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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균열에 산다-102화 (102/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02화

36. 뜻밖의 만남(2)

이혜린의 발언에 놀란 감정을 수습하며 기억을 빠르게 더듬기 시작했다.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이었나?’

혹시 내가 실수한 게 아닌가 싶어서 떠오르는 기억들을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도저히 그녀에 관한 기억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더듬더듬 되물었다.

“저기…… 저는 혜린 씨가 기억이 안 나는데 혹시 사람 잘못 보신 게 아닌지?”

“…….”

내가 기억을 해내지 못하자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이 변했다. 아마도 내 반응에 살짝 실망하는 듯했다.

“형배 오빠랑 함께 많이 놀았었는데, 기억하지 못하시나 보네요.”

“어어, 어?”

신형배.

그러니까 시설에서 형제처럼 함께 자라고 마지막에는 빚만 남기고 도망친 친구의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나는 머릿속이 뒤엉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아주 흐릿하고 오래된 기억의 파편이 의식 위로 떠올랐다.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 나와 형배를 따라다니던 귀여운 소녀에 관한 추억.

-세진 오빠!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해맑은 미소를 짓던 소녀.

이제야 눈앞의 이혜린에게서 그 소녀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 설마…… 혜린이니?”

이번에는 내가 다른 의미로 놀라며 눈을 크게 뜨자, 무표정하던 이혜린의 표정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하하하. 정말이구나. 정말 혜린이구나.”

나는 놀라움, 반가움, 기쁨, 허탈함이 뒤섞인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의 예쁘장한 아가씨가 기억 속 소녀라는 사실이 아직 믿기 힘들었다.

“나인 줄 알고 여기 나온 거야?”

“네. 세진 오빠가 여기 신지아 씨 공방에서 일하고 있었던 시절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 미리 연락하지 그랬어?”

“회사 일을 처리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라 따로 연락드리기가 좀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이렇게라도 얼굴 보면 된 거지. 근데 처음에는 정말 못 알아봤어. 그 혜린이가 이렇게 많이 변해서 눈앞에 나타날 줄은…….”

“후후. 세진 오빠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하하.”

나와 이혜린 사이의 분위기가 180도 변해 친밀하게 대화를 이어나가자, 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신지아가 내게 물었다.

“세진 씨. 여기 혜린 씨와는 어떻게 알고 계신 거예요?”

“아. 미안해요. 지아 씨. 너무 우리끼리 이야기를 해버렸네요. 그러니까 혜린이와는…….”

나는 신지아에게 사과하고 이혜린과의 관계를 설명했다.

시설에서 함께 자란 사이여서 여동생과 오빠 같은 사이였고, 이혜린이 다른 시설로 가게 되면서 헤어졌다는 사실까지 말해주었다.

설명을 들은 신지아는 뚱했던 표정을 풀고 아까 나와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아. 두 분이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그럼 혜린 씨는 어릴 적 헤어졌던 오빠를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저를 따라오겠다고 하신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오늘 세진 오빠를 만나려고 한 용건은 따로 있습니다.”

“……?”

신지아의 물음에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이혜린의 모습에 나는 궁금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오늘 저는 미래 그룹의 비서실에 용무로 찾아온 겁니다.”

이혜린은 잠시 주변을 잘피더니 조금 조심스러워진 말투로 내게 말했다.

“세진 오빠가 재배하고 계시는 아스타나 약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

아스타나 약초가 언급되자 나는 잠시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스스로 아스타나 약초를 재배하고 있다고 밝힌 사람은 몇 명 없지만, 꽤 많은 높으신 분들이 내 정체를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예상했다.

“생각보다 많이 안 놀라시는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으니까. 근데 좀 불쾌하긴 하네.”

“죄송합니다. 하지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저희 쪽에서도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혜린이 고개를 숙이니 내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오랜만에 만난 여동생 같은 그녀에게 불평을 늘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체념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비서실의 용건이 뭔데?”

내 질문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 이혜린이 천천히 대답했다.

“혹시 가장 처음에 협회에 판매했던 아스타나 약초를 기억하십니까?”

“으음. 가장 처음에 판매한?”

“네. 총 3뿌리 정도 판매하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꽤 상세한 설명에 나는 곧바로 그때 아스타나 약초를 생각해냈다. 벽을 넘어서 처음으로 채집한 아스타나 약초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억하지. 근데 그게 왜?”

“처음에 판매하신 약초와 지금 주로 판매하시는 약초에 효능이 많이 차이가 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약효가 뛰어난 아스타나 약초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끄응…….”

지금 내가 약초밭에서 재배하고 있는 약초와 숲속에서 발견해 채취한 약초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물론 재배한 약초도 시중에서 판매되는 다른 약초만큼은 효능을 발휘하지만, 숲속에서 채취한 약초에는 전혀 미치지 못했다.

어르신과 이 차이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지만, 딱히 뭔가를 알아내지는 못했다.

이미 숲에 있던 아스타나 약초를 대부분 다 채취해버려서 찾기도 쉽지 않았다.

만약 억지로라도 구하려고 한다면 작은 슬라임들이 경고한 경계를 넘어서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돈이라면 섭섭하지 않을 만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야. 지금은 나도 당장 구하기 힘들거든.”

“그렇습니까?”

이헤린은 힘들다는 내 대답에 안타까운 기색을 내비쳤다. 비서실 소속으로 내게 찾아온 거지만, 여동생처럼 생각하는 그녀가 아쉬워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번 노력은 해볼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확신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방법을 찾아보겠다 이야기해줬다.

“아. 감사합니다.”

이혜린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지 아쉬운 기색을 지우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럼 용건은 그것뿐이야?”

“부탁드리고 싶은 건 이게 끝이고, 따로 더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약초 기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약초 재배에 관한 사실도 알고 있으니, 당연히 이것도 알고 있었겠지.’

이제는 딱히 기분이 나쁠 것도 없었다. 편안한 표정으로 이혜린의 이야기를 계속 귀 기울였다.

“지금 하고 계시는 약초 재배와 기부로 최근 아스타나 약초 가격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나 때문에 이제 공급량도 꽤 늘어났으니까.”

“아직은 원래 공급하던 쪽에서 공급량을 조절해 약초 가격이 유지되고 있지만, 조만간 가격이 내려갈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럼 좋은 일 아닌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신지아가 살짝 끼어들어 물었다. 이혜린은 그 질문에 침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좋은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원래 이 약초를 판매하던 기업과 길드 입장에서는 굉장히 불쾌한 상황이 된 겁니다.”

“아…….”

“…….”

그녀의 설명에 나와 신지아의 표정이 따라 무거워졌다.

“아마 큰 이익을 보고 있던 약초사업이 소속 없는 일개 각성자에 의해서 망해가는 상황을 저쪽에서 이해하지 않을 겁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균열에서 편안히 약초를 재배하며, 거의 들이는 비용 없이 쉽게 약초를 생산해냈지만.

기업과 길드는 직접 위험한 균열에 들어가 괴물들과 싸우며 약초를 생산해내고 있다.

계속 약초 가격이 내려간다면 당연히 기업과 길드는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었다.

“세진 오빠가 기관에 약초를 기부 한 일은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습니다.”

“……?”

“지금 워낙 그쪽에 여론이 좋게 형성되고 있어서, 기업과 길드 쪽에서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관 쪽에서도 당분간은 세진 오빠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이혜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 내 눈을 강렬하게 쳐다보더니, 경고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저쪽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대놓고 움직일 수 없다면 숨어서라도 뭔가를 하려고 할 겁니다. 저번에 지아 씨의 아티팩트 공방이 불탔던 것처럼 말입니다.”

공방 이야기가 나오자 나와 신지아가 동시에 몸을 움찔했다. 아직도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불안한 표정의 신지아가 다급하게 말했다.

“세진 씨가 위험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해요?“

“지금 세진 오빠의 능력이 대부분 비밀에 싸인 상황이라, 저쪽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 아직 모릅니다. 회유하려고 할 수도 있고 어쩌면…….”

“…….”

“배제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의 심각한 이야기에 나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옆에 있던 신지아 역시 질린 표정을 지었다.

“세진 오빠.”

“그래.”

“원하신다면 당분간 미래 그룹에서 보호해 줄 수 있습니다.”

“…….”

“원래 하시고 있던 일에는 전혀 간섭하지 않을 겁니다. 단지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그룹에서 인원이 몇몇 투입될 겁니다.”

이혜린이 미래 그룹의 보호를 제안해 왔다. 나는 그 제안에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조건은?”

“조건은 없습니다. 단지 회장님께서는 세진 오빠가 지금처럼 계속 활동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혜린의 표정은 무표정했지만, 눈에는 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했다. 신지아 역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 *

“이건 제 연락처입니다. 오늘 드린 제안은 언제든지 유효하니 생각이 바뀌시면 이 연락처로 연락해 주시면 됩니다.”

“미안해. 생각해줘서 한 제안인데.”

“아닙니다.”

나는 결국 이혜린의 제안을 거절했다.

정확히는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아직은 크게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도움을 받게 되면 결국, 어떻게든 미래 그룹과 얽히게 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지켜보던 신지아는 내 결정이 약간 염려되는 듯했지만, 내 선택을 존중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가볼게요. 세진 씨. 엘프차 잘 마실게요.”

“네. 다음에 봐요.”

이혜린과 함께여서 신지아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조금 아쉬움이 남았다.

“저도 가보겠습니다.”

“혜린이 너는 계속 그렇게 딱딱하게 굴 거야? 편안히 해도 괜찮은데.”

내가 장난스럽게 이혜린에게 묻자 그녀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아까 제안을 수락해 주신다면 지금이라도 편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의 대답에 피식 웃어버렸다.

“녀석. 사회인 다됐네. 다됐어.”

* * *

오늘 이혜린과 뜻밖의 만남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조용한 호숫가에서 산꼭대기에 가까워져 가는 붉은 해를 바라봤다.

오랜만에 신지아와 이혜린과 만남은 좋았지만, 아스타나 약초에 관한 일 때문에 머리가 복잡해 마음이 심란했다.

잔잔한 호수와 붉은 저녁노을을 보며 어지러운 마음을 수습하고 있을 때.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엘이니? 퓨이야? 티아? 모렛?”

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며 가까워지는 존재에게 말을 걸었지만 어떠한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정체불명의 인기척이 아이들과 다르게 묵직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경계를 하며 숲속을 노려봤다. 정체불명의 인기척이 점점 가까워지고…….

-부스럭.

누군가 풀숲을 헤치고 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

“…….”

풀숲을 헤치고 나온 사람은 키가 대단히 큰 사람이었다.

주름진 얼굴과 회색빛 머리칼이 나이가 적지 않음을 보여주었고, 코와 입가에 깔끔하게 자란 수염이 잘 어울리는 노인이었다.

눈빛은 등 뒤에 호수와 같이 깊고 잔잔했으며, 자연스럽게 경계를 풀게 만드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복색이 굉장히 특이했는데 마치 판타지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마법사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내게 말을 걸었다.

“예?”

노인은 내가 알아듣지 못하자, 계속해서 다른 언어를 사용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마 나와 이야기를 나누려 시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어떠한 언어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도 노인도 답답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를 몇 분.

약간 체념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꺼내는 노인.

“설마 엘프어를 알아들을 리는 없고…….”

“어? 그건 알아듣는데.”

“엘프어를 알아듣는 건가?”

“네. 다른 말은 모르겠는데 그건 알아듣겠네요.”

내가 엘프어를 알아듣자 노인은 나를 신기한 듯 바라보며 물었다.

“호오.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오늘 나에게 주어진 뜻밖의 만남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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