른하르의 대접을 맡기고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무슨 음식을 대접할지 고민하다가 간단하게 토마토소스 스파게티와 마늘 빵을 준비하기로 했다.
면을 삶으면서 미리 사놓은 바게트와 마늘 소스를 이용해 마늘 빵을 노릇하게 구워내고.
삶아진 면을 가지고 큰 팬 위에 식용유와 올리브유를 두르고, 갖가지 재료와 스파게티 소스를 넣고 금방 스파게티를 만들었다.
식탁 위에 음식을 올려두는 사이, 거실에서 TV소리와 함께 베른하르의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는 처음보는 TV나 현대 물건들이 신기한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아이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중이었다.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내 외침에 아이들이 쪼르르 식탁으로 몰려왔고, 뒤이어 따라온 베른하르가 흥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자네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온 건가? 그럼 저 물건들도 그곳에서 가져온 것들인가? 혹시 자네가 전부 만들어낸 건?”
“먼저 자리에 앉으시죠. 식기 전에 식사 먼저 하시고, 궁금하신 건 나중에 전부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흠흠. 내가 너무 흥분했나 보군.”
내가 자리를 권하며 진정시키자, 금방 정신을 차린 베른하르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하며 식탁 앞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토마토 스파게티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마늘빵이 식욕을 자극했다.
베른하르도 냄새가 나쁘지 않은지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베른하르 님. 먼저 드시죠.”
“그럼 잘 먹겠네.”
“잘 먹을게.”
“퓨이!”
“후모!”
베른하르를 시작으로 아이들도 스파게티와 마늘빵을 맛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최대한 점잖게 천천히 맛을 보던 베른하르는 배가 아주 고팠는지 금방 스파게티 한 접시를 비워냈다.
“조금 더 드릴까요?”
내 물음에 그는 조금 얼굴을 붉혔지만 거절하지는 않았다.
다행히 식성이 좋은 아이들 때문에 최대한 넉넉히 준비해둔 덕에, 베른하르에게 넉넉히 음식을 제공할 수 있었다.
* * *
만족스러웠던 식사가 끝나고 나는 후식으로 엘프차를 대접했다. 그는 엘프차가 처음이 아닌지 익숙하게 차를 즐겼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엘프차군. 아르엘 님이 만드신 건가?”
“아뇨. 이건 이엘이 만든 엘프차에요.”
“이엘이 엘프차를? 허허. 벌써 그렇게 성장했나?”
“아. 이엘의 힘으로는 부족해서 나무 정령님도 조금 도와주셨어요.”
“…….”
나무 정령 이야기가 나오자 베른하르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했지만, 엘프차 맛은 마음에 드는지 끝까지 찻잔을 비워냈다.
그는 소파에 기대 편안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허허. 자네 덕분에 저녁도 배불리 먹고, 노숙도 피할 수 있게 됐으니. 정말 고맙네.”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아까는 노숙도 괜찮다고 아르엘 님께 말했지만, 이제 나이가 나이인지라…….”
베른하르는 말하는 도중에 노숙하는 상상을 했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까 궁금해하던 질문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일 그의 일정에 대해 듣게 되었다.
“유적지에 가신다고요?”
“그렇네. 이 숲 근처에 골렘 유적지가 있거든. 내 평생 숙원이기도 한 연구인데, 중요한 실마리가 그 유적지에 있어.”
“그렇군요.”
나는 베른하르의 말을 흘려듣다가 뭔가 번쩍 생각이 나서 그에게 곧바로 질문했다.
“혹시 여기 경계를 빠져나가시는 겁니까?”
“경계? 주변 결계를 말하는 건가?”
“결계……?”
“모르고 있었나? 아르엘 님과 그 나무 괴물의 힘으로 이곳 주변은 결계가 쳐져 있다네. 그래서 이 호수 주변 숲은 굉장히 안전하지만 결계 밖은 꽤 위험하지.”
“아…….”
“그래서 처음 자네를 발견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한걸세. 밖에서 이곳으로 들어오려면 굉장히 힘들거든.”
나는 처음듣는 결계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유적지로 가실 때, 저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자네가?”
“구하고 싶은 약초가 있는데. 이제 주변에서는 구하기 힘들어서 말이죠. 가능하면 베른하르 님을 따라 결계 밖에서 구해보려는데. 안될까요?”
내 조심스러운 제안에 베른하르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게. 나랑 같이 있으면 크게 위험하지 않을 테니.”
“정말 괜찮겠습니까?”
생각보다 쉽게 허락을 한 그의 모습에 내가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오늘 대접받은 은혜도 있고, 자네 한 명 정도 따라오는 건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네.”
“감사합니다. 베른하르 님.”
“허허. 자네 덕분에 유적지까지 심심하지 않겠구먼.”
조금 즉흥적으로, 나는 처음으로 베른하르와 함께 숲속 경계를 벗어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