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균열에 산다-101화 (101/263)

나 혼자 균열에 산다 101화

36. 뜻밖의 만남(1)

-스윽. 스윽.

나는 살짝 피곤한 표정으로 계속 손을 움직였다.

숲에서 채취한 찻잎을 따고 분류하는 작업이 몇 시간째 계속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옆에서 이엘도 함께 손질을 도와주지만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에, 사실상 나 혼자 찻잎을 손질하고 있는 상황.

‘으윽. 내가 내 무덤을 팠지.’

얼마 전 너튜브 채널에서 벌인 엘프 차 선물 이벤트 때문에 뜻하지 않게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파장의 여파로 나는 지금 엘프 차 생산에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첫 번째 이벤트 때 나눠준 엘프 차는 아르엘이 내어준 것을 포장해서 보내주기만 하면 끝이었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아르엘도 더는 여분의 엘프 차가 없었던 것.

어쩔 수 없이 엘프 차를 새로 만들어야 했는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엘프 차의 재료가 되는 찻잎을 구하는 건 굉장히 쉬웠지만, 찻잎을 엘프 차로 만드는 과정에서 엘프의 기운이 필요했다.

문제는 아르엘이 그 많은 엘프 차를 생산할 만큼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엘프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으면 평범한 찻잎이기 때문에 필수 불가결한 생산과정이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려고 할 때.

“이엘과 나무 정령님에게 부탁해 보세요.”

아르엘이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 주었다.

바로 또 다른 엘프 이엘과 나무 정령의 힘을 빌리는 것.

이엘은 아직 어린 엘프였기에 제대로 엘프의 기운을 담을 수 없지만, 나무 정령의 도움을 받는다면 충분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이엘은 당연히 엘프 차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문제는 나무 아저씨였는데.

-엘프 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예. 이엘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서…….

-도와주겠네.

“……?”

생각보다 엄청 쉽게 허락을 받아낼 수 있었다.

안 좋은 쓴소리를 예상했던 나에게 굉장히 예상외의 전개였다.

나무 아저씨는 단순히 엘프 차를 만드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숲속의 찻잎을 모을 때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엘과 나무 정령의 기운이 담긴 엘프 차를 완성할 수 있었다.

아르엘이 만든 엘프 차와 이엘의 것을 비교했을 때.

이엘의 엘프 차는 여운을 주는 깊은 맛은 조금 줄었지만, 숲 특유의 싱그러운 느낌과 달달한 느낌이 잘 느껴졌다.

취향에 따라서는 아르엘의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나는 엘프 차 생산을 위해 몇 시간째 찻잎 손질을 하는 중이었다.

“으어억. 끝났다!”

나는 찌뿌둥한 몸을 쭈욱 펴며 기쁨의 괴성을 질렀다.

얼마나 찻잎을 만졌는지 손에서 풀냄새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이엘. 손질이 끝난 찻잎을 아르엘 님에게 가져가거라.

“네. 나무 아저씨.”

나무 아저씨의 말에 따라 이엘이 손질한 찻잎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연히 찻잎 손질이 끝난 나도 이엘을 따라 이곳을 떠나려고 했는데.

-인간. 너는 잠시 이곳에 남아라.

“예?”

갑작스러운 나무 정령의 말에 나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나무 정령은 내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엘에게 말했다.

-이엘. 먼저 찻잎을 가지고 가거라.

먼저 찻잎을 가지고 가라는 말에 이엘은 내 쪽을 쳐다보며 망설였다.

“기다렸다가 아저씨랑 같이 가면 안 돼요?”

-금방 따라갈 테니 조금만 먼저 가 있거라. 아르엘 님이 기다리시겠구나. 어서!

아르엘이 기다린다는 말에 이엘이 어쩔 수 없이 나무 아저씨의 말에 따라 찻잎을 가지고 먼저 떠나버렸다.

이엘이 이곳을 떠나자 나와 나무 정령만 남게 되었다.

뭐랄까…….

마치 생활지도실에 끌려와 교감 선생님과 단둘이 남은 것 같은 어색함과 불편함이 느껴졌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고 있을 때, 나무 정령이 어색한 말투로 먼저 말을 꺼냈다.

-크흠. 인간.

“예? 나무 정령님.”

-저번에는 미안했다.

“……?”

다짜고짜 미안했다고 말을 꺼내는 통에 나는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나무 정령은 내 표정을 읽었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때는 이엘이 울고 있어서 너무 흥분했던 것 같다.

“아…….”

추가적인 설명에 나는 나무 정령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어색하게 사과의 말을 꺼내는지 알 수 있었다.

몰래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다 들켜 도망치던 이엘이 넘어져 울음을 터뜨렸을 때 일을 말하는 듯했다.

사실 나도 서럽게 울음을 터뜨린 이엘 때문에 너무 경황이 없어 나무 정령이 나를 공격했단 사실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이엘이 다친 데에는 제 잘못도 있으니까요. 너무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게 행동하자, 나무 정령은 오묘한 표정을 보였다.

-인간. 솔직히 지금까지 너를 계속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일을 통해서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

-네가 온 뒤로, 이엘은 더 밝게 웃고 즐거워한다. 오래된 나무일 뿐인 나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지.

자조적인 나무 정령의 말을 나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까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오해해서 미안했다.

“뭐 때문에 인간을 그렇게 싫어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겠죠. 이렇게라도 인정해 주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고맙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편하게 부탁하도록 해라.

나무 정령은 이엘이나 다른 아이들을 대하는 것처럼 인자한 말투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만났을 때 몰아붙이던 느낌이 남아 있어 조금 간질간질했지만, 그렇게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흠흠.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

나무 정령은 약간 망설이더니 몹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요즘 이엘과 아이들이 너무 뜸하게 찾아오는 것 같아서. 가끔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지켜볼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최근에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없어, 서운함과 외로움을 토로하는 나무 정령.

생각지도 못한 나무 정령의 모습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무 정령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 * *

찻잎 손질 작업을 끝내고 나는 균열을 나와 은행으로 향했다.

인터넷 뱅킹만 계속 이용하다가 직접 방문하는 것은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오늘 이곳에 오게 된 이유는 마지막 빚을 갚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빚은 갚았고 약간 남은 금액과 수수료만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어제 협회에서 들어온 약초값 대금을 확인함과 동시에 오늘 나머지 빚을 정리할 생각이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번호표를 뽑아 차례를 기다렸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조금 한산한 시간대라서 금방 내 차례가 왔다.

상담 직원 창구로 향하자 우연히도 예전에 상담했던 은행 직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를 기억해 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도 반갑게 마주 인사했다.

처음 이 직원을 이곳에서 봤을 때는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오늘은 완전히 다른 상황으로 찾아왔다.

나는 직원에게 은행을 방문한 용건에 관해 설명했고 직원은 친절하고 빠르게 처리해 주었다.

“끝났습니다.”

“다 끝난 건가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한동안 내 발목을 붙잡고 있던 짐이 이렇게 허무할 정도로 쉽게 끝나버렸다는 사실이 허탈하면서.

고생했다는 은행 직원의 한마디가 뭔가 울컥함이 올라오게 했다.

“감사합니다.”

은행 직원과 뜻깊은 악수를 하고 곧바로 은행 건물을 빠져나왔다.

하늘 위에 떠오른 태양 빛이 오늘따라 더 눈부시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거리다 아주 오랫동안 누르지 않았던 연락처를 보며 망설였다.

긴 망설임 끝에 나는 그 연락처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 뚜…… 여보세요?

통화가 연결되고 아주 오랜만에 듣는 익숙한 목소리에 반가움과 울컥하는 감정이 동시에 느껴졌다.

“원장 선생님. 저 세진이에요. 전세진.”

-오오. 세진이냐? 정말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셨어요?”

그는 내가 자란 시설의 원장 선생님이었고.

내가 가장 힘들었을 때 유일하게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었다. 물론 원장 선생님의 사정을 알기에 도움을 거절하고 연락을 피했지만.

-그래. 어떻게 지냈어?

“그냥 이런저런 일이 많았죠.”

아주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였지만 어색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함이 느껴졌다.

“선생님. 저 오늘 빚 다 갚았어요.”

-…….

“그때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리고 연락 못 받아서 정말 죄송했어요.”

-아니다. 내가 뭐 도와준 게 있다고. 정말 잘했다 세진아. 정말 장해.

원장 선생님은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기뻐해 주셨다.

“언제 한번 찾아뵐게요.”

-그래 언제든지 와라. 오늘 바로 와도 괜찮다.

“하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힘들 것 같고요. 이번 주 내로 꼭 찾아뵐게요.”

-그래그래.

원장 선생님과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정말로 마음에 큰 짐을 내려놓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원장 선생님과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원장 선생님을 위한 설렘은 잠시 접어두었다.

오늘은 또 다른 사람을 위한 설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곧바로 은행 건물을 지나 미리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 * *

조용한 카페.

나는 그곳에서 원장 선생님만큼 오랜만은 아니지만, 그만큼 반가운 사람과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세진 씨.”

“네. 정말 오랜만이네요. 지아 씨.”

테이블 맞은편에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예뻐진 것 같은 신지아가 앉아 있었다.

원장 선생님과 부드럽게 흘러갔던 대화와는 달리, 신지아를 만나니 혀가 굳은 것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반가운 마음은 가슴이 벅찰 정도였지만 왠지 어색하고 얼굴이 달아올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가방에서 준비했던 엘프 차를 꺼냈다.

“이건?”

“엘프 차에요.”

“어머! 이게 그 엘프 차? 요즘에 이거 엄청 귀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귀한 물건은 아니에요.”

“고마워요. 저는 선물도 못 준비했는데.”

신지아는 내가 건넨 엘프 차를 받아들며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래도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선물을 건네주고 다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나와 신지아가 이렇게 어색해하는 이유에는 오랜만에 만나서인 것도 있겠지만, 전혀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이야기 끝나셨으면 제가 좀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

“…….”

신지아 옆에 앉은 여자가 대뜸 말을 꺼냈다.

머리를 뒤로 묶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꺼내는 여자의 얼굴에는 어떠한 거리낌도 없어 보였다.

신지아와 단둘이 만날 줄 알고 이곳에 왔는데, 신지아는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한 명 대동한 상태였다.

우리가 어색한 표정으로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이게 긍정의 표현이라 생각했는지 곧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다시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미래 그룹 회장님을 모시고 있는 비서실 소속에 이혜린이라고 합니다.”

“아. 예…….”

“…….”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이혜린은 꿋꿋하게 소개를 이어나갔다.

나는 약간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고 신지아에게서는 미안한 기색이 느껴졌다.

“오늘 이렇게 무례를 저지르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연인의 만남 자리를 이렇게 방해해서…….”

“저…… 지아 씨와 저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

이혜린의 연인 관계라는 표현에 나는 당황하며 부정했고 신지아도 눈치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이혜린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렇습니까? 오늘 지아 씨가 평소와는 다르게 엄청 신경 써서 꾸미시는 모습을 보고 저는 당연히 연인 관계인 줄…….”

“혜린 씨!!”

“…….”

무표정한 얼굴로 신지아의 비밀을 거침없이 내뱉자, 신지아는 얼굴을 새빨갛게 만들며 이혜린의 말을 막았다.

나는 일부러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부렸다

이혜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리고 공적인 일로 왔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하자면…….”

“……?”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습니다. 세진 오빠.”

“……??!!”

“……??!!”

나는 깜짝 놀라 이혜린을 쳐다봤고, 신지아도 눈빛이 변해 나와 이혜린을 번갈아 쳐다봤다.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묘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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